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모두 '권은희'였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초기 수사를 지휘한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폭로로 법정까지 오게 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그의 진술 때문에 6일 무죄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이날 107쪽에 달하는 판결문 곳곳에서 "권은희를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근거는 크게 두 가지. 그의 말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다른 주요 관계자들의 진술과도 모두 엇갈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주장과 다른 사실] "통화내역 없고, '깡통디스크'엔 국정원 직원 ID 담겨"권은희 과장은 지난해 8월 30일 이 재판의 첫 번째 증인으로 출석, 2012년 12월 12일 오후 3시쯤 김 전 청장으로부터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 컴퓨터 등의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지 말라'는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또 수서서 의뢰를 받은 서울청 디지털 증거분석팀이 김씨가 임의제출한 노트북과 컴퓨터 분석과정 초기에 그를 참여시켜 김병찬 서울청 수사2계장에게 항의했다고 증언했다.
서울청이 2012년 12월 14일 김씨의 인터넷커뮤니티 '오늘의 유머(오유)' ID 등이 담긴 텍스트 파일을 찾고도 수사팀에 19일에서야 알려줬고, 증거물 반환도 지연했다며 12월 14일부터 19일을 "잃어버린 5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하지만 6일 법원은 그의 말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압수수색 영장 신청 보류의 경우 그날 오전에 이미 김기용 당시 경찰청장이 내린 지시에 따라 검찰청으로 가던 수사팀원들이 복귀했고, 김하영의 증거 분석 참여나 증거물 반환을 두고 김병찬 계장과 전화로 다퉜다는 얘기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재판부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본 사람도 없고, 서울청 분석관들이 김하영에게 '그쪽이 지정한 디지털 정보만이 아니라 모든 파일을 열람해야 한다'고 설득, 확인서까지 받았다며 권 과장의 진술이 이때 상황과 어긋난다고 했다.
권 과장은 18일 저녁에서야 분석 결과가 담긴 하드디스크를 받았지만 ID 등 중요한 자료가 없는 '깡통'이라는 보고를 받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이 하드디스크에 김씨의 ID 등이 들어있었음이 확인됐다. 재판부는 "검증 절차에서 하드디스크에 ID 등이 담겼던 게 드러났고 수사팀이 이걸로 구글 검색을 한 시기조차 권은희의 진술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신빙성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왕따 진술] "경찰들 말 맞추고 권은희만 진실 얘기? 근거 없다"권 과장의 진술이 다른 경찰관들의 말과 줄곧 어긋난 점도 탄핵 이유였다.
이번 사건의 증인으로 나온 수사관계자들은 한 목소리로 '김용판 전 청장이 수서서를 디지털 증거 분석과정에서 배제하고, 분석 결과를 늦게 주거나 핵심 내용을 빼고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권 과장과 함께 일했던 수서서 사람들의 증언도 비슷했다.
재판부는 "검사는 이들이 진술을 번복했다며 말을 맞췄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직급이나 정치 성향 등이 서로 다른 모든 경찰관들이 상당한 시차를 두고 검찰 수사를 받고 법원에서 증언하면서 모의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기록상 그런 사정이 보이지 않는 만큼, 결국 권은희만 진실이라는 검사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결론은 입증 부족] "검찰, 합리적 의심 없이 유죄 확신하게 만들지 못해"김 전 청장이 당시 분석 관련 보고를 '수기 메모나 구두로 하라'고 지시, "수사팀도 보안대상"이라 한 점 등은 모두 '그럴 수 있다'고 봤다. "이때 YTN이 분석상황을 단독 보도했기에 보안을 강조해야 했다"는 김 전 청장과 "그의 지시를 일반적인 보안 유지 강조로 봤다"는 서울청 관계자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서울청 분석팀이 국정원 직원 요구에 맞춰 분석 범위를 '2012년 10월 이후 문재인·박근혜 지지 또는 비방글'로 정하고, 수서서에 검색 키워드 축소 요청을 한 일 역시 이들의 경험과 지식에 비춰 볼 때 정당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청장의 개입 없이 분석팀 내부 토론을 거쳐 효율적이고 적법한 증거 수집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는 이유였다.
텍스트 파일이 나온 직후 일부 분석관들이 증거분석실 CCTV를 의식, 목소리를 낮춰 대화한 것도 "정치적으로 예민한 얘기가 공개될 때의 파장을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결국 '입증이 부족했다'는 이야기였다. 재판부는 "많은 증거들로 파악한 사실관계에 기초, 경험과 논리 법칙 등에 근거해 판단하건데 검사의 논증이 의혹과 추측을 넘어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유죄를 확신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 "검사가 특정인의 진술을 지나치게 믿고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공소를 제기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검찰을 질타하기도 했다.
이날 재판을 방청한 박주민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 역시 "검찰이 너무 권은희 과장 진술에만 의존했고 추가 수사가 부족했다"고 평했다. 또 "재판부가 너무 쉽게 김용판 전 청장 등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는 "서울청 분석팀이 국정원 직원의 찬반클릭을 수사 대상으로 삼지 않았는데, 텍스트 파일 내용을 보면 대부분이 찬반클릭 방법, 이와 관련 IP 변조 등인데, 경찰은 알면서도 수사를 안 했다"고 지적했다. 분석 범위 제한 역시 "서울청이 적법하게 하려고 했다면 권 과장 말대로 영장을 다시 발부받으면 했는데 노력하지 않았다"며 "재판부가 그런 의도들을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