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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장 혁련지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관조운이 멍하게 있자 낭자는 검을 거꾸로 쥐고 차례 자세를 취했다. 

"좋아요, 어차피 보여 준 김에, 이건 어때요?"

낭자는 왼쪽 어깨에서 사선으로 오른쪽 허리까지 검을 비껴든 다음,

"얍!"

하는 기합과 함께 뛰어올랐다. 이어 공중에서 검을 휘두르는데 그 빠르기가 전광석화 같았다. 연속 동작으로 공중제비를 돌았다가 땅에 굴렀다가 다시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에 검날이 반사되자, 하얀 배꽃이 바람에 휘날리며 땅에 내려앉기를 거부하고 공중에서 뒤집기 하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얏, 얍, 얏, 하는 기합 소리를 연속으로 지르며 검광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더니 제 자리에 다시 섰다.

관조운은 그녀의 몸놀림에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대체 그건 무슨 검법이란 말이오?'
"아미파의 절학 비검유혼(飛劍幽魂) 중 제칠식 탈명추혼(奪命追魂)이라고 합니다."

낭자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 변화가 무쌍하군요."
"본 초식의 생명은 변화죠. 총 17초로 되어 있지만, 여기에다 변화를 주면 그 끝이 없다고 보면 돼요."

느닷없이 아미파의 검법을 시연하는 이 낭자는 대체 누구인가.

관조운은 궁금해졌다.

"대체 소저는 누구신지요?"
"누군지는 내가 먼저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이곳에 있는 사람이고 댁은 방문자니까요?"

관조운은 말문이 막혔다. 스승님이 장기 출타를 하신다더니 그새 저택을 팔고 다른 사람이 이사 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 저는 관조운이라고 합니다. 여기는 함자가 모자, 충자, 연자 되시는 어른의 댁이 아니신가요?"
"네, 맞아요. 댁 같은 사람은 모를지 몰라도, 우리 같은 강호의 사람들에겐 명성이 아주 높으신 일운상인 모충연 대협의 저택이죠."

낭자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지아야, 손님을 그만 당황케 하고 이제 모시고 들어오너라."

안에서 모충연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사부님."

낭자는 깎듯이 대답하며 관조운을 향해 따라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사부님이라니? 스승님이 사천(四川)으로 장기출타하시더니 그새 다른 제자를 거두었나. 관조운은 생각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스승 모충연이 거탁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운아야, 그동안 잘 있었느냐?"
"네, 스승님도 별래 무양하셨는지요?"

관조운이 스승님이라고 칭하자, 낭자 또한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녀는 관조운이 무인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에 이들이 사제지간인 것으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기야 꼭 무공으로만 맺어져야 사제지간인가. 그녀는 쉽게 생각했다.

"지아야, 인사해라,"
"혁련지(赫連池)라고 합니다. 고향은 소주이고, 사문은 아미파입니다."

낭자는 자신의 고향과 사문까지 밝혔다.

"저는 관조운이고, 이곳 금릉이 고향이며, 스승님과는 십이 년 전부터 사제의 연이 맺어졌습니다."
"그쪽 소개는 아까 했잖아요."

혁련지가 그것도 모르냐는 듯 되물었다.

"격식과 족보를 따질 것 없다. 둘 다 나와 배움으로 인연을 맺었으니 같은 사문으로 여기도록 해라. 나이로 따져 운아 네가 위니 사형이 되거라."

모충연이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이렇게 해서 관조운과 혁련지는 일운상인의 동문사제가 되었다.

모충연은 그해 봄 사천으로 장기 출타를 떠났다. 십년 동안 만나지 못한 점창파와 청성파의 장문인을 만나 회포의 정을 나눈 후 마지막으로 아미산에 들렀다. 아미파 장문인 청암신니(靑巖伸尼)는 수십 년 전 모충연에게 진 마음의 빚이 있어 그런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그곳에서 혁련지를 만났다.

소주(蘇州)의 이름난 부호(富豪)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혁련지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하게 자라 성격이 선머슴처럼 활달했다. 그녀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무예에 뜻을 두며 돌아다니기를 즐겼다. 부모는 유가(儒家)의 번거로움에 매이지 않은 상인이었던 탓에 여식의 기질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혁련지가 여승의 소림이라 칭하는 아미파의 속가제자로 입문하겠다고 조르자, 이를 허락한 것도 상인의 개방된 심성이 한몫 했을 것이다.

모충연이 아미산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아미파의 속가제자로 삼년을 지냈던 차였다. 그녀는 모충연이 비천문의 사조이자 전설로 추앙받던 태허진인의 제자인 것을 알고는, 새로운 유파의 무예를 섭렵해보고 싶다고 청암신니에게 졸랐다. 청암신니는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말괄량이의 청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일운상인의 허락으로 마침내 비영문 제자로 받아들여졌다. 청암신니가 혁련지를 놓아준 것은 그녀가 출가승이 아닌 속가제자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의 부모로부터 들어오는 무시하지 못할 시주 때문에라도 그녀의 청을 딱 자르지 못한 것이다.

한편 모충연은 겉으로 보기엔 선머슴처럼 활달하고 말괄량이 같지만, 자신에게 만큼은 요모조모 챙기고 살갑게 대해주는 혁련지가 여러모로 맘에 들었다. 그 이면에는 스스로는 의식하진 못했지만, 그녀가 딸처럼 손녀처럼 가족의 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아미산에서 한 달하고도 달포를 머물고 그가 귀향 준비를 할 즈음 그녀가 제자로 입문하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속으론 그가 더 기뻤다. 비영문으로 돌아온 후 모충연은 혁련지의 살가운 태도와 적극적인 배움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지내다가 관조운에게 통기하는 것도 잊은 채 어느 덧 한 달이 지난 것이다.

혁련지는 노스승의 저택에 기거하며 수시로 무림의 이야기를 졸랐다. 청에 못 이긴 노스승이 무림고수들의 영웅담과 비사(秘史)를 풀어놓으면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오 일에 한번, 늦어도 열흘에 한번 꼴로 관조운이 경학을 논강(論講)하기 위해 모옥에 들를 때면 간혹 혁련지는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선비들의 고리타분한 강론이 뭐가 그리 재밌다고, 사부님은 무인의 호방함을 저버리면서까지 샌님이 된답니까?"

혁련지가 반은 어리광으로 반은 불평으로 입을 삐죽이곤 했다. 그녀로서는 관조운이 방문할 적마다 재밌게 이어나가던 무림 영웅들의 이야기가 끊기거나, 모충연에게서 특별지도를 받던 절기가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운상인은 무예보다는 유학에 더 관심이 가 있었다. 혁련지는 그런 스승을 졸라 절학의 끝자락이나마 겨우 조금씩 익히곤 하던 처지였다.

그럭저럭 그녀와 관조운이 마주치는 것이 많아지자 서로를 자연스럽게 알아 가기 시작했다. 강론에 앞서 혁련지가 차를 준비하고 차상을 내온다던가, 혹은 논강이 끝나고 나면 배움의 소회를 되새길 때면 늙은 스승은 혁련지를 꼭 불렀다. 간혹 흥이 넘쳐 스승이 그 자리에서 시(詩)나 사(詞)를 작문하고 이에 대한 감상을 평(評)해 달라고 하면, 혁련지는 매번 유학은 저의 배움이 아니라서 사양한다고 하면서도 문기(文氣)로 형성된 이들 사제 간의 우애를 부러운 듯 바라보았다.

혁련지가 모옥에 기거한 지도 어언 해를 넘겼다. 혈기왕성한 나이인데다 기질 또한 활달한 낭자가 산중 모옥에서 어찌 무예에만 매진하리오. 중양절을 맞이하여 늙은 스승은 관조운에게 혁련지를 데리고 금릉의 저자거리를 구경시켜 주고 더불어 유람도 하고 오라고 명했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청춘남녀가 일 년 동안 주기적으로 마주치는 가운데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이상 남녀 사이의 묘한 정(情)이라는 게 솟아날 만도 했다. 선남선녀로서 둘 다 빠지지 않는 외모와 심성을 갖추다 보니, 소 닭 보듯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관조운과 혁련지 사이에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했다. 처음엔 같은 사문의 정이고, 다음엔 같은 사부에게 가르침을 받은 사형제(師兄弟)의 정이었다가, 마침내 남녀 간의 연정이 싹을 트기 시작한 것이다.

관조운은 그녀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성격이 맘에 들었고, 혁련지는 관조운의 부드러우면서도 굳은 심지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연정을 표현하진 않았다. 그저 세월이 갈수록 각자의 마음이 달라진다는 것을 서로가 느꼈고, 상대방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서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정념이 당장 확 타오르진 않더라도, 서로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는 불꽃이 언젠가는 터져나올 것이라고 각자가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날벼락과 같은 그녀 부모의 부음이 들려왔다. 소주 지방에 돈 역병에 그녀의 부모가 횡액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급히 떠나야만 했다. 스승 모충연도 이 둘이 맺어지기를 무척 바랐다. 운아는 만사를 올곧게 바라보는 심지가 있고, 지아는 세상을 일목요연하게 보는 눈이 있어. 이 둘이 함께 하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을 텐데. 혁련지가 떠나자 노스승이 연 장문인에게 한 말이다.

스승님께 작별인사를 올린 그녀를 배웅하면서 관조운 끝내 숨겨진 마음을 꺼내지 못했다. 슬픔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사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차마 못할 짓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의 배웅이 영영 이별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부모가 남겨놓은 가업을 이어가야 했다. 그 길은 관조운의 길과는 합쳐질 수 없는 길이었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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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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