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불법적 대선 개입'과 'NLL 대화록 무단 공개'부터 최근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까지 국정원은 늘 뉴스의 중심에 서 있었다. 들추고 싶어 하지 않는 보수언론에서조차 하루라도 국정원 관련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다. 감히 상상도 못 할 국가기관의 연이은 일탈 행위를 지켜보려니 분노할 힘마저 잃었다.
몇 해 전부터는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도덕 감정이 무뎌지는 걸 느낀다. 웬만해서는 실망하지도, 좌절하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 원래 우리 사회의 수준이 그렇다며 혀를 끌끌 찰 뿐이다.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10여 년 전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의 과실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때, 또 한미FTA 체결로 광우병 우려가 번졌을 때, 촛불이 들불이 되어 번졌던 사회적 공분을 지금은 느낄 수 없다. 그때보다 몇 갑절은 더 심각한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음에도.
기소독점권이라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지닌 검찰은 인사권자인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복무한 지 오래고, 군대에선 시도 때도 없이 군기 문란 사고가 터진다. 일선 경찰관들의 일탈은 너무 흔해 더 이상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하고, 숫제 음지에서 일한다는 국정원은 아예 여론의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다.
국민들 누구도 국가기관을 신뢰하지 않고, 조직마다의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처럼 여긴다.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가재는 게 편'이라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공생 관계라는 것이다. 가령, 환경부와 국토부, 통일부와 국방부는 국익을 위해 견제해야 할 대척점에 위치한 부서임에도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환경부는 국토부 2중대, 통일부는 국방부 2중대라는 말까지 나도는 지경이다.
현 정부 들어 '낙하산'이 그야말로 폭탄이 되어 공공기관들마다 무차별적으로 투하되고 있지만, 과문한 탓인지 국민들 사이에서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것 같다. 기실 이는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여론의 매서운 질타 속에 정부의 도덕성에 큰 흠집이 날 만한 사안이었다. 우선은 언론이 철저히 입을 다물고 있는 탓일 테지만, 그보단 국민들의 '기대치'가 크게 낮아져서라고 보는 게 타당할 성 싶다.
국가기관의 범죄 행각이 갈수록 과감해지다 보니 이전에 벌인 일들이 언뜻 사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국정원의 댓글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물 타기 위한 NLL 대화록 무단 공개 사건은 벌써 국민들의 기억 속에 아득하다. 마치 거짓말을 더 큰 거짓말로, 범죄를 더 큰 범죄로 덮어가는 형국이다. 시간은 힘 있는 자들의 편이라는, 오래지 않아 국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거라는 '경험칙'에 기댄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총체적 난국'이다.
'인간과 양심'에 대한 믿음, 깨지고 있다개인적으로 국가기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픈 건, 인간과 양심에 대한 믿음이 시나브로 깨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 시절 읽었던 라인홀트 니버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메시지를 지금껏 그닥 신뢰하지 않았다. 도덕적인 개인들이라 할지라도 사회 내의 어느 집단에 속하면 집단적 이기주의자로 변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개인의 도덕과 사회적, 정치적 정의가 반드시 대립 항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오래 전 읽었던 그 책이 마치 '예언서'처럼 느껴진다. '점입가경'인 국정원 사태를 지켜보면서부터다. 직원만 만 명이라는 국정원에서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외부에 알리려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한 극악한 범죄인 만큼, 직원들의 양심선언이 이어지리라 기대했다. 물론, 순진한 생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국정원 직원이 되려면 그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듣자니까 경쟁률도 엄청나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국정원이 아무리 정보와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조직이라고 해도 '까라면 까야 하는' 군대의 문화와는 사뭇 다를 줄 알았다. 자칭 '최고의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모인 곳이라는 그들의 자긍심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런데, 그들이 자랑하는 '최고의 역량'에는 도덕성과 양심은 포함되지 않은 것일까. 오로지 조직의 안녕을 위해 직원들은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받고, 희생양 삼아 국민들 중 한두 사람 정도는 순식간에 죄를 씌워 골로 보낼 수 있는 음험한 조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라면 무는' 개가 되자고, 그 어렵다는 국정원 입사 시험을 치렀나.
침묵하는 그들도 국정원 직원이기에 앞서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엄연한 국민이다. 그들이 속한 조직이 버젓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도, 모르는 척 눈 감는다면 그들 역시 '공범'이다. 법률적 잣대로 죄를 입증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그들은 도덕적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에게 양심이란 게 있다면 말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국정원 직원법
그러나 그들을 그렇듯 몰아세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라인홀트 니버의 말마따나, 집단 속에서 개인의 도덕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걸 우연히 '법'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법률 제12223호 국가정보원 직원법'이 그것이다. 국정원에 소속된 그들에게 '국정원 직원법'은 대한민국 헌법보다도 훨씬 더 가깝고 힘이 셀 수밖에 없다.
그닥 길지 않은 국정원 직원법을 읽어 보고 난 첫 느낌은 이랬다.
'원장의 든든한 우산 아래에서 철저하게 신분 보장을 받는 '특권' 문서.' 특히 관련 직무의 범위 자체가 모호한 조항이 많아 원장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커서, 자칫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우려가 높다.
예컨대, 제17조 복무규정을 보면, 비밀의 엄수를 위해 거의 모든 활동을 원장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재직 중은 물론 퇴직한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건 기본이었다. 이외에도 법령에 따른 증인, 참고인, 감정인 또는 사건 당사자로서 직무상의 비밀에 관한 사항을 증언하거나 진술하려는 경우에도 미리 원장의 허가를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법정에서는 양심에 따라 증언하겠다며 선서를 하지만, 원장에 의해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직원의 법정 출석에 대해 허가 여부를 결정할 때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치거나 군사, 외교, 대북관계 등 국가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거부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고 있어, 증언 내용은 물론 출석 여부조차 오로지 원장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뿐 아니다. 직원이 직무와 관련된 사항을 발간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공표하려는 경우에도 원장의 허가가 필요하다. 직원이 허가를 받아 증언 또는 진술을 할 때에도 법원으로부터 비공개로 할 수 있도록 하는 '특권'도 빠뜨리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공무상 비밀 보호라는 명분이다. 이쯤 되면 검찰은 물론 법원조차 감히 손댈 수 없는 '괴물 조직'인 셈이다.
스스로 국가의 존립을 위해하는 조직으로 전락한 국정원에서 '도덕적 개인'이 나오기를 바라는 건 백년하청일지도 모른다. 양심을 버리고 집단적 이기주의에 매몰된 그들을 한사코 나무라봐야 달라질 건 없다. '최고의 역량을 갖춘' 직원들 역시 조직의 피해자일 수 있다.
작년 이후 여러 차례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반성하기는커녕 허물을 덮기 위해 자꾸만 무리수를 뒀고, 그럴수록 '주군' 한 사람에게 충성심을 인정받았을지언정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젠 이미 '개혁'할 수 있는 단계는 넘어섰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 다음 수순은 '해체' 아닌가. 국정원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아닌 게 아니라, '법률 제12266호 국가정보원법'에 규정한 직무를 보면, 과문한 탓인지, 딱히 국정원이 아니어도 별 문제없을 것 같다. 서슬 퍼런 공안 검찰과 국방부 기무사도 있고, 경찰정보과도 있으며, 대통령이 주관하는 '청와대 지하 벙커 모임'도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