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설 연휴가 시작된 어제(1월 30일), 헤이리의 아침은 짙은 안개에 잠겼습니다. 살짝 젖은 정원 땅으로 내려섰더니 가는 비가 손등에 닿았습니다.
눈으로도, 귀로도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수줍게 내리는 가는 비, '색시비'였습니다.
그 아무 소리 없이 내리는 그 색시비도 잣나무 잎 끝에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짙은 안개는 익숙한 마을 풍경을 딴 세상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정원의 자작나무의 부릅뜬 눈으로도 짙은 안개 너머의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
아침 안개는 하루 앞으로 다가 온 갑오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2 춘추전국시대에는 越(월)나라의 도읍지였던 사오싱(紹興). 상하이의 남쪽, 항주(杭州)와 영파(寧波)사이에 있는 이 작은 도시는 중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낙후한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잠시라도 들려서 유작취(油炸臭)라는 발효두부를 안주삼아 중국의 황주(黃酒)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 도시의 명주, 사오싱주(紹興酒)를 한 잔씩 비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인구 10여 만의 작은 도시지만 작은 다리가 많아 '스이시앙치아오더우(水鄕橋都, 수향교도)'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수로가 발달한 물의 도시로 저장성(浙江省)의 베니스라 할 만합니다.
또한 이곳은 오나라 부차(夫差)의 '와신(월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한 합려가 아들 부차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유언했고, 부차는 가시장작위에서 잠을 자면서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겨 마침내 원수를 갚았다)'과 월나라 구천의 '상담(부차에게 패한 구천은 그 모욕을 되갚기 위해 잠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 놓고 그것을 핥으면 치욕을 상기해서 20년 뒤 마침내 부차를 생포하여 자살케 했다)'이 합해진 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현장입니다.
이 도시로 여행자의 발길을 잡아끄는 또 다른 이유는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魯迅)의 고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곳의 몰락한 관료의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센다이 의대로 유학했으나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보다 나라의 병을 고치는 것이 더 중하다고 여겨 귀국후 문학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유학을 중단하고 민중을 깨우기 위해 귀국하는 마음이 이랬을까?
"혹한을 무릅쓰고 2천여리를 거쳐 20여 년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고향으로 나는 돌아왔다. 계절은 한겨울, 고향에 가까워 옴에 따라 날씨도 흐리고 차디찬 바람이 선창에 불어와 우우하고 소리를 냈다. 배 사이로 바라보면 회황색의 하늘 아래 여기저기에 외로운 듯이 마을들이 누워있고 아무런 활기도 없다. 끊임없이 내 마음에 비애가 일어난다."(루쉰의 <고향>) 그렇지만 그의 자전적 소설 '고향'에서는 '희망'을 말합니다.
"희망이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루쉰의 <고향>) #3 저의 이웃인, 백농스튜디오 한태상 작가께서는 올 설에도 숫접은 선물을 보내오셨습니다.
말랑말랑한 현미 가래떡과 책 한권 그리고 한작가님께서 직접 쓰신 새해인사를 그 책갈피에 담았습니다.
서예가인 한작가께서는 전통서법에 갇히지 않고 회화의 조형으로서의 서예에 천착하고 계십니다.
'事事如意(사사여의)'
한 작가께서 마음을 모아쓴 그 글귀를 서가에 걸면서, 루신의 귀국길에 품었을 그 '희망'을 염원해봅니다.
헤이리. 본래 이 땅은 임진강 물이 드나드는 뻘이었으며 양지바른 얕은 산자락아래, 소택지 주변에 논이 있었습니다.
십수 년 전에 그 땅위에 '문화예술'이라는 뜻을 파종했고 그 땅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졌서 지금 길이 되고 마을이 되었습니다.
뻘이 길이 되었듯, 오늘 2014년 원단(元旦)의 우리 희망이 '일마다 뜻대로 되어(事事如意)' 구체적 현실이 될 것을 염원합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