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이다. 서늘하고 우아하며, 지적이고 파괴적이다. 뮤지컬 <글루미데이>에 대한 첫인상이다. 작품은 1926년 여름, 의문의 정사(情死)로 수많은 이들의 뇌리에 기억된 '윤심덕과 김우진'에 관한 이야기다. 실화를 재연한 통속극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화는 허구의 인물을 더해 치명적인 미스터리 서스펜스로 다시 태어났다.
암울한 시대, 열린 사상 그리고 자유1926년 8월 4일, 한 연인이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서 몸을 던진다. 투신한 이는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천재극작가 '김우진'. 다음 날 조선의 촉망받는 예술가인 두 사람의 정사(情死)에 온 반도가 들썩인다. 하지만 목격자도, 시체도, 유서도 없다. 그들은 왜 흔들리는 뱃머리에서 몸을 던진 것일까. 뮤지컬 <글루미데이>는 그 흔적을 새롭게 짚어가는 '팩션 뮤지컬'이다.
뮤지컬 <글루미데이>는 치명적이다. 옴므파탈, 팜므파탈 등의 캐릭터로 승부하는 '치명적임'과는 확연히 다르다. 1920년대 조선은 식민지 시기였다. 이 시기는 조선인과 일본인, 부르주아와 가난, 신사상(新思想)과 구시대, 자유연애와 전근대적 결혼관이 충돌하며 거대한 시대적 웜홀을 만들던 때다. 현실과 이상의 파도에 털럭거리는 세 젊은이의 모습은 영화 '몽상가들' 속 위태로운 세 남녀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작품은 이들이 투신하기 5시간 전부터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치밀하게 심리적 긴장감을 쌓아올린다. 허구의 인물 '사내'는 긴장을 유발하는 동력이다. 그는 두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김우진은 그를 거부하려 발버둥치고, 윤심덕은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 당김과 밀어냄 사이의 아슬아슬함은 극 전반의 팽팽한 줄타기를 책임진다.
'사내'는 늘 '창의적인 사고, 창조적인 삶'을 부르짖는다. 그는 현실에 억눌렸던 김우진과 윤심덕의 예술혼을 자극하고 이끌어낸다. '셋이 함께일 때 가장 행복했다'는 윤심덕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사내'의 존재는 '현실'로 치환되기도 한다. 그는 김우진을 압박하던 창작에 대한 욕구, 아버지, 가정이 되기도 하고, 윤심덕을 옭아매던 생활고, 대중들의 시선, 자유에 대한 열망이 되기도 한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예정된 결말로 이끌려던 사내에게 한 방을 먹이고, 바다로 몸을 던진다. 이 장면이 통쾌하면서 오랜 여운이 남는 것은 속박된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향한 '내던짐'이어서다.
작품의 날 선 치명적임을 우아하게 만져주는 것은 음악이다. 김은영 작곡가의 손에서 탄생한 클래식한 뮤지컬넘버는 뮤지컬 <글루미데이>만의 색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으로 구성된 피아노 3중주는 낭만으로 점철된 시대적 분위기와 세 인물의 빽빽한 감정선을 놓치지 않았다. 윤심덕이 부른 히트곡 '사의 찬미'는 극중 여러 번 변주되며 등장한다. 특히, 선택의 기로에 놓인 윤심덕이 울부짖듯 부르는 '사의 찬미'는 단연 뮤지컬 <글루미데이>의 명장면이다.
난파된 배를 연상시키는 2단 구조의 무대는 빈틈없이 사용된다. 두 남녀의 최후를 장식하는 뱃머리와 비밀스러운 사내의 존재를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망대, 우진의 작업실과 객실을 오가는 메인 무대는 적재적소에 이용돼 아쉬움이 없다. 여기에 색과 사용방식에서 초연보다 훨씬 다채로워진 조명은 비극의 색감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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