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자격으로 50차례 법정에 설 때마다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17일 '내란음모사건' 1심 선고 공판 초반에도 비슷했다. 하지만 재판장인 김정운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 부장판사가 판결 요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갔다.
"이석기 피고인이 (지난해 5월 12일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교육수사회 모임에서)북의 군사력 증강과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등을 높이 사고 '남북의 자주역량을 결집, 전국적 범위에서 최종 결전을 하여 통일 혁명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자'고 주장한 것은 곧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 공산집단의 군사력에 적극 협조, 전시 또는 이에 임박한 시기에 후방교란 활동을 꾀한 것으로 보는 게 상당하다."자신이 북에 적극 협조, 후방교란 활동을 꾀하는 등 북과 연계됐다는 대목에서 이 의원은 한숨을 내쉰 뒤 입술을 깨물었다.
이날 재판 시작 전까지만 해도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검은색 양복에 흰 남방을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은 모습으로 법정에 입장한 이 의원은 평소처럼 방청석의 지지자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고 피고인석에 앉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이정희 진보당 대표와 심재환 변호사, 김칠준 변호사 등 변호인단 분위기 역시 화기애애했다. 검은색 코트에 분홍빛 스카프를 맨 이 대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사람들과 인사했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이 의원 등 피고인 7명은 조금씩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재판이 예정된 2시 정각, 이 의원은 잠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쳐다보는 등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홍순석 진보당 경기도당 부위원장은 쓰윽 입가를 만지기도 했다. 2시 5분쯤 재판부가 입장하자 이 의원은 다시 고개를 들어 잠깐 천장을 바라봤다.
미소지으며 입장했지만... 점점 웃음을 잃다현역 국회의원의 내란음모사건은 1966년 김두한 당시 한국독립당 의원 이후 두 번째, 내란음모 자체만으로는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 사건 이후 34년만이다. 게다가 진보-보수 양 진영이 첨예하게 의견이 엇갈리는 사안인 만큼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재판부에는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일까? 김 부장판사는 판결에 앞서 "재판부는 헌법 제103조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을 진행했고, 판결문 작성에 있어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따라 작성하면서 상식만을 보탰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늘 선고 내용이 여러분의 신조, 사상, 종교 등과 맞지 않아도 차분한 마음으로 끝까지 경청해주길 부탁한다"며 473쪽짜리 판결문의 요지 설명을 시작했다.
초반부터 변호인단 쪽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재판부는 검찰이 공소장에 증거능력이 없는 녹취록 내용 등을 기재해 재판부에게 선입견을 심어줬고, 북한은 반국가단체가 아니며 국보법은 위헌이라는 변호인단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피고인들이 압수당한 물품이 이적표현물에 해당하고, 2012년 몇 차례 모임에서 '혁명동지가'를 부른 일은 모두 국보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말이 김 부장판사의 입에서 나왔다. 이 의원 등의 얼굴에선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오후 3시부터 이번 사건의 핵심 공소사실인 '내란음모 및 선동'이 거론됐다. 재판부는 피고인 7명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기초 이념으로 삼아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지하혁명조직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을 구성했고, 폭동을 모의한 것으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밝혔다. 국헌을 문란하고 체제를 전복할 목적이 충분히 있었고, 피고들이 모의한 내용이 어느 정도 구체성을 띄었으며, 실행을 위해 준비했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했다.
가족들 오열... "정치판사 물러가라" 소리치기도"인정된다", "상당하다", "지장없다"는 말로 채워진 판결 요지가 끝을 향해가자 이석기 의원은 순간 표정을 찌푸렸다. 이상호 전 경기진보연대 고문은 그저 눈을 감고 있었고, 다른 피고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쳐다봤다.
방청석에 앉은 가족들은 손톱을 깨물거나 가지고 있던 노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진보당 지지자로 보이는 한 남성은 양쪽 귀를 손으로 막아버렸다.
판결 요지를 모두 설명한 김정운 판사는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가"고 말했다. 오후 4시 15분, 법정에는 주문이 울려 퍼졌다.
"이상호 피고인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홍순석 피고인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한동근 피고인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이석기 피고인 징역 12년, 자격정지 10년,조양원·김홍열·김근래 피고인을 각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에 처한다."수원지법 보안관리대 직원 10명가량이 얼른 방청석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이 재판부 자리 쪽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 더 주문을 읽은 재판부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즈음, 피고인들의 가족으로 보이는 여성 몇 명은 큰 소리로 오열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정치판사 물러가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국정원이 한 말이랑 뭐가 달라?"고 소리쳤다.
재판부가 법정을 빠져나가자 지지자들은 이석기 의원을 향해 "의원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또 피고인 모두에게 "힘내십시오"라는 응원을 보냈다. 2시간 20분의 재판 내내 굳어있던 이 의원이 다시 웃음 지여보였다. 변호인단은 이날 재판이 끝나자마자 "항소심에서 여러 쟁점들을 하나하나 밝혀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