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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나이 되면 번듯하게 이룬게 있으야는디, 평생 머리깍고 청소하는 것만 할 줄 알어서 지금도 그러고 살어. 넘부끄러우니께 신문에는 내지 말어” 최 할머니는 그러면서도 젊은이들 하는 일이라고 사진찍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모른척 해줬다.
 “이 나이 되면 번듯하게 이룬게 있으야는디, 평생 머리깍고 청소하는 것만 할 줄 알어서 지금도 그러고 살어. 넘부끄러우니께 신문에는 내지 말어” 최 할머니는 그러면서도 젊은이들 하는 일이라고 사진찍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모른척 해줬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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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주택가 골목 안에 자리한 <향천이발관>은 경력 70년의 할머니 이발사가 운영한다. 간판은 없다. 대문 안쪽 높이 달았던 예의 이발소 표시(빨강과 파랑, 흰색의 나선 무늬봉)도 녹이 더께로 앉아 알아 볼 수 없다.

유일한 여성이발사인 최계화(84) 할머니에게 머리를 맡길 수 있을지는 초록색 대문의 개폐여부로만 판단할 수 있다. 대문이 조금이라도 열려있으면 무조건 머리를 깎을 수 있다고 보면 된다.

이발관 문을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낮에만, 날씨가 풀리면 이발관 앞 밭에서 작물을 보살피며 하루종일 손님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래서 단골들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보고 방문한다.

작은 마당을 지나 나무유리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서면 바깥과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최 할머니는 "다 낡아빠지고 춥고 지저분혀"라며 손사래를 치지만, 시간이 멈춰진 듯 예스런 물건들은 젊은이들도 정겹게 느낄만 하다.

아니, 시간이 멈춘 것이 아니라 향천이발관은 최 할머니와 함께 나이를 들어가는 중이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앉았을 의자는 여러겹 비닐과 장판 등으로 덧댄 흔적이 보이지만, 다시 또 닳고 구멍이 나있다. 세기의 미남 알랭들롱의 젊은 시절 모습과 이마를 맞댄 연인들의 모습을 담은 빛바랜 이발소사진들, 제작시기가 가늠조차 안되는 낡은 나무장, 사각의 흰색 타일 조각이 떨어져 나간 세발대….

이 정도면 인간문화재

열 네살 때 이발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최 할머니는 "왜정 말년에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을라믄 시집 가거나 기술 배워야 한다고혀서 시작혔어. 예산읍내 본정통(임성로)에 쪼로란히 이발소가 다섯개나 있었는디, 가서 보니께 전깃불 환하게 써 놓구 하얀 가운 입고 일하는 게 깔끔허구 을매나 좋아뵀든지…. 그때는 여자이발사가 열댓명 됐는디 나중에 다들 그만둬서 나 혼자 남었어"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임성로 삼거리에 있던 동일이발관에서 일을 배웠다고 한다.

"첨에는 3년내 청소만 했어. 그리구나서 머리 감기는 거, 면도칼 가는 거 차례차례 제대로 배웠지. 그 뒤로 미진이발관(옛 예산목욕탕 옆)에서 맡아서 할 때는 내 손님이 을매나 많은지, 대동병원에 가서 주사 맞고 계속 일할 정도였어. 젊어서는 위생교육 잘 한다고 상도 타고, 서른댓살 때 실기시험서 1등 나서 라디오에도 나왔어"

  “언젯적 부터 단골인지 모르겠다”는 86세 할아버지 손님은 “머리는 깎고 나서 금방 깔끔한 거 보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면서 멋있는게 잘 깎은 거여. 여기서 깎으면 그려. 참 열심히 깎거든”이라고 평했다. 80대 이발사와 손님은 헤어지며 서로 “건강하라”고 인사를 한다.
 “언젯적 부터 단골인지 모르겠다”는 86세 할아버지 손님은 “머리는 깎고 나서 금방 깔끔한 거 보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면서 멋있는게 잘 깎은 거여. 여기서 깎으면 그려. 참 열심히 깎거든”이라고 평했다. 80대 이발사와 손님은 헤어지며 서로 “건강하라”고 인사를 한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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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가 장 속에서 꺼낸 누런 종이들. 1960년대와 70년대 요금표 들이다. 1964년 조발비(이발비) 50원 시절부터 이후 사회경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1966년 90원이던 조발비는 1968년 270원으로 2년새에 180원(200%)나 올랐다가, 1970년에 다시 150원으로 120원(80%)인하됐으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발비는 1만원을 웃도는 시대가 됐다.
 할머니가 장 속에서 꺼낸 누런 종이들. 1960년대와 70년대 요금표 들이다. 1964년 조발비(이발비) 50원 시절부터 이후 사회경제상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1966년 90원이던 조발비는 1968년 270원으로 2년새에 180원(200%)나 올랐다가, 1970년에 다시 150원으로 120원(80%)인하됐으니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발비는 1만원을 웃도는 시대가 됐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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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殺菌(살균)이라는 한자글씨가 크게 써 있는 소독장 위에 건전지를 묶어 쓰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성냥곽 등이 놓여있다. 스마트라는 세글자가 없이는 설명이 안되는 시대에.
 殺菌(살균)이라는 한자글씨가 크게 써 있는 소독장 위에 건전지를 묶어 쓰는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성냥곽 등이 놓여있다. 스마트라는 세글자가 없이는 설명이 안되는 시대에.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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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천원 한 장 허투루 쓸줄 모를 정도로 절약습관이 몸에 배여 있는 할머니가 쓰는 물건들의 역사는 대체로 수십년 단위를 거스른다.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도구.
 지금도 천원 한 장 허투루 쓸줄 모를 정도로 절약습관이 몸에 배여 있는 할머니가 쓰는 물건들의 역사는 대체로 수십년 단위를 거스른다.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도구.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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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기억력을 가진 최 할머니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그대로 예산의 근현대사가 된다. 열여덟살에 결혼한 뒤 시부모님 병수발에 6남매를 낳아 키우면서도 일을 놓지 못했던 할머니의 이발가위에는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었다.

"냄편이 세상떠난지 15년 됐는디, 함석 다루는 기술만 좋았지 대식구를 건사할 벌이를 못혔어. 친정어머니한티 애들 맡기고 정신없이 일하다 하도 진저리나서 폐업 했었어. 그러다 쉰살에 다시 친정집으로 들어와서 낸 게 이거여."

 이발소를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 흰색 나선봉이 벌겋게 녹이 슬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플라스틱이 아니라 함석에 색을 칠했었나 보다.
 이발소를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 흰색 나선봉이 벌겋게 녹이 슬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플라스틱이 아니라 함석에 색을 칠했었나 보다.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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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남자들이 미용실에 가고, 이발관은 명맥을 잃어가고 있다. 명절 쇠려면 반드시 이발을 하던 풍습도 사라져간다. 여성이발사 최 할머니의 가위질과 면도솜씨를 체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아무도 모른다.

"늙어빠지고 추운디 여기까지 와주는 손님들 고마워서 이발비는 5000원만 받어. 가진 게 읍서서 좋은 일은 못해두 오는 사람 머리는 공들여 깎아주지. 3대 머리를 깎아줬는디, 그 3대가 다 늙었으니 세월이 얼마나 지난겨. 품 떠나 가끔 보는 자식보다 나는 손님들이 더 가차운 거 같어. 한달이믄 사람보는 날 열흘도 안되지먼 손님들 와서 헛걸음할까봐 나와 앉았어."

기술자는 숫돌에 직접 가위를 갈아 끼울 줄 알아야 한다며 지금까지 원칙을 고수하는 최 할머니는 전동기계를 쓰지 않는다.

경력 70년의 이 베테랑 이발사가 머리깎고 면도하기까지 시간은 1시간여. 세월만큼 정성도 깊어진 까닭이리라. 머리깎으며 도란도란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 할머니 이발사로부터 80평생 삶의 지혜를 들으며 옛 이발관의 정취를 느끼는 시간, 예산사람들이어서 쉽게 누릴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을 놓치지 말기를.

 향천이발관 출입문, 초록대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머리를 깎을 수 있다는 것.
 향천이발관 출입문, 초록대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머리를 깎을 수 있다는 것.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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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천이발관 약도.
 향천이발관 약도.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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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할머니 이발사#향천이발관#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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