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은 1월 13일. 중국 감옥에 수감 중인 한국인 마약 사범 6명에 대해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앞서 2001년 한국인 신아무개씨가 마약 제조 혐의로 사형당해 인권 문제가 일기도 했지만 6명에 대한 사형 판결은 충격적이었다.
중국에서 마약은 역사의 가장 치욕적인 부분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물건이다. 19세기 초반 제국주의적 야욕을 키우던 영국이 은의 대체제로 인도 등에서 생산한 마약을 중국에 팔기 시작하면서 광둥지역을 시작으로 중국은 마약소굴이 됐다.
청 정부는 임칙서 등을 보내 마약을 처리하다가 결국 아편전쟁(1842~1842년)을 치러야 했다. 청은 이 패배로 홍콩 등을 할양하는 등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문에 중국에서 아편 등 마약은 가장 확실한 금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위험한 도박'에 빠진 것이다. 다행히 한 명을 제외한 5명은 무기로 감형됐지만 한국으로서는 곤혼스러운 부분이었다.
순한 양의 해를 알리는 춘지에가 지나자 사람들의 관심은 정치로 흘렀다. 그해 3월은 중국 정치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시기였다.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끝으로 장쩌민, 리펑, 주룽지 등 3세대 정치인이 공식석상에서 물러나고,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주축이 되어 그 자리를 물려받기 때문이다.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장쩌민이 고스란히 모든 것을 주는냐 아니면 자신의 호위세력인 상하이방이나 태자당 등과 함께 태상왕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는 가 였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2002년 11월에 확정된 16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의 면모를 보면 된다.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인 최고 의결기구인 상위(常委)는 5년 마다 구성된다. 장쩌민 시대와 달리 이번에는 상위가 2명 늘어난 9명으로 구성됐다. 총서기는 새 지도자 후진타오였고, 우방궈, 원자바오, 지아칭린, 쩡칭홍, 황쥐, 우관정, 리창춘, 뤄간 등이었다. 이 상위 위원들에는 새로운 주석 후진타오보다는 장쩌민의 후광이 커 보였다.
다시 5년 후인 2007년에 구성된 17기 상위에는 쩡칭홍, 황쥐(2007년 6월 사망), 우관정, 뤄간 대신에 차세대 지도자인 시진핑과 리커창을 비롯해 허궈창, 저우용캉 등이 들어온다. 이 역시 장쩌민의 세가 줄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후진타오의 세가 우세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후진타오 주석은 10년 내내 장쩌민이라는 태상왕을 모시고 산 셈이다.
훗날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장쩌민이 후진타오 시대 전반에 막후 영향력을 행사해 후진타오는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장쩌민의 영향력은 스스로도 지분을 많이 행사한 시진핑 시대가 돼서야 천천히 힘을 잃기 시작한다. 훗날 정치적 낙마를 겪는 보시라이(薄喜來)는 이때 상무위원은 물론이고 중앙위원도 오르지 못해 이목을 끌었다.
서양에서 유래된 4월1일 만우절은 서양에서 유래되어 중국에서는 관심있는 날은 아니다. 하지만 이해 4월 1일 중국인들은 거짓말 같은 소식을 들었다. 바로 홍콩 영화 배우 장궈롱(張國英)의 사망소식이었다.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자우룬파(주윤발), 리롄지에(이연걸) 등 유명배우들이 홍콩을 떠날 때도 홍콩에 남아있던 그였다. 1980년대 중반 <영웅본색> 등 홍콩 느와르를 선도했고, <패왕별희>, <해피 투게더> 등 예술영화를 같이 했다. 하지만 벗들이 떠나고 나서 용기있게 커밍아웃까지 했던 그가 기댈 만한 곳은 없었다. 그의 유서는 너무 인간적이며 간단했다.
"20대의 한 청년을 알았다. 그와 탕(편집자주 : 장궈룽의 연인) 사이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난 자살한다"스타의 자살 소식과 함께 괴질(급성호흡기증후군 SARS)이 중국 전역에 퍼지면서 공포에 빠졌다. 여름이 지날 때까지 중국을 혼돈에 빠뜨린 괴질은 그 숙주 가운데 광둥 지역에서 식용으로 매매되는 사향고양이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다리 있는 것은 책상, 날개 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는 광둥인들을 놀라게 했다.
반면에 한국인들이 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소식에 김치와 홍삼 등 한국 식약품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시작된 한류와 더불어 한국 음식이 중국의 외식문화에 한 축으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 사건을 지나면서 한국 음식은 웰빙음식이라는 인식도 강해졌다.
이런 혼란이 어떤 기업들에게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LG전자는 직원들을 철수시키지 않고, 노사가 합심해 이 시기를 넘겨 중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스 환자가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해할 만큼 엄중한 상황에서 외국기업이 직원들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공장가동을 하는 모습은 두고두고 칭찬거리가 됐다.
사스가 끝나지 않은 7월초 노무현 대통령도 중국을 방문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노 대통령은 올림픽의 경험을 공유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해 봄부터 한중 양국에 관심을 끈 영화는 장예모(張藝謨)의 '영웅'이었다. 그는 문혁시기를 지나 대학을 다닌 후 막 데뷔한 5세대 감독의 대표주자였다. 초반기 장이모는 <붉은 수수밭>, <홍등> 등 예술영화나 <나의 아버지 어머니>나 <행복시광> 등 소박한 생활을 담은 생활영화를 많이 해왔다.
그런데 2002년 거대한 스케일의 무협서사인 <영웅>을 계기로 <십면매복> 등 거푸 무협서사를 하면서 본격 중화주의를 영화에 심기 시작했다. 그는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 감독을 맡았다.
장예모의 <영웅>은 중국인들의 의식에 깊숙이 자리한 협(俠)의 정신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무협지로 생각하는 이 협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다. 복수에는 의(義)가 포함되지 않는다. 복수는 그저 주는 대로 갚는 것이다. 상대가 나의 가족을 몰살시켰다면, 자기도 무술을 익혀 상대 가족을 몰살해야 한다. 반면에 협은 이런 복수의 정신에 의(義)가 포함되어 있다. 남들을 위해서 하기 보다는 사적인 복수가 아닌 좀더 큰 복수를 일컫는다고 보면 된다.
중국전문가 강효백씨는 <협객의 나라>라는 저술을 통해 중국 역사를 관류하고 있는 협의 정신을 분석한다. 그는 "은혜를 입고 은혜에 보답하는 것,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 이것이 협객의 이데올로기이자 중국 사회를 관통하는 최고의 행동원리다"고 말한다.
진시황을 죽이려다 실패한 자객의 비조(鼻祖) 형가(荊軻)를 비롯해 사무친 원한과 배신, 복수가 횡행하던 춘추전국시대에서 격동의 근대까지. 호방한 기상과 대붕 같은 지혜로 한 시대를 헤쳐 나갔던 수많은 영웅협객들의 피가 중국인들에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장예모는 그런 협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가 진시황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내가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진시황을 어떻게 그리는가였다. 이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문화대혁명의 실질적인 주도인물인 마오쩌둥을 어떻게 다룰 건가와 비슷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사생활이 복잡하고, 인민을 굶주리게 하는 한편, 장예모 자신도 직접 겪었던 지식인들의 환란인 문혁을 추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예모는 진시황을 용서함으로써 마오쩌둥을 용서하는 한편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장예모는 당시 기자가 된 도올 김용옥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내가 추구한 테마는 오직 협(俠)이라는 전통관념의 긍정적 맥락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이어진 질문에 "그것은 대의를 위하여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릴 줄 아는 사신취의(捨身取義)의 정신이다.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金庸)선생도 협지대자(俠之大者)는 위국위민(爲國爲民)이라고 말했다. 협이란 삶의 큰 목표가 있는 사람이다. 그 목표란 선천하지우이우(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하고, 후천하지락이락(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기쁨은 나중에 기뻐한다)하는 동방인의 보편관념이다(범중엄의 등악양루기 중 문구). 이러한 보편관념이 <영웅>에서는 천하(天下)라는 두 글자로 표현된 것이다"고 말했다.
장예모는 그 스스로 진시황의 천하통일, 즉 제국주의의 정당화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하지만 영화를 통해 진시황에 대한 합리화는 물론이고, 자신의 세대에게 진시황이었던 마오쩌둥을 이해한다고 한 셈이다. 하지만 이미 장예모가 세우려는 협은 '중화주의'에 상당히 몰입된 협이다. 그 협에는 사실상 의(義)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무섭기도 했다. 실제로 장이모의 이후 걸음은 예상한 대로였다.
10월 15일에는 중국 최초의 유인우주선 선저우 5호의 발사가 성공했다. 자국의 힘으로 인공위성의 대부분을 완성한 중국은 소련, 미국에 이어 3번째 우주강국으로 발돋움했다. 이후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받은 중국 우주산업은 2013년 12월 달 탐사선 옥토끼호를 성공적으로 달에 안착시켰다.
앞선 두 나라가 도달한 대부분의 수준에 도달한 중국은 앞으로 미국이나 러시아의 우주기술을 넘어서는 것밖에 남지 않을 만큼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됐다. 이 우주선들을 쏘아올린 로켓의 이름은 장정(長征)이다. 1934년 10월은 중국 홍군이 장쩨스의 토벌작전을 피해 머나먼 장정을 출발한 때였다. 70년만에 중국 공산당은 내륙의 적을 피해서가 아니라 우주로의 도전을 위해 이 역사적 명칭을 부여한 것에 뿌듯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 10월 24일 송가황조의 마지막 여인 쑹메이링(宋美領 1897~2003) 여사가 106살의 일기로 미국 뉴욕 맨하탄 자택에서 사망했다. 국민정부 재정부장을 지낸 꿍상시의 부인인 쑹아이링(宋靄領 1889~1973)과 중국 혁명 대부 쑨원의 부인에서 공산당의 어머니가 된 쑹칭링(宋慶領 1893~1981)에 이은 막내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부인으로 천수를 누렸다.
중국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올대 중국과 대만을 가리지 않고, 주역이 되었던 송씨3자매의 시대는 이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공산당을 지지하며 부주석이 된 언니 쑹칭링과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갈등을 벌이기도 했지만 1975년 장쩨스가 사망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근현대 3세기(19, 20, 21)를 거쳐서 산 드문 인물로 기억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