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운은 뭐가 뭔지 몰랐다. 자신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순간 절망적으로 석실 뒤로 물러섰는데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모든 것이 고요에 싸였다. 잠시 후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 쿵, 하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관조운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최대한 눈을 부라리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 어떤 기척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부싯돌이 번쩍하며 불이 켜졌다. 앞에 웬 사내가 가느다란 칼을 쥔 채 서있다. 체격이 크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날렵해 보이고 턱이 각 져 왠지 모르게 다부진 느낌이다.
그가 손짓을 하며 입구 쪽으로 가리켰다.
관조운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석실을 나섰다. 그가 이끄는 대로 가다보니 계단이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계단으로 가지 않고 왼쪽 통로로 몇 발자국 가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관조운이 의아해하자, 그가 검을 들어 천장을 찌르자 덮개가 들썩였다. 아하, 이곳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구나. 관조운은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관가장의 관조운이라 하오."관조운이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굽히자, 사내는 급히 검지를 세워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고 했다. 사내는 아무 말도 없이 무릎을 구부리며 그 위에 손을 놓았다. 관조운이 경공으로 단 한 번에 천장을 뚫고 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손을 받쳐 올라가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관조운이 알아차리고 그의 무릎 위에 놓인 손에 발을 얹자 그가 위로 들어올려 주었다. 관조운이 덮개를 젖히고 나가자 사내도 나가려는 순간 지하실 입구의 문이 열렸다. 이어 회색 장포를 입은 송충이 눈썹과 양도를 찬 사내와 창을 든 청년이 보였다.
무영객은 관조운의 뒤를 따르는 걸 포기하고 급히 덮개를 덮었다. 그 순간을 그들이 보았다. 저기닷! 송충이 눈썹이 소릴 지르며 뛰어내리자 창을 든 자도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무영객은 화섭자를 바닥에 던져 불을 끔과 동시에 바닥을 굴러 공터로 갔다. 좁은 통로에서 이들을 맞이한다는 건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다. 다시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다.
무영객은 가늠을 해보았다. 공간은 벽 쪽에 붙은 계단을 빼고 다섯 평 남짓 천장은 일곱 척 정도 높이다. 벽을 차고 그 반동으로 그들을 뛰어 넘기에는 천장이 너무 낮다. 불을 끄는 짧은 순간에 보았지만 장포를 입은 중년과 창을 쥔 사내가 공터로 내려오고 양도를 허리에 찬 사내는 계단 위에 그대로 서 있다.
양도를 찬 사내는 분명 입구를 막아 퇴로를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이들은 눈앞의 상황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나눌 줄 아는 자들이다. 창(槍), 이 좁은 공간에서 창의 일격을 어떻게 피하느냐가 중요하다. 무영객을 몸을 최대한 낮추며 검을 쥔 왼손을 뒤로 하고는 일시에 튀어나가는 섬검퇴좌(閃劍退坐)로 어둠 속에서 자세를 잡았다.
스르르릉, 어둠 속에서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송충이 눈썹이 검을 뽑는 모양이다. 무영객이 알기론 양도는 계단 위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허리에서 도를 뽑아 양손에 쥐었다. 그런데 송충이 눈썹은 이제야 검을 뽑는다. 이 상황에서 대개는 챙, 하고 급히 뽑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자는 천천히 뽑는다. 그런데, 검을 뽑는 것이 이상하다. 그가 뽑는 검으로부터 기이한 파동이 파르르 전해온다. 방심할 수 없는 자다!
적막, 어둠 속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숨소리만 들렸다. 어둠 속에서 차츰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새액, 새액, 창을 든 젊은 녀석의 숨소리다. 호흡이 빠르다. 어둠 속에서 적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아아악, 사아아악. 계단에 있는 양도다.
숨소리가 한결 안정돼 있지만,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감각을 집중하느라 자신의 숨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자라면 상대할 만하다. 그러나 송충이 눈썹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자는 호흡을 멈춘 것인가. 검을 뽑을 때의 강력한 검기도 어느새 사라졌다. 먼저 움직이면 안 된다. 무영객은 최대한 자신의 호흡을 낮췄다.
얼마나 있었을까.
크악!
팽팽한 긴장을 무너뜨리는 단발마가 어둠 속에서 터져나왔다. 그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야생의 늑대가 한순간에 절명하는 소리 같았다. 동시에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창, 창, 창,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속 세 번 들렸다. 이윽고 윽, 하는 비명과 함께 쿵,하고 무언가가 계단 밑으로 떨어졌다. 이어 지하실 문이 확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재빨리 빠져나갔다.
예진충은 그자를 놓친 것이 분하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의 판단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등잔에 불을 붙이자 창을 쥔 요원은 자기 앞에 쓰러져 있고, 척숭은 왼쪽 허벅지 안쪽과 오른쪽 가슴에 자상과 절창을 입고는 계단에서 떨어졌다. 세 번의 부딪침이 있었던 것도 그나마 척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척숭이 목숨을 건진 건 그 자가 탈출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진충은 그 자가 관가 놈이 빠져나간 통풍구로 탈출할 것을 예상했다. 요원이 창을 내지를 때 그는 동쪽 통로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 자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위치를 확보하자마자 그는 초식을 펼쳤다. 그는 두세 수(手) 앞을 보고 연속동작의 첫 동작으로 낭검세(螂)劍勢)로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그러나 첫 일격에 무언가 걸려들자 그 자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그의 검을 받은 자는 요원이었다. 요원도 훌륭했다. 은화사 요원다웠다. 요원은 그의 검에 당하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소리를 내면 상대에게 공격의 성공을 알려주는 꼴이다. 아무런 소리가 없으면 상대는 자신의 공격 결과를 알 수 없어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진다. 벤 것 같은데 비명이 없다. 이는 성공한 자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그 순간 반격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는 요원의 창에 마치 자신이 일격을 당한 것처럼 비명을 내지르고는 창을 잡아채 동쪽 통로 쪽으로 휙 당긴 것 같았다. 요원은 공격의 관성에 그 자의 힘이 보태져 앞으로 나간 것이고 그 때문에 예진충의 검에 고스란히 받았다. 그 자는 창을 당김과 동시에 계단 위로 뛰어 올라 척숭의 하체를 공격하였다. 척숭의 중심이 무너지자 다시 상체를 공격하고는 척숭이 계단 밑으로 떨어지자 문을 열고 나간 것이다. 한마디로 허(虛)가 찔린 것이다. 그 자는 고도의 살수 훈련을 받은 자다. 그것도 그 분야 최고의 고수로부터.
척숭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허벅지는 찔렸고, 가슴은 베였다. 찔린 곳을 자세히 살폈다.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이 깨끗하다. 허벅지는 근육이 크기 때문에 재빨리 빼지 않으면 칼날이 근육 사이에 끼여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이때 날을 빼기 위해 돌리면 더욱 조여진다. 이 자의 칼놀림에는 그런 흔적이 전혀 없다. 고기를 기둥에 걸어놓고 찌르기 연습을 한다 해도 이 정도로 깔끔하게 들어오고 나가려면 적지 않은 수련을 해야 한다.
게다가 가슴의 절창을 보면 검을 흘리듯 벤 것이 아니라 요혈에서 딱 멈췄다. 검의 궤적이 몸에 밴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경지다. 세 번의 부딪침은 척숭의 반격을 그 자가 막아낸 것이리라. 예진충은 척숭의 도를 들어 불빛에 비쳐보았다. 그 자의 무기는 협봉도였다. 협봉도는 명칭만 도(刀)이지 날이 좁고 양날이라서 검(劍)에 가깝다. 단지 길이가 짧아 도라고 칭할 뿐이다. 검과 칼이 부딪치면 대개 검의 날이 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척숭의 도에는 이가 빠진 흔적이 없다. 이는 날과 날이 정면으로 부딪친 게 아니라 검의 배(背)로 튕겨냈다는 것이다. 예진충은 자신이 벤 요원의 상처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는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부딪치지 말고 흘려라.' 갑자기 떠오른 검결(劍訣). 이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사람.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통풍구 덮개를 열고 나오자 대숲이다. 관조운은 주위를 둘러보고 이곳이 후원의 담장에서 바로 벗어난 밖임을 알았다. 관조운은 뛰었다. 조그만 동산을 넘고 우회하자 이내 번잡한 거리가 나왔다. 알고 보니 이곳은 금릉 응천부 관부와 청사가 밀집해 있고 시장과 이웃해 있는 저자거리였던 것이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저자거리를 빠져나간 다음 관가장으로 향하다 발길을 멈췄다. 이대로 관가장에 간다는 건 겨우 빠져나온 은화사 사람들에게 다시 날 잡아가슈,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은 형수 진진과 조카 섭월에게까지 해를 끼칠 수 있다. 은화사 작자들이 노리는 건 자신이지 관가장 가문은 아니다. 자신이 어디론가 사라진다면 관가장은 무사할 것이다.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옳지, 하고 혀를 찼다. 비영문으로 가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다. 은화사 작자들이 자신이 잡혀 온 비영문에 그가 다시 가리라고는 생각진 않을 것이다. 거기서 장문인과 향후 일을 논의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의견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비영문으로 갔다. 어느 덧 저녁 해가 금릉의 저자거리를 붉게 비추는 가운데 목련이 벙긋한 입을 오므리며 하루의 수다를 접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