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뿌옇게 변했다. 하필이면 미세먼지주의보가 내린 날, 길을 나섰다. 미세먼지는 중국에서 날아왔다.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중국은 미세먼지 원산지(?)답게 베이징을 비롯한 대도시들이 미세먼지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란다. TV 뉴스 화면을 통해서 본 베이징은 온통 뿌옇게 변해 아주 끔직해 보였다. 한데 그 영향이 우리나라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원당역에서 일행을 만났더니 마스크를 내민다. 미세먼지를 막기 위한 마스크인데, 잘못 산 것 같다. 성인용, 그것도 얼굴이 큰 아저씨들이 쓸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데 작았던 것. 아니, 마스크의 크기는 작지 않았는데 귀에 거는 고무줄 고리가 작았다. 고무줄이라 팽팽하게 늘어나서 귀에 거는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너무 팽팽하게 고무줄이 당겨진다는 거지.
한범씨가 귀가 잘라질 것 같다고 엄살을 부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 귀를 압박한다. 이거 초등학생용을 잘못 산 거 아냐? 투덜거리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미세먼지가 더 무서워서 귀가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 마스크를 써야 했다. 미세먼지가 많이 날리는 날은 아무래도 외출금지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송강누리길은 테마동물원 쥬쥬에서 시작... 주말에는 북적26일, 송강누리길과 고양동누리길을 걸었다. 송강누리길은 테마동물원 쥬쥬에서 출발해 필리핀참전비까지 이르는 길로 거리는 6.6km, 소요 예상시간은 1시간 40분이다. 고양동누리길은 송강누리길이 끝나는 필리핀참전비가 출발지점이다. 안장고개까지 이어진 이 길은 전체 길이가 7.1km이며 소요 예상시간은 2시간 40분.
두 코스를 합하면 13.7km, 소요예상시간은 4시간~5시간 정도. 이날도 안보선 고양시 녹지과 팀장과 정창식씨, 최한범씨가 같이 걸었다.
고양시에서 고양힐링누리길을 가장 많이 걸은 이는 아마도 정창식씨일 것이다. 고양힐링누리길 담당자이기 때문에 길을 만들면서 걸었고, 길이 다 조성된 뒤에는 관리하기 위해서 틈만 나면 걸었다. 창식씨야말로 고양힐링누리길을 손바닥 손금 들여다보듯 가장 잘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도 전국에서.
송강누리길 출발지인 쥬쥬동물원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미세먼지 때문에 세상은 온통 뿌옇다. 하늘도 잿빛이다. 그런데 날씨는 아주 따뜻하다. 2월이 채 가기 전인데 봄은 성큼 우리 주변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런 상태라면 올해는 꽃샘추위가 아예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 봄꽃도 일찍 필 것 같다.
쥬쥬동물원은 한산했다. 평일이라 그럴 것이다. 주말에는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찬다. 동물들을 보려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가족동반 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송강누리길에는 사과밭이 있네... 맛있는 사과 먹고 가세
공릉천을 흐르는 물 역시 봄빛을 잔뜩 머금은 것처럼 보였다. 수량도 많아진 것 같다. 공릉천은 양주시에서 시작해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이다. 고양시 2대 하천 가운데 하나이며, 총 길이는 30km에 이른다. 파주의 공릉(恭陵) 명칭을 따서 공릉천으로 불리고 있다. 한때는 곡릉천으로도 불렸다.
쥬쥬동물원 앞을 지나 공릉천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사과밭이 나온다. 가을에는 붉은빛을 탐스럽게 머금은 굵은 사과를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았다. 과수원 쥔장이 사과밭에서 사과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긴 겨울이 지나갔으니 이제 사과나무도 슬슬 기지개를 켜면서 사과를 맺을 준비를 시작할 때다.
사과밭을 지날 때마다 저 집 사과 한 번 먹어보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알고 보니 사과밭 쥔장이 안 팀장 친구란다. 쥔장이 우리 일행을 손짓해서 부른다. 사과나 먹고 가라고. 그럼, 그럴까나?
사과밭 안쪽에 아지트 같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쥔장은 우리를 거기로 안내한 뒤 사과를 꺼내기 위해 저장창고로 갔다. 호기심 많은 나, 당연히 따라갔다. 서늘한 사과창고 안에는 사과들이 담긴 플라스틱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사과를 옷소매에 쓱쓱 닦아서 한 입 베어 무는 창식씨. 옆에서 한 입 얻어먹었다. 다 먹기는 부담스럽고, 맛이나 본다고. 새콤달콤한 사과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물기가 많은 사과다. 어, 맛이 괜찮네. 즉석에서 택배로 한 상자 보내달라고 했다. 한 상자 값은 3만5천 원.
쥔장은 배낭에도 사과를 잔뜩 넣어주어서 우리는 나중에 최영 장군 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사과를 간식으로 먹었다. 송강누리길을 걸을 때, 꼭 들러서 사과를 먹고 가라고 쥔장이 신신당부한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따금 들러서 사과나무를 구경한 뒤 덤으로 사과도 먹고 간다는 것.
추억 속으로 사라진 교외선... 철로는 남았다네
길 위의 풍경에 지나지 않았던 사과밭이 이렇게 해서 낯익은 공간으로 변했다. 아마도 송강누리길을 걸으러 갈 때면 사과밭이 먼저 생각날 것이고, 이날 먹었던 사과향이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할 것이다. 이렇게 길을 나서면, 길 위에 서면 새로운 인연이 시작된다.
교외선 철로를 건넌다. 능곡과 의정부를 잇는 교외선 열차가 처음 개통된 것은 1962년. 마흔이 훌쩍 넘는 나이인 이들 가운데 벽제, 장흥, 원당을 경유해 달리던 교외선을 한두 번 타보지 않은 이들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 세월이 흐르다보니 교외선을 타는 이들이 줄었다. 다양한 교통수단의 발달이 한몫 단단히 했을 게다.
2004년, 교외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흔적이 건널목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교외선 철로가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화물운송이나 특수열차가 가끔 철로 위를 힘차게 달리고 있으니.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는 '교외선'은 교과서나 역사책에 가끔 등장하게 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잠시 건널목에 서서 길게 뻗은 철로를 바라본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게 하는 철로다. 일상은 덫이 되어 발목을 단단히 잡고 있다. 답답하고 갑갑할 때,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나지 못할 때 고양힐링누리길을 걷자, 나처럼. 그러면 한결 숨쉬기가 좋아진다.
물구리천 앞을 지나고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아래를 지난다. 나무 나이는 130살. 한 때 사람은 100년도 못 사는 존재였다. 이제는 수명이 늘어나 100년을 넘보지만. 나무는 100년을 훌쩍 넘기면서 산다. 마을 어귀에서 마을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다.
월산대군 묘에서 월산대군의 불운한 삶을 생각하다
월산대군 사당 앞을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들르기로 했다. 사당은 늘 그렇듯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사당 앞에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서 있다. 큰 나무의 수령은 280년. 큰 나무는 나무둥치 안에 콘크리트가 들어가 있다. 아픈 나무를 치료한 흔적이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잡귀를 물리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단다. 그래서 궁궐이나 궁궐 출입구에 많이 심었다는데, 향교나 서당 앞에도 심었다고 한다. 열매는 약재로 사용한다.
사당을 둘러보고 이번에는 내친 김에 '길 건너 저쪽'에 있는 월산대군 묘소에까지 가보기로 했다. 송강누리길 코스에서 엄청나게 벗어나는 셈이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가지 못할 것이라는 창식씨의 말에 가보기로 했다.
월산대군 묘 뒤에는 부인 승평부부인 박씨의 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이면서 왕이 되지 못한 불운한 왕자였다면, 부인 박씨는 연산군과 사통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한 불운한 여인이었다. 박씨 부인은 연산군의 큰어머니였으며, 연산군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단다. 연산군이 박씨 부인을 너무나 따랐기에 인수대비는 박씨 부인이 연산군과 통정을 했다는 혐의를 씌워 죽였다는 것.
예정에도 없는 월산대군 묘까지 다녀왔더니 시간이 낮 12시를 훌쩍 넘겼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린 지는 이미 오래. 아무래도 점심을 먹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가에 민물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눈에 띈다. 근방에서 매운탕으로 유명한 집이란다. 점심메뉴는 빠가사리 매운탕. 빠각빠각 소리를 내서 빠가사리라고 한다던가.
지은 지 100년 넘은 기와집에서 빠가사리 매운탕을 먹다
얼핏 보기에 다 쓰러져가는 기와집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아늑하다. 이 집은 지은지 100년이 넘은 집이었다. 1902년 12월에 완공했다는 팻말이 붙어 있다. 진짜란다. 지금은 식당으로만 활용하고 있단다. 겨울에는 집이 추워서 살 수 없다는 거다.
빠가사리 매운탕으로 점심을 맛나게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식당을 나서니 바로 옆에서 닭을 키우고 있었다. 쥔 할머니가 나와서 갓 낳은 달걀이 있거든 하나씩 먹고 가란다. 창식씨가 안으로 들어가서 달걀을 꺼내왔다. 닭똥 흔적이 남아 있는 달걀들이다. 쥔 할머니가 날달걀을 하나씩 먹으라는데 매운탕을 먹어 배가 터지기 직전이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 팀장과 창식씨가 하나씩 먹었다. 안 팀장의 반응은 비리다는 것이고, 창식씨의 반응은 고소하다는 것. 장닭과 암탉이 고루 섞여 있는 닭장 안을 보면서 이 식당은 진짜로 키운 토종닭을 요리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근에 토종닭을 대규모로 키우는 집이 있는데 닭이 모자라면 그 집에서 사온단다.
송강마을을 지나 한참을 걸으니 다시 공릉천이 모습을 드러낸다. 공릉천을 건너면 1번 국도가 나오고, 그 길을 건너면 필리핀참전비 앞이다. 걸음을 재게 놀리면 1시간 4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길을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송강누리길] 거리 6.6km. 소요예상시간 1시간 40분.테마동물원 쥬쥬 - 공릉천 - 월산대군사당 - 송강마을 - 공릉천 - 필리핀참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