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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위약청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관조운은 형수 진진 앞에서 꿇어앉았다. 그 곁에는 조카 섭월이 엄마의 치마를 잡고 울고 있다. 화마(火魔)가 할퀴고 간 관가장은 잿더미 속에서 연기만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다. 형수 진진은 화난 표정으로 조운에게 말했다.

"대체 도련님은 관가장과 청량서원의 장래는 조금도 염두에 없답니까.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관병은 관병대로, 무림의 인사는 인사대로, 이상한 괴한은 괴한대로, 모두가 관가장을 찾아와 도련님을 내놓으라더니 급기야 이렇게 불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관씨 도련님은 한가하게 옛 시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여인이나 찾아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형수는 말을 할수록 아름답던 얼굴이 표독하게 변해갔다. 그러더니 '말이 됩니까'하는 끝말에서 급기야 분을 참지 못하고 관조운의 뺨을 철썩 때렸다.

관조운은 뺨이 얼얼했다. 지독한 여인이로고. 아무리 손아래 시동생이라지만 이팔청춘 시절 한 때 자기의 연인이었지 아니한가. 아무리 내가 잘못했기로서니 여인이 장부의 뺨을 치는 건 또 뭐람. 관조운 서운함과 함께 슬며시 분이 치솟았다. 얼얼한 뺨이나 어루만지려는데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관조운은 몸을 뒤틀었다. 형수가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자로 변해 있다. 그는 이 무슨 조화인가,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싶어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한 일을 꿈속에선 반성하고 있는 모양이군, 잘못했다고 하길래, 내가 뺨 한 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다 용서됐다는 건 아냐."

관조운의 눈앞에 청의 무복을 입은 자가 서 있다. 건장한 체격에 주먹만한 코가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고리눈에 검미가 치솟아 있다. 오른쪽 어깨 위엔 박달나무 몸통에 삼끈으로 감은 투박한 검 손잡이가 삐죽 솟아 있다.

관조운이 영문을 몰라 멍하니 있자, 사내가 다시 손을 들었다.

"이 작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구먼. 한 대 더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지."

하더니 관조운의 뺨을 한 번 더 철썩 때렸다.

윽, 관조운은 아프다기보다는 화가 치솟았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려는데 도무지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몸이 의자에 묶여 있는 것 아닌가. 창문 휘장을 뜯어내 한 바퀴 휙 둘렀을 뿐인데도 동아줄로 꽁꽁 동여맨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다.

"너희 같이 상계(商界)의 도(道)도 모르는 놈들은 마땅히 이 도사 어르신한테 혼 좀 나봐야 한다. 알겠느냐!"

가만히 보니 도관의 복장처럼 단삼(單衫)을 겉옷 위에 걸치고 머리에 관도 썼다. 그러나 하는 짓거리로 보아선 도사풍이 아니다. 근데 무슨 도사가 검을 메고 다닌담.

"서생차림으로 위장하면 내가 어디 속을 줄 알았느냐. 제 아무리 돈 놓고 돈 먹는 속임수가 판치는 상술의 세계라지만, 아녀자가 혼자 있는 집에 이런 식으로까지 위협을 한다는 건 너무 졸렬하지 않느냐."

도사풍의 사내는 너무 빨리 말을 뱉었는지 숨을 한번 들이켰다.

"게다가 네 놈은 남의 집을 이리 난장판 쳐놓고 아예 낮잠까지 즐기니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구나. 설마 너희 패거리한테 어린애 장난 같은 무용담이나 자랑하려고 하는 짓거리는 아니겠지. 아니면 이따위 경고장이나 또 붙이러 왔느냐?"

사내가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사내가 종이를 펼치자 '고(告)' 자가 크게 써져 있고 그 옆으로 몇 개의 글자가 날림으로 적혀 있다.

  선단(船團)을 보내지 마라.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관조운이 영문을 모르고 의아스럽게 쳐다보자 사내는 다시 종이를 다시 구겨넣으며 말했다.

"이 자식이 영 철면피구나. 아니면 아직 잠 덜 깼냐!"

철썩! 사내가 또 관조운의 뺨을 갈겼다.

관조운은 화낼 틈도 없이 생각하기에 바빴다. 처음엔 은화사나 금의위 그도 아니면 무림맹 사람들인가 싶었는데 사내가 하는 말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멀뚱히 사내를 쳐다보았다.

"본 도사는 위약청(魏若靑)이라고 한다. 너희 같은 무뢰배들을 족치기 위해 화산에서 몸소 출도하신 귀한 몸이시지. 자, 이제부터 불어라, 너희 패거리는 모두 몇 명이고 어디로 갔느냐. 그리고 너는 왜 혼자 남았냐?"
"나는 당신이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패거리가 아니니 일단 이 포박을 풀고 얘기합시다."

관조운이 사내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얘기했다.

"이 자식이, 말로 해선 안 되겠구먼. 빨리 패거리들을 불어."

사내가 커다란 발을 들어 관조운의 가슴을 향해 냅다 내질렀다.

콰당!

관조운이 의자에 앉은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관조운은 가슴이 턱 막히며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관조운이 쓰러져 헉헉거리자, 사내는 관조운을 의자 채로 가볍게 들어 다시 앉혔다. 괴력의 사나이다. 사내는 관조운의 앞에 다시 서서 이번에는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손목관절을 돌렸다.

"자, 빨리 말해. 성질 급한 본 도사를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고. 너희들은 분명히 산서 패거리들의 사주를 받고 온 놈들이 맞지? 혁련 소저의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위협을 하면, 류구에 상단을 파견하는 걸 포기할까 싶었겠지. 자, 어떤 놈이야, 이름을 대."

사내가 손가락 관절을 꺾자 우두둑하는 소리가 났다.

"나, 나는 상단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소. 다만 혁련 소저와 인연이 있어 이곳으로 온 것뿐이오."
"아 하,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정말이오. 혁련 소저에게 연락을 해보면 알 것 아니오?"
"혁련 소저는 지금 상관(商館)에 있어. 언제 연락하고 자시고 해! 이 자식 잔꾀를 쓰는구먼. 아직 본관의 주먹 맛을 못 봤지?"

사내가 솥뚜껑만한 주먹을 들더니 관조운의 턱을 정통으로 갈겼다. 관조운은 이번에도 나가떨어졌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으드득, 관조운은 이를 갈며 사내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사내가 관조운을 의자 채로 들어 앉혔다.

"자, 불어, 너희들 패거리하고 사주를 한 놈 말야. 아직 본관이 칼을 뺄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뽑고 나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그런데 네가 불어준다면 너만 특별히 살려 주지. 어때? 이거 괜찮은 거래지 않아. 너희 패거리가 자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아니잖아."

사내는 이제 회유조로 나왔다.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할 사내다. 자기 혼자 내린 결론을 무조건 상대에게 강요하는 부류다. 이런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일단 분위기를 가라 앉혀야 되었다.

"이봐요, 위 도관. 나는 관조운이라고 하오. 그리고 나는 그쪽이 말하는 상계(商契)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고 이 집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소. 그 점은 나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이 자식,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먼.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니."

사내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자, 잠깐, 내 말을 들어보오. 내 장담하건데 앞으로 한 시진 내에 혁련 소저가 이 집에 올 것이오. 그때 가면 모든 오해가 풀릴 테니. 일단 기다려주시오."
"그래? 혁련 소저가 한 시진 이내 온다 이거지? 네 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바로 반 시진 전에 혁련 소저를 만났고, 이 집에 오게 된 것도 소저가 알려줬기 때문이오."
"혁련 소저가 네 놈과 아는 사이라 이거지. 좋아 앞으로 한 시진까지 기다릴 거까진 없고 반 시진만 기다리지. 그 안에 혁련 소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네 놈은 목숨을 내놓을 것이냐, 모든 걸 실토할 것이냐를 택해야 할 거다."

사내가 다소 누그러진 태도로 나왔다.

"반 시진까지 기다릴 것 없어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덧붙이는 글 | 이번 주 수요일은 출장관계로 휴재하고,
월, 금에 올리겠습니다.



#무위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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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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