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개요25년 전의 일이다. 소심하고 운동엔 젬병이며, 오로지 책만 읽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평소 흠모하던 이웃의 소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게 된다. 소녀는 자동차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자며 소년에게 차를 가져오라는 구체적인 요구사항도 제시한다. 소년은 학교 동급생들과 양가의 부모들에게 데이트 사실을 알렸던 터라, 데이트 이튿날부터 사라져 나타나지 않은 소녀의 행방에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누군가 결백한데 모든 사람들로부터 의심받게 된다면, 그런 채 사반세기를 살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경찰의 관심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평생을 감시 받으며 살게 된다면 도대체 그 인생은 뭐가 되는가 말이다.
소년은 사건의 용의자였지만 증거가 전혀 없고, 자백을 하지도 않았으므로 기소되지 않는다. 하지만 살인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 사건의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또 사건이 미궁에 빠지면서 그는 무려 25년 동안 마을의 모든 사람들부터 살인마 혹은 괴물취급을 받으며 유령처럼 살게 된다. 인구가 오백 명뿐인 샤봇 마을 민심에 무죄추정의 원칙은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배경
소설 <미시시피 미시시피 MISSISSIPPI MISSISSIPPI, 톰플랭클린 저, 한정아 옮김, 2014년 2월 17일, 알에치코리아>는 미국의 남부 미시시피 주의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마을에서 벌어진 미제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담고 있다.
소설의 부제가 <crooked letter, crooked letter>인데, 의미는 말 그대로 '꼬부랑 글자'다. 미시시피의 철자에 '꼬부랑 글자'인 S자가 많이 들어가 있고, 소설 속 주인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꼬불꼬불하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제목으로 보인다.
꼬이고 얽히고 설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보이는 우리 인간사를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
미시시피 주는 미국의 남부로 노예 주로 악명이 높았던, 그래서 <노예 12년>의 무대이기도 한 루이지애나 주를 왼편으로 접하고 있다. 면화와 옥수수 농장이 많아 백 년 이상 노예제도가 유지되던 곳이기도 한데, 현재까지도 흑인 비율이 제일 높은 주(州)다. 소설 속 주인공이 다니던 학교에 흑인이 더 많은 이유다.
이 소설은 어떤 하나의 장르에 가두기가 어렵다. 일종의 가족이야기일수도 있고, 흑인과 백인의 갈등을 다룬 드라마로도 읽히며, 일종의 성장소설일수도 있고, 범죄스릴러로서의 요건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애틀 타임즈는 이 소설을 '문학적 스릴러'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은 미시시피강 유역의 남단에 위치한 미시시피 주에서도 아주 외진 곳 샤봇이라는 마을이다.
악마로 25년을 산, 착한 남자샤봇이라는 마을에는 41살의 래리오트가 산다. 차량 정비소를 운영하는데 손님은 전혀 없다. 앞서 언급한 사건, 그의 나이 16세에 벌어진 신디라는 소녀 살인사건의 용의자였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그와 상대해 주지 않는다. 밤이면 동네 불량배들이 야구방망이 같은 흉기를 들고 나타나 그의 우편함과 차와 사무실의 유리창 등을 부순다. 부랑아들이 술을 먹고 용기를 내어 괴물을 공격하러 오는 것이다.
마을엔 같은 나이의 순경 사일러스 존스가 산다. 학창시절 야구선수였던 그는 래리오트와 신디라는 소녀가 행방불명 된 사건이 서로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증언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았다. 당시 사일러스는 신디의 실제 남자친구였는데, 흑인이었던 사일러스와 드러내 놓고 사귈 수 없었던 백인 신디는 백인 래리를 이용했던 것이다. 순진한 래리는 말하자면 신디의 위장데이트 상대였던 것이다.
사일러스와 그의 엄마 앨리스는 흑인이다. 사일러스의 아버지는 칼 오트로 래리 오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일러스와 래리는 이복형제 지간이 된다. 장차 래리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을 수 백만 평방미터나 되는 임야의 외딴 오두막에서 어머니와 난민과 같은 삶을 살던 사일러스는 백인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적자인 래리가 마뜩잖았을 수도 있다. 사춘기 때였으니 말이다.
사일러스는 야구를 핑계로 다른 학교로 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떠나게 되었고 남은 래리는 온갖 억측의 피해자가 된 채 25년을 살아간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는 치매증세로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래리는 혼자서 똑 같은 일과를 매일 반복하며 무던히도 살아간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정비소의 장비는 당시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채널이 세 개뿐인 텔레비전도 옛날 그대로다. 자신이 읽던 책도 그대로, 뒤뜰의 닭들도 그대로다. 래리는 16살 당시에서 한 발짝도 내 디딜 수 없었던 것이다.
외로움에 대하여...래리가 평생을 친구로 생각한 사람은 단 둘뿐이다. 그것도 래리 쪽에서만. 한 명은 친구이자 이복형제이며 25년 전 래리가 소녀를 납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래리와 소녀를 외면한 사일러스다. 또 한 사람은 래리를 전설의 강간살해범으로 알고 있던 동네 청년 월리스다.
월리스는 술과 마약을 하고, 총기를 여러 개 소장하고 있으며, 애완용으로 뱀과, 악마 같은 개, 핏불테리어를 키우는 그야말로 불량청년이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피하는 것들이다. 모든 면에서 래리의 친구로는 부적합한 인물로 보이지만 래리는 자주 자신을 찾는 월리스를 배척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이 만남으로 그간 자신이 외로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월리스의 방문으로 래리는 외로움도 일종의 단식이라는 것을, 그토록 오랫동안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초라하고 맛이 없는 음식이라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자기 몸이 얼마나 먹을 것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굶주리고 있으면서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본문인용) 엄마를 따라 사흘간 단식을 한 일이 있는 래리는, 외로움을 단식으로, 초라하고 맛없는 음식을 월리스로 비유하고 있다. 어쨌든 래리는 월리스를 자신의 조수로 고용해 일을 가르치고 사람을 만들어보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사회로부터 유기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뉠 수 있다. 인간관계를 포기한 래리와 어떤 형태로든 인간관계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월리스.낭중지추, 진실은 주머니의 송곳처럼 삐져나오게 마련이다?결국 한 달 전쯤 발생한 러더포드가의 여대생 실종사건은, 모두가 래리의 짓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25년 전 사건을 모방한 범죄로 드러나게 되는데, 범인이 밝혀지면서 극적으로 래리가 혐의를 벗게 된다. 그 사건이 월리스의 짓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25년 전의 사건마저도 사일러스의 증언으로 혐의를 벗을 수 있게 되었다.
래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25년 전 아들의 누명으로 마초적이던 아버지가 폭음으로 세상을 뜨고, 어머니는 가슴앓이를 하다가 요양원신세가 됐다. 위장데이트 이후 25년을 어떤 여자와도 만나지 못했다. 친구도 없었으며 밤마다 부랑배들의 행패를 견뎌야 했다. 마을에 사건만 터지면 항상 래리의 이름이 용의선상에 오르내리고 아무 때고 자행되는 경찰의 무단침입을 이해해야 했다. 25년 동안 말이다.
소설을 읽다가 며칠 전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을 하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간첩조작사건의 희생자로 알려진 유우성씨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의혹이 불거진 2013년 1월 국정원은 서울시청의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유씨의 동생이 한 증언도,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검찰이 증거로 제시한 서류도 모두 가짜로 판명이 된 마당에도 검찰이 계속 간첩이라고 하니, 유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첩 혐의를 완전히 벗으면 그가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나는 그가 '국정원이 간첩으로 몰아세우기가 성공했다면 그래서 간첩혐의가 입증되어 기소되고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하면서 당분간은 공포에 사로잡혀 지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억울함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지낼 뻔 한,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에 미안해 하면서.
물론, 래리와 사일러스는 화해한다. 이 화해는 형제간 이웃간 또는 인종간의 관계회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을의 공포가 제거되었다. 이젠 형사들이 래리의 집에 불시에 쳐들어와 검문하는 일도 없을 테고, 마을의 문제아들도 래리를 괴롭힐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 래리가 여자를 만나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다가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이웃들과 어울리며 잘 살길 바랄 뿐이다. 공포와 원망, 외로움으로 남루해진 영혼을 어루만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