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다양한 나라에서 번역 출간됐다. 좌측부터 한국어판, 독일어판, 스페인어판, 프랑스판 겉표지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다양한 나라에서 번역 출간됐다. 좌측부터 한국어판, 독일어판, 스페인어판, 프랑스판 겉표지
ⓒ 길찾기

관련사진보기


더 넓게 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우리는 이 유대 속에서 그동안 써왔던 가면을 벗고, 자신의 가장 연약한 얼굴을 보였다. 우리는 상처 때문에 흉터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동맹과 같았다. 아버지로부터 혹은 애인, 친구, 희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오랫동안 속죄 속에서 자신의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소외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동맹말이다.(<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에필로그에서)

작년 12월, 대한민국 밀양 - 평온이 깨지다

일평생 순박하게 농사만 짓던 어르신들이 뿔났다. 한 할배는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고, 또 한 할배는 스스로 농약을 마셨다. 칠십을 넘은 나이, 손주 재롱에 모든 시름 싹 씻을 황혼의 삶을 덮어버린 땅거미. 도대체 무엇이 뉘엿뉘엿 넘어가던 호젓한 생을 짓밟았나. 

책임 있는 자들은 죽음을 왜곡하고, 추모를 막고, 공사를 강행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찰은 길을 막고, 한전은 땅을 파헤치고 있을 게다. 추운 겨울, 밀양엔 할매들의 통곡만이 아스라이 울리고 있다.

할배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국가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어느 날 갑자기 동네에 경찰들이 들어섰다. 산으로 중장비가 올라갔다. 설명도 없다, 양해도 없다. 나물 따고 산책하던 산은 그렇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됐다.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무섭고 매섭다. 세상이 무섭다, 국가가 두렵다.

"나는 솔직히 데모에도 자신이 없고,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막겠느냐,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다. 나는 다 살았다. 한전 놈들 죽이고 싶다. 내만 죽는 게 아니라 글로 지나가면 다 죽는다. 어떻게 하든 765가 글로 가면 안 돼. 와 저놈의… 와 지나가노."(송전탑을 반대하며 생을 마감한 고 유한숙 할아버지가 남긴 말)

송전탑을 강행하는 이들에게 인간의 죽음은 무슨 가치를 갖나. 무지막지한 공권력 앞에 한없이 초라했던 할배들이 죽음으로 세상에 말하고자 했던 건 무엇인가.

13년 전, 스페인 - 타의에 의한 자유로운 비상

34유로. 지금 환율로 5만원 남짓. 모든 건 34유로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을 34유로보다 못한 가치로 취급한 사회와 국가 탓이다.

2001년 5월의 어느 저녁, 한 남자가 병원 창문을 통해 비상했다. 그의 육신은 자유 낙하했고, 정신은 하늘로 날았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등졌다. 자살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온전히 스스로의 귀책사유일까. 살아온 날들을 톺아보면 마냥 그리 생각하기만 힘들다. 그의 나이 아흔이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주인공 안토니오는 아흔의 삶을 자살로 마감했다. 그러나 추락하는 몇 초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비상'으로 봐야했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주인공 안토니오는 아흔의 삶을 자살로 마감했다. 그러나 추락하는 몇 초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순간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추락'이 아니라 '비상'으로 봐야했다.
ⓒ 안토니오 알타리바·킴

관련사진보기


남자는 1910년 스페인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땅을 넓히기에만 골몰했던 가족을 떠났다. 도시로 가면서 취득한 운전면허증을 통해 꿈꿨던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운전을 하고 싶었다. 차를 타고 자유로이 세상을 누비고 싶었다. 그냥 그것뿐이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싫었고, 억압 받기도 싫었다. 그러나 정치권과 있는 자들의 결탁은 민중의 삶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도시와 시골, 어느 곳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그 시절 청년들이 그렇듯 전선으로 끌려갔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선을 오가며 편지를 배달하면서도 사람들의 반가운 표정에서 '행복'을 보는 일이 마냥 좋았다. 그가 비참한 나날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온전히 숭고한 사상과 함께 자유롭게 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뜻을 함께 한 이들이 있었고, 생각에서만큼은 한계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사업을 하면서도 결국 '가난한 사람을 속이고 착취한 대가'가 싫어 만족스러운 직장을 버렸다. 함께 평등한 세상을 꿈꾸던 동료들이 변해가는 걸 보기가 힘들었다. 전쟁만 끝나면 찾아올 줄만 알았던 장밋빛 인생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소중했던 시간을, 정의로운 세상을 꿈꿨던 그 시절을 기억에서 지워야만 했다. 

그가 이론적인 공부를 통해서 아나키즘을 체득했다고 보긴 힘들다. 아니, 오히려 속물의 시대를 살며 몸으로 앓았던 열병이 그를 아나키스트로 변모시켰다. 자연스레 느낀 자유와 이상을 실현코자 했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꼈다. 인간을 위했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무엇보다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타인의 눈으로 분류되는) 아나키스트가 됐다.

자유를 간절히 원했던 그는 말년에도 치료란 이름으로 감시를 당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그의 호소에 돌아오는 대답은 "적극적으로 노력하라"는 말이었다. 생의 마지막 날, 모든 걸 놓으니 홀가분했다. 그의 가슴을 파먹던 두더지는 사라졌고, 상처는 아물었다. 말끔히 샤워와 면도를 했고, 식사를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다. 자, 이제 됐다. 날아오를 시간이…"(<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에서 주인공 안토니오가 하는 마지막 대사)

 안토니오는 전쟁터에서 동료 셋과 함께 납탄으로 만든 반지를 나눠 꼈다. 이른바 '납탄 동맹'을 체결하고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 선언한다.
 안토니오는 전쟁터에서 동료 셋과 함께 납탄으로 만든 반지를 나눠 꼈다. 이른바 '납탄 동맹'을 체결하고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 선언한다.
ⓒ 안토니오 알타리바·킴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안토니오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아들은 아버지가 있던 양로원의 원장으로부터 편지를 한통 받았다. 월 이용기간을 3일 초과했기 때문에 34유로를 지불하란 내용이었다. 아들은 그들의 보호 소홀에 대해 지적하고 자식의 애도를 존중하란 취지로 답을 했다. 그렇게 일은 매듭지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가 막 지나자마자 양로원 측은 다시 34유로를 요구했다. 이번에는 불어난 이자와 함께.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차라리 채무 불이행으로 감옥에 가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적 불의의 희생양이 된 아버지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사건은 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하고 유해를 뿌리고 난 후에도 그분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짓이었다.(<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에필로그에서)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비인간적인 관료주의'와 '권위적이고 오만한 민주주의의 횡포'에 맞서기로 했다. 작가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책을 택했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시민들이 정의를 찾기 위해 권력자들에게 맞섰던 전쟁에서의 패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치른 전쟁은 아버지와 그 세대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인생을 걸고 어마어마한 희생정신으로 싸웠지만, 나는 복잡한 서류들과 과장된 미사여구들이 난무하는 싸움을 했다. 결국 나는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가 치렀던 전쟁들과 그분의 패배를 이제는 나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능함을 실감하면서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기도 했다. 글쓰기는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고발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기에.(<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에필로그에서)

그에게서 밀양의 할매·할배들이 보인다

이상이 현실에 함몰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안토니오가 느꼈을 번민과 고뇌를 읽어야 한다. 그가 죽음으로 세상에 외치고자 했던 건 무엇인가, 혹은 이루고자 했던 성취는 무엇인가. 가장 자유로웠던 순간은 결국 생의 마지막이었다. 생의 순간순간 그를 억누르고 목을 졸랐던 건 도대체 무엇인가.

아버지의 좌절은 아들의 무기력으로 귀착된다. 그 끝에 무엇이 보이는가. 우리 모두 죄인이다. 어렴풋이 보이는 사실, 그게 진실이다. 자살과 타살 그 애매한 갈림길의 무게추는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시각적 은유법의 적절한 구사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바로 이런 표현이 돋보였던 '주인공의 눈을 쪼는 프랑코 장군의 독수리'
 시각적 은유법의 적절한 구사는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바로 이런 표현이 돋보였던 '주인공의 눈을 쪼는 프랑코 장군의 독수리'
ⓒ 안토니오 알타리바·킴

관련사진보기


밀양은 오늘도 울고 있다. 법의 이름으로 온갖 폭력과 야만이 판을 친다. 정의란 양심에 따르는 것이지, 전체주의적 함의에 매몰되는 게 아니다. 이제 그만 뿌리치는 그 억센 손 거두어라, 할매들 그냥 살게. 이제 그만 내뱉는 그 거친 입 다물어라, 할배들 그냥 살게. 어린 시절 뛰놀던 그 산, 오르게 그냥 둬라. 오순도순 살게 그냥 둬라. 너희, 양심은 있잖은가.

덧붙이는 글 |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번역, 길찾기 펴냄, 2013.07, 1만4천원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이미지프레임(2013)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길찾기#안토니오 알타리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