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는 창간 14주년 특별기획의 하나로 <행복사회의 리더십>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해 오연호 대표기자가 연재한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을 찾아서'의 속편격이다. 덴마크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행복사회를 위해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를 모색해본다. 이 연재는 2014년 9월 초 단행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말] |
여기는 함부르크. 이 독일 서북부 항구도시에서 나는 승용차 한 대를 렌트했다. 폭스바겐의 감색 밴 파사트(Passat). 날렵하다. 마음에 든다. 오늘은 이 차를 몰고 북으로 달려 덴마크 국경을 넘어야 한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덴마크를 동서남북으로 구석구석 달릴 것이다.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비밀을 찾아서. 지난해에 두 차례 덴마크를 찾아간 것은 주로 수도 코펜하겐과 그 인근이었다. 이번엔 지방을 돈다. '행복사회 덴마크'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간다.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서긴장된다.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기어를 수동으로 변환해 주는 스틱 차를 모는지라 시동이 자꾸 꺼진다. 독일에선 스틱이 대세라 해서, 기름도 적게 든다 해서 선택했다. 일행이 둘 있었지만 나는 이번 취재여행에서 운전사를 자임했다. 실감나게 덴마크를 밟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함부르크 시내를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온 몸에서 식은 땀이 난다. 스틱을 다루는 것도 어색하지만 길도 표지판도 영 낯설다. 게다가 내비게이션은 영어로 말하니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동승자들이 불안해하는 기색이다. 일주일을 사고 없이 버텨낼 수 있을까?
이런 모험 혹은 고행은 나의 선택이다. 비행기를 타고 코펜하겐에 가지 않고 승용차로 독일에서 덴마크로 입성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다. 덴마크의 오늘을 이해하려면, 내가 지금 달리면서 보고 있는 이 길과 땅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불과 15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덴마크 땅이었다. 함부르크 외곽에서부터 시작해 북으로 약 200km 정도 달리면 나오는 현 덴마크 국경까지 모두 덴마크 땅이었다.
몰락한 나라에 뿌려진 희망의 씨앗1864년 4월 18일. 덴마크의 역사에서 이날은 치욕적인 날로 기록돼 있다. 영토문제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던 디볼(Dybbol, 현 독일 북부)에서 전쟁이 발생한다. 덴마크군은 독일군의 급습을 받고 불과 몇 시간 만에 5500명이 희생된다. 1000년 동안이나 덴마크의 '최후의 보루'로 버텨왔던, 독일 쪽을 의식해 만들었던 28km짜리 군사용 방어벽 다니비아케(Dannevirke)도 소용 없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비엔나에서 종전협상이 이뤄지고 패전국 덴마크는 영토의 3분의 1, 인구의 5분의 2를 독일에 빼앗긴다.
국가적 자존심에 치명상을 입었다. 덴마크는 서북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의 하나로 전락했다. 독일과 다시 한 번 더 전쟁이 나면 끝장이었다. 국가의 존립 자체가 불안했다. 굴욕적으로 생존을 위한 몸조심이 시작됐다. 덴마크는 1864년 이후 독일 눈치를 끊임없이 봐야 했고 대외적으로 '중립국가'를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역설이 있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대반전이 일어난다. 상실의 아픔 속에서 가장 건설적인 새 시대를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회복의 시대를 상징하는 모토는 이것이었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누가 이 모토를 처음 사용했는지는 덴마크 사람들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덴마크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져 최악의 상황에 처한 지 150여 년 만에 어떻게 오늘날의 나라가 되었는지, 그 비밀을 여는 시작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시 일어서기는 하나의 나라를 리셋(reset)하는 일이었다.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 만들기였다. 크게 세 가지의 혁신운동이 새 꿈을 꾸며 시작됐다. 그 운동들엔 어김없이 비전을 가진 리더와 '더불어 함께'하는 시민이 있었다. 리더는 철학과 헌신성과 실천력을 가지고 깃발을 들었고, 그 리더의 꿈과 뜻을 알아주며 함께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다.
그룬트비의 깨어 있는 농민 만들기
첫째, 니콜라이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가 주도한 '깨어있는 농민 되기' 운동이 확산됐다. 목사이자 시인이자 정치가인 그룬트비는 요즘으로 말하면 이른바 '참교육 운동가'였다. 그는 당시의 주요 시민이었던 농민이 깨어나야 좋은 사회,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국가가 주도하는 정규 교육과정과는 별개로 농민이 주도해서 농민고등학교를 만들게 했다.
이 성인용 자유학교에서는 농사일은 물론 덴마크 역사와 문학 등을 공부했다. 3개월, 6개월, 길면 1년간 다른 농민들과 함께 기숙을 하면서 농민들은 '새로운 시민'으로 거듭났다. 그들은 시험을 보지 않았고 자격증도 따지 않았다. 토론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 농민고등학교는 1844년 뢰딩(Rødding)에서 처음 선을 보였는데 20세기 초에는 매년 5000명 이상이 이곳에서 새로운 시민으로 각성했다. 그것이 얼마나 유행했는지 덴마크 성인농민들은 모두 당연히 그곳을 졸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평생교육이 그때부터 이뤄진 것이다. 그룬트비는 국민의 마음을 갈아엎었다. 새로운 나라를 위해.
그룬트비가 19세기 초중반부터 뿌린 씨앗은 오늘날 덴마크의 거의 모든 교육현장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공립학교든 사립학교든, 초등학교든 대학교든 예외없이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주인이 되게 만들어주는 교육이다. 교과서 속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되게 해주는 교육이다.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되 구성원간의 연대와 평등을 그만큼 중시하는 교육이다.
협동조합 만들기, 함께 하면 득이 된다둘째, 협동조합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덴마크는 농촌사회였는데 농촌의 공동체 문화는 18세기말이 되면서 매우 옅어졌다. 그런데 독일과의 전쟁에서 진 1864년 이후 농촌 커뮤니티가 급속히 복원되었다. 협동조합 만들기를 통해서였다.
더불어, 협동조합을 만들면 내 개인에게도 이득이 된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협동조합운동은 덴마크의 거의 모든 마을로 확산되었다. 1882년 최초의 낙농장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이후 소를 키우는 동네마다 협동조합으로 운영되는 낙농장이 세워졌다. 1914년엔 1500개로 늘어났다.
그들은 협동조합을 통해 힘만 모으는 것이 아니었다. 집단지성으로 창의적인 농법을 고안해 냈다. 원래 덴마크 농촌에서는 소 키우기와 옥수수 재배가 주요한 산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옥수수와 소를 대량으로 생산하자 경쟁력을 급격히 잃었다. 덴마크 농민들은 이때 협동조합을 통해 살길을 모색했고, 그 대안으로 '질 높은 농산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버터, 달걀, 베이컨 등이 그것들이었다.
이렇게 농산물 상품의 업그레이드와 판로 확보에도 협동조합은 큰 힘을 발휘했다. 서로 협력하면 농산물 가격의 변동에도 효율적으로 대등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작은 협동조합들이 연대하여 큰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조직과 연대가 개개인에게 이득이 된다는 것도 몸으로 터득했다.
달가스의 국토개간 운동셋째, 독일에의 패전 전부터 엔리코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가 시작한 국토개간운동이 패전 후인 1870년대에 본격화됐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지고 국토의 3분의 1을 빼앗긴 상태에서 달가스는 그나마 남아있는 덴마크 땅을 효율화하는 운동을 펼쳤다. 해변가의 습지여서 잡초만 무성한 쓸모없는 땅이었던 곳에 배수시설을 설치하고 나무를 심고 개간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땅으로 변신시켰다.
덴마크군의 장교 출신으로 엔지니어였던 달가스는 이 국토개간사업을 정부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사설기업을 만들고 이에 주민모금을 결합해 불도저처럼 추진해나갔다. 덴마크 농부들은 초기엔 그가 사심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으나 점차 그의 진심을 알아내고 적극 동참했다.
달가스와 그의 아들이 주도한 국토개간운동으로 30년 만에 덴마크의 황무지7380㎢는 3120㎢로 줄어들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으로 변신했다. 그야말로 독일에게 잃어 버린 땅을 남아있는 땅 안에서 찾아내는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열심히 일하는 근면정신은 덴마크인의 특성으로 자리 잡았다. 한때 한국과 일본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였다. 그룬트비가 교육으로 사람의 마음을 갈아엎었다면, 달가스는 국토개척으로 다시 한번 사람의 마음을 갈아엎었다.
값진 열매, 신뢰와 연대덴마크를 새로운 나라로 만든 국토개간 운동, 농민고등학교 운동, 협동조합 운동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시민들의 주체적 참여로 가능했다는 점이다. 국가나 어느 정파나 일부 지식인이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깨어있는 농민'들이 만들어졌다.
때문에 세 가지 목소리는 그 화음이 좋았다. 시너지 효과가 생겨났다. 하나의 운동은 다른 운동을 더 발전시켰다. 농민고등학교에서 눈을 뜬 농민은 협동조합 운동과 국토개간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피땀을 서로 흘리면서 땅만 가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마음도 함께 갈았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농토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국토개간과 협동조합을 하다가 지치거나 실패하면 다시 농민고등학교에서 충전하면서 새 길을 모색했다.
'3운동'으로 덴마크는 새로운 나라를 향한 튼튼한 기틀을 마련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져서 국토는 크게 잃었지만, 깨어있는 농민을 얻었다.
깨어있는 농민은 여러 가지 사회적 자본을 부가가치로 만들어 낸다. 그 핵심에는 신뢰와 연대가 있다. 협동조합은 '한 사람 한 표' 원칙이다. 큰 농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작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협동조합에서는 한 표를 행사한다. 그러나 이익을 나눌 때는 투자한 만큼 가져간다. 대농과 소농이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협동조합은 성공하지 못한다.
농민고등학교는 선생님과 학생이 자격증을 따거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를 가지고 마주 앉는다. 신뢰 없이 6개월간의 진지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모든 프로그램에서는 열린 마음으로 토론하기가 기본자세다. 신뢰하지 않으면 반대의견에 진지하게 귀기울이는 것이 어렵다.
국토개간운동도 달가스에 대한 의심이 신뢰로 바뀌면서 성공했다. 신뢰와 연대라는 사회적 자본이 이렇게 튼튼히 만들어졌기에 덴마크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중반 전 세계가 격동할 때 피의 혁명보다는 사회적 대타협으로 민주주주의 사회를 이룩해갈 수 있었다.
깨어있는 농민은 덴마크의 산업화 과정에서 깨어있는 노동자, 깨어있는 시민으로 진화한다. 이들은 이후 덴마크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중심축이 된다. 덴마크는 다당제이지만, 20세기 덴마크의 정치는 주로 노동자 중심의 사회민주당과 중농 중심의 벤스터가 주도했는데 그 두 당의 당원들 상당수가 위의 3운동이 만들어낸 깨어있는 시민들이었다.
이들이 평등과 자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시도와 함께 선진적인 사회복지 시스템을 완성했고, 그 덕분에 덴마크는 지금 '세계 행복지수 1위의 나라'가 되었다. 1864년 독일전쟁 패전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50여 년간에 걸친 씨뿌리기가 그렇게 꽃을 피운 것이다.
나는 이번 3차 취재(1월20~28일)에서 최초의 그룬트비 학교, 최초의 낙농 협동조합, 최초의 달가스운동 현장을 직접 가보았다. 그것은 19세기 중후반으로의 시간여행 같은 것이었지만 오늘 우리가 더 나은 행복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었다.
분명하게 배운 것 하나를 먼저 말하면 이것이다. 씨 뿌리지 않고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내일은 오늘의 우리가 만들어간다. 다음 글부터는 렌터카를 몰고 방문한 그 '최초의 현장' 이야기들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