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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 계약 논란' 노동자들 "말도 안 된다고?...홍문종과 면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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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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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1일 오후 2시 20분] 구멍 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자 입김부터 나왔다. 신발을 신은 채 현관 옆방으로 향했다. 두툼한 패딩부츠 안으로 시린 기운이 스며들었다. 어두운 황토색 빛을 내는 전구 아래에 1평 공간이 자리했다. 싱글 침대와 1인용 옷장 탓에 발 디딜 여유조차 없었다. 에디(Chipani Edwin)의 방이었다.
"사실 여긴 방이 아니에요. 집 밖 발코니를 방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좀 추워요."에디가 머리를 긁적이며 털어놨다. 집에 몸을 누일 공간이 없어 외부공간을 개조해 방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난방이 안 된다. 커튼 한 장이 발코니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겨우 막고 있었다.
발코니에서 살아가는 에디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온 조각가다. 그는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 일한다.
쌀 무한정 제공? 알고 보니...에디를 비롯해 아프리카예술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이주노동자 12명은 10일 박물관의 '노예노동' 실태를 고발했다. 처음 약속과 다르게 수년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급여를 받았고, 영화 <설국열차>에 나오는 '꼬리칸'과 같은 기숙사에서 겨우 생활해왔다는 주장이다.
<오마이뉴스>는 이날 늦은 오후, 경기 포천시 무림1리 마을회관 인근에 위치한 박물관 이주노동자 기숙사를 찾았다.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돌아온 이들이 보여준 집 안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곳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에디가 사는 기숙사는 1960년대에 지은 집으로 방 1칸, 부엌, 화장실이 있다. 집 주인은 기자에게 "보증금 300만 원에 월 15만 원 짜리 집이다, 박물관에서 매달 집세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지은 지 50년이 넘은 이 집에는 짐바브웨 조각가 3명이 살고 있다.
3평 정도인 방 한 칸은 에디가 사는 발코니와 상황이 비슷했다. 합판으로 된 벽 사방은 곰팡이로 가득했다. 흰색 벽지는 이미 거무스름하게 물든 지 오래다. 벽 한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있어 바깥 냉기가 방안으로 곧장 들어왔다. 보일러는 켜졌지만 방바닥은 금세 데워지지 않았다. 보일러 온도기에 찍힌 실내온도는 영상 4도였다.
에디는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박물관 지하에서 살았는데, 여기나 거기나 환경이 안 좋은 건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손이 시린 듯 이야기하면서 계속 양손을 비볐다.
부엌에는 500리터 짜리 냉장고 한 대가 놓였다. 박물관이 아닌 친구가 선물해준 것이다. 냉장고 안에는 겉이 바싹 마른 양배추와 피망, 인스턴트식품이 있었다. 이들이 받는 식비는 1인당 하루 4천 원. 이마저도 2500원에서 오른 금액이다. 에디는 "식비가 너무 적어 제대로 된 음식을 해먹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박물관 쪽은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식비논란과 관련해 "쌀을 무한정 제공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박물관은 기숙사마다 정기적으로 10kg 쌀 한 포대씩을 지급했다. 에디의 기숙사는 지난 4일께 새로운 쌀을 받았다. 그런데 쌀 봉투에는 '2014년 1월 2일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쌀을 받은 것이다. 집 안에 있던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몇 차례 겪은 일"이라면서 "유통기한 지난 쌀을 주는 것에 대해 박물관에 항의를 해도 바뀌질 않는다"고 입을 모았다.
쥐에게 뜯긴 새 옷... "2살 아들에게 보내려고 했다"
에디가 사는 곳에서 나와 동네 안쪽으로 들어갔다. 30~50m마다 전봇대가 하나 놓인 어두운 길을 따라 걸어가자, 슬레이트 지붕을 하나 얹은 1층 건물이 보였다. 부르키나파소 무용수·악기연주가 5명이 사는 방 2개 있는 기숙사다. 이곳 역시 수십 년 전에 지어져 주거환경이 열악했다.
현관문을 열자, 땅에서 새어나온 물로 흥건한 부엌 바닥이 눈에 띄었다. 5구 가스레인지 위에는 까맣게 탄 밥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집에서 사는 라자크(Ouedraogo Abdoul Razak)는 "2012년 5월부터 여기서 살았는데, 그전부터 있던 밥솥"이라며 "돈이 없어 새 밥솥을 못 사고 탄 걸 계속 쓰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집안 공기도 싸늘했다. 보일러가 고장 났기 때문이다. 부르키나파소 이주노동자들은 박물관 쪽에 보일러를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박물관은 지름 10cm·높이 40cm 정도의 전기난로 2대를 건넸다. 난로 2대 만으로 한국의 겨울 추위를 참기 힘들었다는 이들은 친구한테 중고 난방기구를 선물 받아 방에 추가로 두었다.
각각 2평인 방 두 곳은 좁았다. 방을 가득 채운 2층 침대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짐 꾸러미들이 한 데 섞여 지냈다. 이들은 각자 공간을 분리하는 겸 추위를 막고자 침대 끝에 커튼처럼 담요를 걸어두고 지냈다.
천장에서는 수시로 쥐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자크는 쥐 때문에 황당한 일을 겪었다고 털어놓으면서 유아복 한 벌을 꺼내들었다. 개나리색인 옷에는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부르키나파소에 있는 2살 아들에게 보내주려고 산 5만 원짜리 옷이에요. 나름 비싼 돈을 주고 샀는데, 쥐들이 다 갉아 먹어서 이렇게 됐어요. 황당하죠."프랑스 파리·대만 등에서 단기 계약을 맺고 공연을 해온 라자크는 여태까지 살아본 곳 중에서 한국 기숙사가 최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타이완에서는 1명당 방 하나를 썼고, 파리는 2명당 방 하나를 썼지만 공간이 분리돼있었다"며 "난방도 안 나오는데다가 방 하나 당 4~5명 씩 자는 이런 곳에서는 처음 살아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파이나(Chikumbirike Phainah)는 "한국에 오기 전에는 박물관에서 '1명당 방 하나를 쓴다, TV와 컴퓨터도 있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막상 와보니 현실은 너무 달랐다, 지옥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기서 사는 삶 자체가 끔찍하고 고통스럽다"고 덧붙였다.
"홍문종 이사장님,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세요"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박물관 이사장인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박물관 운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는 10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그런 건 박물관장에게 얘기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홍 의원은 11일 "보도내용은 여러 가지로 사실과 다르다"면서 "자체조사와 법률자문을 거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면서 최종결론에 따라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국민 앞에 송구스러울 따름"이라고 덧붙였다.)
홍 사무총장의 발언을 접한 박물관 이주노동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사장이 직원 문제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게 이들의 견해다.
라자크는 "2012년에 이곳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홍 이사장과 우리들이 면담을 하게 됐고, 그때 영어를 잘하는 몇몇 친구들이 열악한 주거환경과 적은 식비 등의 문제를 그에게 털어놨다"며 "홍 이 사장이 우리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모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파이나도 "홍 이사장은 박물관 주인이다, 우리가 번 돈을 가져가는 사람인데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며 "게다가 그는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급여가 적힌 근로계약서에 이름도 있다. 주인으로서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파이나는 "만약 홍 이사장을 만나게 된다면 '제발 우리 삶을 바꿔주세요'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기숙사를 나서면서 이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넸다. 박물관 이주노동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떻게 잘 잘 수가 있느냐"고 답했다.
"당신이 나라면 잠이 오겠어요? 이런 데 누워 있으면 잠이 잘 안 와요. 생각이 많아지거든요. 어떻게 하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요. 언젠가는 마음 편히 잠 잘 수 있는 날이 오겠죠." - 파이나이들은 냉기 도는 방에서 얇은 차렵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