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호주 브리즈번에서 한인 세 명이 잇따라 사망했다. 사망자 셋 모두 한국인 '워홀러'였다. '워홀러'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 등 외국에 와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사망 사유는 모두 달랐지만, 사망 사건이 잇따르면서 호주 워킹홀리데이 실태가 이슈화됐다. 영어권 나라 중 캐나다·뉴질랜드·아일랜드 등도 우리나라와 청년 워킹홀리데이 협정을 맺고 있지만, 호주는 비자 발급 절차가 간단해 한국청년들이 특히 많이 오고 있다.개인적으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 멜버른(Melbourne)에 와 있지만 소위 '워홀러'라고 불리는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회사 동료, 프로젝트를 통해 만났던 한국 출신들은 국적이 호주나 뉴질랜드여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었다. 살던 동네에도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시티'(City)라고 부르는 시내 중심가에 나갔을 때, 그곳을 동네 주민처럼 다니면서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20대 초반 사람들을 보면 '워홀러인가 보다' 하고 추측하는 게 전부였다. 진짜배기 한국인 워홀러가 호주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 기자말
호주 '워홀러'(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들의 삶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은 어디일까. 답은 '농장'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호주에 와서 추가로 1년을 더 머무르기 위해서는 '세컨드 비자'(Second Visa)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 비자를 받으려면 흔히 '농장일'(Farm Work)이라 불리는 일을 88일간 해야 한다.
세컨드 비자란 호주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 인력이 부족한 지역(Area of Regional Australia)의 농장·광산·공장·건설현장 등 특정업종(Specified Industries)에 종사하는 대신 호주에서 1년을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제도다. 한국인 워홀러뿐만 아니라 영국·아일랜드·대만·이탈리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워홀러들은 세컨드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고 일도 쉬운 편에 속하는 농장에 모이곤 한다.
지난해 12월 18일, 우리(나와 내 친언니)는 한인들이 모여 일하는 농장을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종합정보누리집 검트리(Gumtree)가 아닌 한인 커뮤니티(호주바다,
www.hojubada.com)를 이용했다. '구인구직' 탭을 누르니 '농장구인정보' 게시판이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멜버른 휴양지근처 딸기팜에서 픽커 구인 세컨(세컨드 비자) 가능' '체리픽커 모집' 등과 같은 농장 구인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글 제목마다 '급구' '세컨 확실' '페이 깔끔' 등의 수식어들이 달려 있었다. 호주의 12월은 여름이라 딸기·오렌지 등 농사가 한창이다. 우리는 딸기를 따는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멜버른 근처 세 곳, 애들레이드 근처 두 곳 등 총 다섯 곳의 딸기농장을 물색해봤다.
'농장일'을 위해 확인해야 할 것들
한국 포털과 한인 커뮤니티 등을 검색한 결과, '농장에 가기 전 확인해야 할 것들'이 정리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컨드 비자 발급'과 '돈 문제'였다.
전자의 경우, ▲ 세컨드 비자가 가능한 지역에 있는 농장인지 ▲ 페이슬립(Payslip, 급여명세서)이 정확히 나오는지 ▲ 세컨드 폼(세컨드 비자 신청시 필요한 서류)을 써주는지 등이 해당된다. 돈 문제는 ▲ 일을 함에 있어 '웨이팅'이 있는지 ▲ 시급제(Hourly rate)인지 능력제(Contract)인지 ▲ 능력제라면 계산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 ▲ 일자리 소개비가 있는지 ▲ 주 며칠 일하는지 ▲ 임금이 정확히 나오는지 ▲ 집에서 농장까지 픽업비가 있는지 ▲ 방값은 얼마인지 등을 따져봐야 한다.
여기서 '웨이팅'은 농장일을 신청한 뒤 일자리가 나기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워홀러들은 기다리는 기간도 농장 숙소에서 보내게 된다. 이때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숙소에서 지내는 비용은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세컨드 비자를 따기 위해 날짜를 채우기 위해 농장을 찾은 워홀러들은 상황이 이런 데도 '을'(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가 일을 시작하기도 한다. 일자리와 함께 살 곳도 정해지는 만큼 장볼 곳, 집 주변 환경, 교통편 등도 충분히 확인해야 하지만 농장에 가려는 워홀러 중 다수는 세컨드 비자 발급만 가능하다면 다른 여건들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월급 450만 원이 넘는 일자리?"저…, 농장일 알아보고 있는데요. 사람 구한다고 하셔서요. 다음 주 크리스마스 지나서 들어가려고 하는데요. 여자 두 명이요."우리의 전화를 받은 이는 스스로를 '슈퍼바이저'(Supervisor)라고 소개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였다. 일정과 인원을 말하니 바로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화로 확인한 농장 다섯 곳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 즉 한인 커뮤니티 등에 구인 글을 올린 사람은 대부분 슈퍼바이저였다. 물론 컨트랙터(하도급 계약자, Contractor)나 워커(노동자, Worker)가 전화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호주바다' '멜번의 하늘' '애들레이드포커스' '호주나라' 등 한인 정보 누리집에 올라오는 한인 워커 구인 정보는 특별한 언급이 없을 경우 한인 슈퍼바이저나 한인 컨트랙터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농장에 대한 소개도 거의 비슷했다. 슈퍼바이저라는 이는 우리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제 딸기 철이라 일손이 많이 필요해요. 여자 두 분이죠? 저희 농장이 집 하나를 새로 열어서 다음 주면 바로 들어오실 수 있고요. 다른 데는 웨이팅이 있는 곳도 많은데 저희는 없어요. 저희는 시급제가 아니라 능력제인데요. 딸기 1킬로그램을 따면 0.8호주달러입니다. 여자들은 하루 평균 60~70트레이의 딸기를 따요. 많으면 100개도 따요. 트레이 한 개에 보통 3킬로그램이 들어가니까, 대충 계산되시죠? 일은 매일 나가는데요. 쉬는 날은 일주일에 한 번 쓰실 수 있어요. 3일 전에 미리 말씀만 하시면 됩니다. 원하시면 주 7일 근무도 가능하고요."
일단 웨이팅이 없었다. 호주 워홀러 김진호(25)씨는 지난해 8월부터 콥스하버(Coffs Harbour)에 있는 농장에 가서 대기하다가 11월 말이 돼서야 농장에서 블루베리 일을 시작했다. 김진호씨는 "세컨드 비자는 따야겠고, 자리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김진호씨의 사례를 봤던 신수미(25)씨는 농장을 알아볼 때 웨이팅이 없는지만 확인했다. 다른 여건들은 중요시하지 않았다. "한인을 통해서 찾을 수 있는 곳이 한정돼 있는데 다 따지면 갈 수 있는 곳이 몇 개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슈퍼바이저의 설명을 들으니 수입도 쏠쏠해 보였다. 딸기 한 트레이를 채우면 2.4호주달러이니, 하루 100트레이를 따면 240호주달러가 된다. 하루 9시간을 일한다고 계산해도 시급은 약 27호주달러. 일주일 내내 근무하면 1680호주달러(한화 약 160만 원, 1호주달러에 951원으로 계산했을 때)이다. 주 5일 일하면서 하루 100트레이의 딸기를 딴다고 쳐도 한국 기준으로 월급 450만 원이 넘는 수준이다. 하루 60트레이만 따도 월 수입은 약 280만 원. 세컨드 비자도 가능한데다가 수입까지 짭짤해 보였다(슈퍼바이저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이렇게 우리는 웨이팅 여부, 임금제, 근무 여건을 확인했다.
"저희는 텍스 잡이라 페이슬립(급여명세서)이 나갑니다. 세금은 최저로 내고요, 페이(임금, Pay)는 일한 만큼 다음 주 수요일에 바로 계좌로 지급돼요. 농장 픽업비는 하루에 7호주달러입니다."우리가 연락을 취해본 농장들은 하나같이 '세컨드 비자 발급이 가능하다' '페이슬립도 바로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컨드 비자를 받을 때 페이슬립은 매우 중요하다. 호주 이민성에 세컨드 비자를 신청할 때, 급여명세서를 함께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컨드 비자 관련 내용을 더 확인했다. 우리가 이곳 농장에서 일하는 기간은 길게 잡아도 3주였다. 사전 통화에서 "3주간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자 슈퍼바이저는 "세컨드 비자 따시려는 거 아니세요? 저희는 30일 이상 일해야 세컨드 폼을 써드리는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워홀러가 농장에서 단 하루라도 일했을 경우, 농장 측이 세컨드 폼을 작성해줘야 하지만, '30일 이상'이라는 자체 기준을 마련해두고 있었던 것.
"침대요? 호텔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최소한 일해야 할 기간을 확인했으니 이제 숙소를 확인해야 할 차례다. 슈퍼바이저는 "셰어하우스(Sharehouse)를 운영하고 있다"며 "열다섯 명 정도가 지내는 집인데, 지금 자리 있는 여자방은 4인 1실"이라고 설명했다. 비용은 보증금(Deposit) 200호주달러에 주당 비용이 100호주달러였다. 보통 호주에서는 디파짓 또는 본드(Bond)라고 불리는 보증금을 미리 낸다. 대개 2주 치 주세에 해당하는 돈을 낸다.
우리는 살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멜버른의 한 농장에 들어가 보기로 결정했다. 멜버른에 지내고 있던 집이 있던 터라 "숙소 있는 역까지 40분이면 갈 수 있다"고 통근 가능 여부를 물어봤다. 그랬더니 슈퍼바이저의 대답은 단호했다.
"보통 오전 6~7시에 나가기 때문에 여기서 살아야 해요. 대중교통으로 오시는 건 좀 곤란합니다."우리가 일자리를 알아봤던 멜버른 인근 농장 중 한 곳은 "숙소에 안 살면 안 되냐"는 질문을 던지자 돌변하더니 연락을 끊기도 했다.
농장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보기로 마음먹은 뒤 '새집'(?)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슈퍼바이저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이불·식기도구·가전제품 등의 현황을 알아놔야 필요한 물건을 적절히 챙길 수 있고, 주소를 알아놔야 어떤 트램·트레인·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지 파악할 수 있지 않겠나. 또 장은 어디서 볼지, 가까운 은행은 어디인지를 알기 위해 주소 등 주변 환경을 살피는 것은 필수였다.
"침대는 2층 침대인가요?" 4인 1실에 싱글 침대 네 개를 넣을 것 같지는 않아 2층 침대가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하하, 농장 처음이시죠? 그런 고급스러운 데를 생각하시면 안 되죠. 호텔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농장 셰어하우스에 침대가 있는 곳은 없어요."
좌식 생활에 익숙한 한국의 하숙집이나 자취방에 침대가 없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입식 생활을 하는 호주에서 집에 침대가 없는 것은 비상식적인 상황이다(더군다나 호주에서 침대는 사치품이 아니다, 어느 집에나 다 있는 가구다). 호주의 12월은 여름이긴 하지만, 한국과 다르게 일교차가 커 아침저녁으로는 긴소매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 슈퍼바이저의 말을 종합하면,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바닥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었다. 보통 부동산을 통해 셰어하우스에 살게 될 경우 침대커버, 베갯잇, 이불 등 침구를 준비해준다. 하지만 이곳은 침구도 각자 준비해야 했다. 열다섯 명이 사는 집이라고 했는데 "화장실이랑 샤워실은 따로 하나씩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주소는 비밀'... 대체 무슨 일자리이길래마지막으로 우리는 "슈퍼마켓이나 주변시설을 찾아보게 주소를 알려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슈퍼바이저는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그건…. 들어오시기 전에는 알려드릴 수 없어요. N역까지 오시면 저희가 데리러 갈게요. 역에서 가까워요. 걸어서 30분 정도?"우리가 주소를 묻자 슈퍼바이저는 난감해했다. 멜버른 면적은 서울 면적의 14배 이상. 트레인 역에서 도보로 30분이면 가까운 편이 맞다. 하지만 주소를 알려줄 수 없다는 슈퍼바이저의 말에는 감추고 싶은 뭔가가 있어 보였다.
세컨드 비자 발급도 가능한 농장, 일주일에 1000호주달러가 훌쩍 넘는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도시인 멜버른에서 멀지 않아 근무조건은 매력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셰어하우스에는 열다섯 명이 산다는데, 샤워실과 화장실은 각각 하나인데다가 침대도 없단다. 세컨드 비자 폼은 30일 이상 일해야 써준다고 한다. 가장 의심스러운 것은 주소 공개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달콤한 제안 뒤에 숨겨진 건 없을까. 3D 업종에 종사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일하는 워홀러의 삶을 가까이서 들어보기 위해 그들의 일터에 뛰어들었다. 불안함과 의심을 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