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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어느 봄날, 기술이라도 배워두면 밥은 굶지 않을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일자리를 알아봐 준 동네 아저씨의 소개로 공장에 취직을 했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선 현장에서는 쿵쾅거리며 위 아래로 움직이는 프레스 기계에 한 명씩 앉거나 서서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노동의 새벽
노동의 새벽 ⓒ 느린걸음
한달에 격주로 일요일 2회 휴무, 토요일 8시간 근무, 평일에 3시간 잔업은 기본, 그리고 새벽 1시를 넘어서는 철야와 아침 6시부터 일을 하는 조출이 시시때때로 결정되면 '특공대'라고 불렀던 특별근무자를 반장이 차출했었다. 철야와 조출을 할 때만 빵과 우유가 전투식량처럼 지급되었고, 일을 마치고 나면 박카스 한 병이 손에 쥐어졌다.

1987년 6월 항쟁을 도화선으로 노동자대투쟁 파업이 전국을 휩쓸었다. 대공장 중심의 파업은 도미노처럼 중소기업으로 까지 이어졌고 우리도 기계를 멈췄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우리의 파업은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너무도 싱겁게 타결되었다. 그 당시 요구사항을 보면.

- 잔업때 마다 빵과 우유를 지급할 것.
- 일요일마다 쉬고 평일 하루는 잔업을 하지 말것.
- 2시간 일하고 10분씩 쉬는 시간을 줄것.
- 기숙사와 공장식당의 환경을 개선해 줄것.

그날 이후로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가운데 회사에서는 구로공단 출신의 노무관리자를 영입하여 감시와 회유가 시작되었다.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갖기 위해 노동야학을 다니게 되었고, 그곳에서 학습이라는 것을 하였지만 대학생들이 준비해온 그나마 가장 쉽다는 책들도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 지치고 힘이 빠져갈 때 쯤이었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시집 한권을 받았는데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심장이 터져버릴것 같았다. '노동의 새벽'은 그 후로 나에게 성경책이나 다름없었다. 박노해라는 얼굴없는 전사(戰士)의 시(時)를 읽는것 만으로도 노동해방의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 어린이날 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샬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 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생략)
- 손 무덤 중에서 -

그 당시 프레스공장에서는 손가락 한두마디가 없는 노동자들을 보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하는 햇수가 늘어날수록 손가락은 줄어들었다. '손 무덤'의 정형처럼 결혼한 지 몇 달만에 손목이 통째로 절단된 채 바닥을 뒹굴며 울부짓던 00형은 그 후로 볼 수가 없었다.

프레스작업공으로 승격(?)되어 차가운 쇳덩이 안으로 손을 넣었다 뺏다하는 수없이 반복되는 일을 한지 몇 달 만에 왼손 엄지 한마디가 짓눌려서 살점이 떨어져나간 일은 별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날 야간잔업으로 철판을 절단하는 샤링기계에서 일을 할 때였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튕겨진 철판이 왼발 뒷꿈치에 박혔고 붉은 피가 쏟아졌다. 하얀가루의 지혈제 한 봉지를 다 털어붓고 때 묻은 수건 몇 장을 돌돌 감아 비닐봉지를 버선처럼 씌워서 끈으로 묶었다. 공장장이 택시태워 보내라며 쌍욕을 뒤통수에 날렸다. 한발로 뛰는 깽깽이 걸음으로 택시를 타고 회사가 지정한 산재병원의 수술실에 옆드려  파열된 아킬레스 신경을 접합하는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었다.

갈수록 수출이 어려워지고
나라 빚이 세계에서 세 번째라는데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을 하자는데
물가를 꼭 붙들어야 한다는데
잔업에 지쳐 온 나에게
테레비에선 예쁜여자가
VTR,오디오,에어컨을 광고하며
최소한 칼라TV에 냉장고 세탁기는
필수품이라고, 요염한 미소를 던지며
차원 있게 먹고 입고 쓰라고 한다
(생략)
- 모를 이야기들 중에서 -

혁명가 박노해는 출감후에 신기했던것이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는 생수병이었다고 할 만큼 자본의 탐욕은 땅 속의 지하수까지 뽑아서 팔아먹는 세상이 되었다. 출간된 지 30년, 노동의 새벽은 절판되지 않았고 개정판으로 나오고 있다. 그것이 웃어야 하는 희극인지 울어야 하는 비극인지 모를일이다.  노동해방의 깃발이 펄럭이던 저주받은 그 시절은 끝난걸까.  잊은걸까. 오늘도 자본을 위한 공장식사회는 더 견고해져서 스마트하게 통제당한채 새벽도 잊은채 24시간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노동의 새벽ㅣ 박노해 지음 ㅣ 느린걸음 ㅣ 7,800원



노동의 새벽

박노해 지음, 느린걸음(2004)


#노동의 새벽#박노해#공장#노동해방#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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