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들이 설 대목장이라고 하길래 살 게 없었지만 구경삼아 나가봤다. 장마당에 나가보니 사람들도 많고, 평소에 없던 것도 보인다. 유과니 깨묵이니…, 깨묵이라는 것은 곡성에 와서 처음 봤다. 깨 냄새가 나면서도 상당히 맛있는 묵이다. 콩유과도 사고 깨묵도 사고 땅콩도 샀다. 거기에 꼬막에 굴까지 샀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딱 맞다. 아무것도 살 게 없다고, 그저 구경 나왔노라고 했지만, 돌아올 때 보니 몇 보따리나 장을 봐왔다.
서울에서, 광주에서, 전국 도처에서 자식들이 오는지 벌써 동네 골목에는 차가 꽉 찼다. 집집마다 모처럼 수선스러운 소리가 났다. 그런데 연심이네와 우리집만 별다른 기척이 없다. 우리집도 우리집이지만 행여 설날 아침 혼자 있을 연심이네가 마음에 걸려 현관문을 두들겼다.
"내일 아침에 우리 집에 오셔요. 떡국 같이 먹게.""아니여. 이거나 먹어봐." 연심이네가 금방 해놓은 도라지튀김과 더덕튀김을 내민다.
"혼자 먹느니 같이 먹게 오셔요." "아니여. 나는 아침에 밥채려야 혀." "그래요?"아~, 그렇구나.
"몇 그릇이나 채리요?" "일곱 그릇." "음식을 다 혼자 하셔요?""아문. 우리 시어머니가 헌 대로 해야제." "그럼 아침에 밥 채려놓고 우리 집 오셔요." "아니여. 초하룻날 여자가 어딜 넘으집에 간당가. 옛날 같으면 초사흘은 지나야 혀." "그래요?""하먼. 설 쇠고 난중에 같이 묵어. 이것이나 좀 갖고 가."나는 말만 꺼내놓고 하릴없이 도라지튀김·더덕튀김만 얻어왔다. 시부모는 진즉에 돌아가시고 몇 해 전 아저씨가 세상을 뜨고, 멀리 흩어져 사는 자식들은 오기 어려워 명절에 연심네는 혼자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돌아가셨어도, 눈에 보이는 형체는 없어도, 혼자 지내는 게 아닌 모양이다. 설날 아침, 밥을 일곱 그릇이나 차려야 한다니. 누가 없어도 튀김도 하고, 전도 부치고, 상 차릴 음식을 하는 것이다.
"아직 떡 안 했제? 가지고 가서 아저씨 드려"
창밖으로 난데없이 송정댁할매와 아가씨 둘이 나타났다. 사나운 길을 송정댁할매가 올라오는 걸 보고 놀라서 나가 보니 손녀딸을 대동하고 오셨다. 손에는 유기농 쌀 한 자루와 설 음식이 들려있다. 떡에, 엿에, 전에…. 주말이면 곧잘 셋째 아들 며느리와 손자들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 설에는 자식들이 모두 모였나 보다. 할매의 흐뭇한 마음이 내게까지 느껴진다.
올해 설날, 나는 결국 떡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떡이야 설 닥쳐서 해도 되겠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쌀을 씻어 불린 뒤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떡을 해오는 것도 내게는 일이었다. 늑장을 부렸던 것. 그런데 문득 마을회관에 쑥인절미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집 저집에서 떡을 하자마자 마을회관에 한 접시씩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그 집 아직 떡 안 했제? 가지고 가서 아저씨 드려."마을회관에서 할매들이 드시다 말고 싸주는 떡을 나는 염치도 없이 좋아라 들고 집에 왔다. 그만해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양이었다.
'이제 내일이나 모레 떡국떡만 해오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봉덕이네가 뭔가를 들고 오는 게 보였다.
"이거 집에서 했응께 묵어봐. 얼마 안돼야." 쑥떡과 떡국떡이 반반 담긴 큰 양푼이다. 떡국떡은 우리 식구가 설날 아침 떡국을 끓여먹고도 한참 남을 양이었다.
"나는 인자 떡 안해불라요. 하하." 내가 내놓고 좋아하자 봉덕이네도 웃었다.
"응 허지말어. 한 번은 묵겄제.""그나저나 나는 드릴 것도 없는디 어쩌까요." "그런 소리말아. 나눠묵는 정이제." 말랑말랑한 쑥인절미를 먹어 보니 도시에서 사먹던 것과는 천지차이로 맛이 있었다. 진짜 쑥인절미 맛은 바로 이런 거였나 보다.
'쬐깐'만 주신다더니... 떡이 넘치네요
다음 날, 대목장에서 만나 차를 타고 동네에 같이 들어온 제수네가 부득부득 또 떡국떡과 쑥인절미 한 바가지를 내밀었다.
"우리는 사돈댁이랑 여러 집에 보내야 해서 많이 못줘. 쬐깐만 드리요잉."제수네의 '쬐깐'이 며칠 떡만 먹어도 남을 양이었다. 떡을 하지 않은 우리집에 떡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지금 금방 했응께 묵어봐. 아그들 줄라고 쑥을 많이 넣었구만." 저녁에 잠깐 들린 이장댁은 쑥떡 공장이라도 차린 듯 온통 쑥떡 천지를 하고 있다가 기어코 나에게도 한 봉지 담아줬다.
"우리 식구는 어째 떡을 안묵어. 조깐 갖고가 잉." 종채네서 또 떡 한 바가지. 다음날 마주친 또랑갓집에서 또 떡국떡과 쑥떡과 찰떡…. 두계마을 인심덕에 우리집은 떡 안 하고도 푸지게 떡을 먹으며 푸지게 명절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