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2000년 2월 22일 문 연 <오마이뉴스 >가 창간 14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누구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던 '시민참여 저널리즘'이라는 도전이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기자라는 든든한 토양 덕분입니다. 창간 14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용산참사와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 이땅의 낮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전해온 송경동 시인을 만났습니다. [편집자말] |
[창간14주년- 인터뷰1-①] "내 특기는 빈집 점거... 이효리씨 정말 고마워요"
노동운동가가 주업이고 부업으로 시를 쓰는 '빨갱이 시인'.
한진중공업 희망버스를 운전하던 시절, 일부 악플러들이 송경동 시인에게 붙인 무시무시한 별명이다. 그래서다. 지난 19일 서울 구로 디지털단지역 근처의 기륭전자 농성장에서 송 시인을 만나 정체성을 물었다.
- 이런저런 문서의 직업란에 뭐라고 쓰죠? "시인이라고 씁니다."
- 그럼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은 어떻게 쓰나요?"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애가 맨날 그래요. 시 쓸 때 욕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과격하게 쓰지 말고 예쁘게 좀 써보라고. 하하하."
각박한 시대, 인간적 가치 찾으려는 몸부림과 절규가 '시' 그도 잘 안단다. 가슴 아픈 현장일수록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고, '이게 바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보석 같은 분들이 많다는 것을. 그런데 먼저 분노가 치민단다. 시적인 것을 떠나서 문화예술이 살아남기 힘든 황무지 같은 시대, 모든 사람이 돈의 이윤만을 쫓아서 살아야만 하는 각박한 시대에 인간적인 가치를 찾으려는 몸부림과 절규가 욕이고, 시란다.
"내 시의 엔진은 분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회 구조나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내 시의 에너지입니다."이 대목에서 김남주 시인이 생각났다. 시는 변혁의 무기라고 일갈했던 독재의 시대 '전사'이자 혁명시인.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김남주 시인의 서슬 퍼런 시어는 음표가 되어 1980년대 최루탄의 거리에서 불려졌다. 송 시인은 자신의 시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네루다와 함께 김남주 시인을 꼽았다. 실제로 김남주 시인이 살아계실 때 1~2년 정도 뒤를 쫓으면서 술을 많이 얻어먹었단다.
"(김남주 시인은) 사회적 진실과 정의를 쫓고 현실에 뛰어들면서 온갖 핍박을 당했습니다. 일찍 돌아가셔서 안타깝지만, 삶과 시가 일치했던 분이죠. 제가 길거리 시낭송을 많이 했는데요, 요즘도 종이자락을 들고 무대에 오르면서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선생님, 저에게 기운을 주십시오'라고 말이죠." 송 시인에게 김남주 시인의 시 중에서 추천할 만한 시를 꼽아보라고 했다. 3편을 추천했다. '바람이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조국은 하나다','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중 1980년대 거리에서 자주 불렸던 첫 번째 시를 소개한다.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오월은 왔다 비수를 품은 밤으로 야수의 무자비한 발톱과 함께 바퀴와 개머리판에 메이드 인 유 에스 에이를 새긴 전차와 함께 기관총과 함께 왔다 오월은 왔다 헐떡거리면서 피에 주린 미친 개의 이빨과 함께 두부처럼 처녀의 유방을 자르며 대검의 병사와 함께 오월은 왔다 벌집처럼 도시의 가슴을 뚫고 살해된 누이의 웃음을 찾아 우는 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뚫고 총알처럼 왔다 자유의 거리에 팔이며 다리가 피묻은 살점으로 뒹구는 능지처참의 학살로 오월은 오월은 왔다 그렇게! 바람에 울고 웃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오월은 풀잎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일어나거라 쓰러지지 않았다 오월의 무기 무등산의 봉기는 총칼의 숲에 뛰어든 맨주먹 벌거숭이의 육탄이었다 불에 달군 대장간의 시뻘건 망치였고 낫이었고 한 입의 아우성과 함께 치켜든 만인의 주먹이었다 피와 눈물 분노와 치떨림 이 모든 인간의 감정이 사랑으로 응어리져 증오로 터진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이었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바람'은 학살의 야만과 야수의 발톱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노래하지 말아아 오월을 바람에 일어나는 풀잎으로 '풀잎'은 피의 전투와 죽음의 저항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학살과 저항 사이에는 바리케이드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는 서정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자격도 없다 적어도 적어도 오월의 광주에는! "제 시가 사회적 분쟁을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데 무기로 쓰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김남주 선생님처럼 시를 무기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벼리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시인이 되는 것은 급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선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이 더 급합니다. 김 선생님처럼 과감하고 결단성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때로는 내가 기회주의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송 시인은 김남주 선생의 시뿐만 아니라 치열했던 삶도 통째로 닮고 싶은 것이다.
- 무기를 제대로 벼리지 못했다고 했는데, <사소한 물음에 답함> 시집을 낸 뒤 문학상을 싹쓸이하지 않았나요?(웃음) "거창 평화인권문학상, 신동엽창작상, 천상병 시상, 구본주 예술상을 타긴 했지만, 제가 시를 잘 써서 탄 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저런 고초를 겪은 것에 대한 격려 차원이 아닐까요."
- 지난 7~8년 동안 현장을 전전하면서 딱지를 많이 떼지 않았나요?"병원만 3번 갔다 왔고요, 5번 연행됐죠. 희망버스하면서 6개월간 수배 당했고, 3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정신없이 지내긴 했죠."
- 기륭전자 농성장 포클레인 지붕 위에서 농성하다가 떨어져서 다친 발은 지금은 나았나요? "뒤꿈치 뼈가 산산조각 났는데요, 지금은 많이 나아갑니다. 지팡이는 안 집고 다닙니다.(웃음)"
이쯤 질의응답이 오가자 그가 김남주 시인의 전투적인 시와 삶을 치열하게 뒤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마이뉴스>에 쓴 글, 글을 위해 쓴 게 아니다
"사실 저는 농부가 지어준 쌀을 먹고, 어부가 잡아온 고기를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삶이라는 게 누군가가 생산한 것을 나눠먹는 것인데, 제 시가 그것만큼의 힘은 없겠지만, 정신적 양식으로 소용된다면 행복하겠어요." - 그렇다면 송경동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죠?"제 삶이고, 제 자신과의 대화이고, 친구라고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삶의 분신 같기도 합니다. 농부가 밭을 갈려면 트랙터가 필요하고 어부에게는 배가 필요하겠죠. 광부는 곡괭이나 드릴이 필요할 겁니다. 시는 제가 사회를 위해 하나의 생산물을 보탤 수 있는 도구가 아닐까요? 특별한 건 아니죠.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는 것이기에."
- 이 시대의 진정한 시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부조리한 사회에서 아파하는 생명들의 고통을 함께하는 시라고 봅니다. 그 벽을 넘어서려는 꿈, 그리고 간절함이 배인 시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서정시가 아닐까요?"
- 송 시인의 시적 엔진이 '분노'라는 것은 이런 배경이었네요. 사실 분노라는 감정은 희노애락과 다 맞물려 있는 것 아닌가요?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에 참여하고 있다는 증거죠. 다른 꿈, 우리가 가야할 길에 대한 상이 잡혀 있기에 분노할 수 있는 거죠. 분노하는 삶은 힘들어도 행복합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계기일 수 있고요."
송 시인에게 '혹시, 시적 동력을 얻기 위해 노동 현장에 다니는 것이 아니냐'고 우스개를 하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기륭에서 7년 더불어 살았지만, 4~5편정도 썼습니다. 희망버스를 탈 때도 2편정도, 대추리에서 1년 넘게 있으면서 2편을 쓴 것 같아요. 현장에 있으면 객관적 거리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시가 잘 안 나옵니다. 현장에 가는 것은 민주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저의 DNA에 소중한 경험을 축적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죠."- 송 시인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40편정도 썼는데요, 왜 기사를 썼나요?"분노와 절박함 때문입니다. 글을 위해서 글을 쓴 게 아니었습니다. 부조리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고,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게 지키려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서였죠."
- 기사를 쓰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기륭전자 포클레인에서 떨어져서 거동을 못했던 때였는데, 김진숙 선배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전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압니다. 김 선배의 자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노동문제 등 자료를 모아서 보름에 걸쳐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썼어요(관련 기사 :
세상에 없던 새로운 버스 노선이 온다). 그 글을 쓰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도 그 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희망버스에 탑승해주셨어요. 시를 쓰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파장은 더 큰 것 같아요. 용산에 있을 때에도 '콜트콜텍의 진실을 아시나요'라는 글을 썼는데 대중음악인들이 온라인상에서 퍼 날라서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됐습니다(관련 기사 :
울릉도에 기증된 기타의 '진실'을 아시나요)."
그는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냐'고 물으니, 기륭전자와 유성기업 고공농성, 콜트콜텍, 쌍용자동차 등에 현황을 줄줄이 외면서 계획을 늘어놨다. 그래서 물었다.
- 그런데 시는 언제 씁니까? "그게 다 제가 쓴 시라고 생각해요. 모든 시가 활자화 되어야 하나요? 제 이름이 붙고 저작권이 붙어야 시인가요? 시적인 삶을 살아야 한편의 좋은 시를 건질 수 있죠. 그게 다 시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가 전에 건네준 <사소한 물음에 답함> 시집을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길거리 시인답게 제목을 붙인 '가두의 시'를 읽으면서 문득 삶이 곧 시라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됐다. 그는 시답게 살면서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었다. 그는 천생 시인이었다.
가두의 시길거리 구둣방 손님 없는 틈에무뎌진 손톱을 가죽 자르는 쪽가위로 자르고 있는사내의 뭉툭한 손을 훔쳐본다그의 손톱 밑에 검은 시가 있다종로5가 봉제골목 헤매다방 한칸이 부업방이고 집이고 놀이터인미싱사 가족의 저녁식사를 넘겨본다다락에서 내려온 아이가 베어먹는 노란 단무지 조각에짜디짠 눈물의 시가 있다해질녘 영등포역 앞무슨 판촉행사 줄인가 싶어 기웃거린 텐트 안시루 속 콩나물처럼 선 채로국밥 한 그릇 뚝딱 말아먹는 노숙인들 긴 행렬 속에끝내 내가 서보지 못한 직립의 시가 있다고등어 있어요 싼 고등어 있어요저물녘 "떨이 떨이"를 외치는 재래시장 골목 간절한 외침 속에내가 아직 질러보지 못한 절규의 시가 있다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