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를 12년이나 했잖아. 근데 아직도 토익이 영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토익은 기술이야." 가수 성시경과 영화평론가 허지웅이 출연한 학원 광고 중 일부다. 학원 홈페이지에는 '토익대세, 1위가 되기까지'라고 밝히며 "강남에서 마감반이 가장 많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하지만, 사람이 많은 건 분명해 보인다. 10분만 서 있어 보면 안다. 강남대로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영어학원을 들락날락하는 청년이 수백 명이다.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이준호씨(27)씨도 그중 하나다. 이씨는 충남 공주 출신으로 지난달 서울에 상경했다. 현재 '토익은 기술'이라고 강조한 강남의 한 학원에서 49만 원짜리 강의를 듣고 있다. 이 강좌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진행되는 집중반이다. 이씨는 "내 꿈은 반도체 관련 엔지니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서울 사당동 고시원에 머물고 있다.
"노하우와 스킬로 답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주겠다"
이준호씨는 "한 마디로 닥치고 문제만 푼다"고 말했다. 그는 "토익을 왜 이렇게까지 공부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우리나라 공대생들이 토익점수 딸 때 다른 나라 엔지니어들, 특히 일본 프로그래머들은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현재 이씨가 수강하고 있는 과정은 크게 두 개 영역으로 나뉜다. 문제 풀기와 분석하기.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8시간을 강의만 듣는다. 영어지문을 해석하는 시간은 없다. 중요한 건 핵심단어다. A 단락의 핵심 단어와 B 단락의 단어를 조합해 주제를 찾아내야 한다. '토익이 기술'인 이유다. 수업에 들어온 강사도 "단어와 문법에 대해 알지 못해도 노하우와 스킬로 답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학원에서 만난 수험생 대부분이 "영어를 해석하지도 않고 문제를 푼다는 사실이 씁쓸하다"고 했다. 이준호씨 역시 "겨울방학 두 달만 하면 되니까 참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의 '토익정복기'는 2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는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려니 잘 안 된다"고 답했다.
영어강사 김선(28)씨는 "아이러니하게도 '토익은 기술이다'란 광고가 100% 사실이다, 맞는 말"이라고 인정했다. 그는 "토익으로 진짜 영어실력을 평가하기엔 부족하다"며 "말하기와 쓰기가 배제된 토익... 진짜 영어가 아닌 이유"라고 꼬집었다. 그러나 "진짜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며 "정형화된 틀과 문제은행에서 나오는 반복된 문제가 토익의 공신력을 잃게 한다"고 말했다.
"토익 말고 토익 스피킹이나 다른 형태의 시험으로 대체하면 되지 않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김씨는 "금세 패턴이 드러나 시간이 부족한 학생들은 그것만 하게 공부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대체되고 있는 토익스피킹 시험을 예로 들며 "말만 스피킹 시험이지 수험장에서 보면 지원자 모두 같은 문장으로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선씨는 "토익은 돈을 쓰는 만큼 점수를 받지만, 그게 전부"라고 비꼬았다. 토익점수만 받았지 영어실력은 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필요한 곳에서만 영어시험 반영해라"서울대학교에서 HCI(Human Computer Interaction/삶의 질 향상을 위한 컴퓨터 시스템 개발)를 공부 중인 박사과정 박성환(32)씨는 '토익 현상'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다.
"채용이나 진급 시 토익 점수가 영어실력의 기준이 되고 있다. 취업준비생이 토익에 몰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토익 시험이 처음 나온 1980년대부터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이래선 안 된다. 시대가 변했다. 답만 찍는 영어, 시간 낭비다. 말하는 영어를 해야 한다."하지만 박씨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문제는 학생들 입장에서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언제나 '을'의 입장이다. 위에서 만들어 놓은 제도가 너무 공고하다. 하라는 대로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 사회구조 특성상, 기득권 그룹이 바꾸지 않는 이상 아래쪽에서 바꿀 수 없다. 제도권에 편입되기 위해선 아닌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
박성환씨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회사에서 토익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는 "기업체에 들어갈 때 필요한 게 아닌데도 토익을 본다. 특히 전자공학과나 기계과 출신인데 입사할 때 토익 점수를 보는 건 불필요한 노력 낭비다. 사회적인 손실이다. 정말로 필요한 곳에만 쓰게 하라"고 일갈했다.
강인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교수도 그의 책 <망가뜨린 것, 모른척한 것, 바꿔야할 것>에서 강한 목소리로 성토했다. 그는 "외국어가 필요 없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능력과 기술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돕고 배려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영어라는 하나의 기술을 전 국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요구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스트레스와 낭비, 그리고 국가경쟁력 저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학생들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토익시험 자체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취업준비생 김성태(27)씨는 "나는 분명 영어라는 언어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토익 시간이면 벙어리가 된다. 머리 박고 문제만 푼다. 그 때마다, '영어를 배우는데 영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김씨도 어쩔 수 없다. 매일 아침이면 강남역 10번 출구를 빠져나와 학원 엘리베이터 앞 긴 줄에 몸을 맡긴다. 그는 쓴 웃음을 지어보이며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지긋지긋한 토익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다"고 고백했다.
덧붙이는 글 | 김종훈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