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
나는 대한민국에서 기타만 30년 동안 만든 기타 기능공이다. 1983년부터 기타 회사만 다녔고, 기타의 분진과 유기용제를 만지면서 기타만 만들었다. 그런데 1986~87년부터 세고비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면서 대한민국의 기타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후 대한민국의 기타 시장은 한 회사가 독점하여 사장은 돈을 무척 벌게 됐다. 그러나 사장만 돈을 벌었을 뿐 노동자에게는 매일 적자를 이야기하며 최소 월급만 주어가며 일을 시켰다. 그 사장이 바로 콜트-콜텍 최대 주주 박영호이다.직장 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였고, 자녀도 두 명이나 태어났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직장 동료들보다) 더 받은 월급으로 학원도 가고 또래들보다 똑똑히 키웠다. 그러나 자녀들이 사춘기 때 정리해고를 당했다. 큰 딸 고2, 작은 딸 중 3 때였다.(정리해고로) 우리나라에서 노동자 자녀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다. 큰 딸은 그 후 대학교를 입학하였고, 1, 2학년은 장학금으로 다니고 학자금 대출을 받아가며 다닌 후 지금은 사회인이 되었다. 작은 딸은 고등학교를 입학한 후 아빠에 대해 원망을 많이 하며 힘들게 졸업을 했다. (작은 딸은 그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올해 대학교 입학을 했다. 아이들이 힘들게 학교 공부를 해야 했던 것은 한 회사 사장이 저지른 일이다.정리해고를 당하기 전과 후는 생활이 완전히 달랐다. 직장생활을 할 땐 딸들이 아빠 직업 이야기를 하면 "○○ 기타회사 ○○님~"이라고 하고,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 브랜드 기타가 나오면 "저 기타가 우리 아빠가 만든 기타야"라고 자랑도 했다. 정리해고 당하고 직장이 없어지자, 큰 애와 작은 애는 "아빠, 우리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해?"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마, 아빠가 알아서 할게"라고 큰소리쳤지만 현실은 너무 냉담했다.그때부터 딸은 사회에 대해 질문을 했고, 나는 딸과 대화를 하면서 현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농성에 대하여 설명을 할 때 딸들은, "그런 회사가 어디 있어?"라고 따지기도 하고, 농성이 무엇인지도 이해하려고 했다. 정리해고 후 적금, 교육보험도 다 해지하여 지금은 개인적인 빚만 지고 있다. 내 경우는 집이 대전이다 보니 농성으로 인천에 와서 객지 생활을 하는 꼴이고, 그러다 보니 너무 힘이 든다. 딸들이 아프다고 전화 왔을 때 마음이 너무 아프다. 가정 생활을 하다보면 가장이 할 일이 많은데 자녀에게 맡겨 놓은 게 너무 속이 상한다.주말에 집에 들어가면 딸들에게 미안함에 먹고 싶은 걸 물어 보면 "아빠가 돈이 어디 있어?"라고 내 걱정을 한다. 그럴 때는 우리 딸이 맞나, 생각들 때도 있다. 우리 딸들도 처음에는 농성을 이해해 주었는데, 너무 오래 가다보니까 딸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딸들이 나에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아빠, 싸움이 언제 끝나서 다시 기타를 만들 수 있을까? 끝나면 무엇을 할 건데?", "지금이라도 다른 기타 회사 들어가면 안 돼?" 딸들이 이런 질문을 해올 때면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다른 회사를 가더라도 이 싸움을 정리하고 갈 거라고 말은 하지만 마음 속은 아프다. 우리 딸들에게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때는 우리나라가 아닌 것 같다.아빠가 좀 더 열심히 노력할게. 우리가 가족 모두 다 모두 행복하길….2014년 3월 3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회사와 싸워온 8년... 가족과도 싸우고 단절하고 아프고...
농성장은 고속도로 IC 근처다. 차들은 쌩쌩, 먼지를 남기며 달린다. 임재춘 조합원은 쓸고 닦아도 더럽긴 마찬가지인 농성장 부엌에서 청소를 포기한 지 오래다. 좀 치우자고 한마디 던지면, "냅둬. 또 더러워져. 소용없어. 내가 처음부터 이랬는 줄 아나?"라고 날이 선 반응도 보인다.
주말에 모처럼 가족들이 있는 대전 집에 가면, 집 안은 임재춘 조합원의 눈에 많이 어질러져 있는 모양이다. 집 안이라도 쓸고 닦아 깨끗하게 만들고 싶은데, 그는 부재 중이고 딸들의 손길은 그의 기대에 못 미친다. 모처럼 집에 들어온 아빠가 청소문제로 잔소리를 했다면 안 그래도 마땅찮은 농성에 섭섭함 가득했던 딸들이 아버지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지겠지.
금요일이면 농성장에서 임재춘 조합원은 '똥줄 타들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방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 모습에 "집에 뭐 먹을 거라도 숨겨뒀냐"고 다른 조합원이 핀잔을 던지면 그는 대꾸도 없이 그냥 터미널 방향으로 멀리 시선을 고정해둔다.
올 초까지 콜텍 조합원들은 연극공연이다, 연대투쟁이다 그러면서 주말에도 대전 집에 못 내려가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애타다 일주일 만에 임재춘 조합원이 대전 집에 가면 환대가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딸들은 몇 년째 다른 도시에서 해고자로, 농성자로 살아가는 아버지가 또 얼마나 섭섭하고 불안할까.
그는 대전 집에 도착해 종종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딸들이 없으면 그것으로 섭섭하여, 딸들과 맛난 저녁이라도 먹으면 그걸 자랑하느라. 딸들과 언쟁이 있는 주말, 그런 날은 나의 메시지함에 임재춘 조합원의 절망과 후회의 문자들로 가득 채워진다.
서울고법 패소로 임재춘 조합원이 가장 걱정했던 일은 딸들의 반응이었다. 가족들을 설득할 땐 명분이 있어야 하고, 임재춘 조합원은 그래왔던 모양이다. "이번 서울고법 판결만 나면", "이번 판결만 잘 나면…."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서울고법 판결은 해고노동자들의 패소로 끝났고, 가족들 앞에 면 안 서는 사람을 여럿 만들었다.
그가 며칠 동안 소식 없이 농성장을 비우던 그때, 딸들은 대전 집에 와 있는 그의 집 열쇠와 지갑을 빼앗았다고 한다. 그리고 딸들은 외출했고 그는 월요일, 화요일이 되어도 인천의 농성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대전 집에 머물러야 했다.
8년차 농성 동안 겪은 가족과의 갈등, 그것을 내가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들 스스로도 가족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그 시간들을. 그러나 모르긴 몰라도 이 해고가, 이 장기 농성이 가족들의 희생 또한 요구해왔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생계의 책임 앞에 무력해지고, 해고 농성자 가족이란 낙인을 제공하고, 누군가는 투쟁기금으로 집을 내놓고, 또 누군가는 병든 어머니 곁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세월들. 그러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무능한 존재가 되고, 이해를 요구하며 날을 세우고, 이해받을 수 없을테니 말문을 닫고, 단절하고, 싸우고 아프고….
농성자들 중 가족과의 갈등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조합원도 있다. 없는 시간 쪼개 더 긴 대화를 하고, 더 많이 져주며, 모처럼 만나면 짧은 여행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개인의 노력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가족을 지킨다는 게 점점 더 거대한 소명이 되어간다.
경제적 어려움, 분리된 생활, 사회적 낙인. 그들 스스로 풀어낼 수 없는 난관이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임재춘 조합원이 글에서 말했듯, 그것은 한 회사 사장의 탐욕에서 비롯된 일이고, 이 사회의 이치가 만들어 낸 결과이므로. 가족은, 농성자들에게 아픈 향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