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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이 친정을 방문할 때 넘었야했던 고향의 험한 산.
 누님이 친정을 방문할 때 넘었야했던 고향의 험한 산.
ⓒ 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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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는 4남 3녀다. 맏이가 큰 누님인 그녀는 나하고는 나이차가 15살이나 나기 때문에 가깝고도 먼 사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을 혼자 이끌어 가셔야 했던 어머니는 마음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일찍 눈치채고 우리 가정의 가장 노릇을 했던 것은 큰 누님이다. 맏이로서 짊어져야 했던 짐 때문에 누님은 늘 득은 없고 실만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맏이라는 이유로 많은 역 차별을 받았으면서도 누님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택권이 없는 자리, 그 자리에 누님이 있었다. 누님은 스무살이 갓 넘자 결혼했다. 결혼하고 스물 초반에 애도 낳았다. 어머님은 그걸 원했다. 꼭 맏이라서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맏이기에 서두른 면도 있었다. 중매장이와 함께 매형이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의 모습이 기억난다.

매형의 수줍은 얼굴과 부끄러워하는 누님의 모습이 머릿 속에 떠오른다. 그 당시 큰 누님이 부잣집으로 시집 간다고 말들이 많았다. 소가 15마리나 있는 그런 집이다. 누님의 시댁은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이다. 홍천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시간 가서 또 내려 30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험한 산길을 따라 걸어가면 도보로도 갈 수 있는 곳이다. 누님은 시집가서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증조 할머니와 시부모님을 모셔야했고, 시누들도 4명이나 되니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농사도 대규모로 짓는 집이라 집안일과 밭일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누님으로서는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으리라.

누님은 첫 아들을 낳고 친정을 1년에 한 두 번 방문하곤 했다. 홍천 시내로 돌아서 차를 타고 오는 시간이나 험한 산을 걸어서 오는 시간이나 비슷해서 인지 늘 험한 산들을 걸어서 오곤했다. 한 겨울에는 눈이 깊숙이 쌓인 곳을 장화를 신고 오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보따리에 주렁주렁 다양한 먹을 거리들을 담아왔다.

우리들은 누님이 어떤 선물을 가져올 지 무척 궁금하게 기다리곤 했다. 그 후 누님은 매형과 함께 오셔서 집을 새로 지어주기도 했다. 여러가지 재능이 많으신 매형 덕분에 우리는 단칸방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뿐 만이 아니다. 내 위의 형과 누님들을 모두 시집, 장가 보내주었다. 누구보다도 매형이 동의하기가 쉽지 않는 일인데도 신경을 많이 써주어서 매형에게 고맙다.

내가 중 3때 우리 가정은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처음 정착한 곳은 구로동이었다. 작은방 두 개를 얻어 사글세로 살게 되었다. 6명의 식구가 작은방에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도 누님부부의 도움이 컸다. 누님은 조카들을 서울로 전학시키고 우리집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작은방에서 사글세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 가정은 누님이 도와주어 단독 주택에서 전세로 살게 되었다. 매년 강원도에서 농사지은 쌀과 채소, 나물들을 보내주는 것은 물론이었다.

내 나이 사십을 넘긴 지금, 큰 누님은 환갑을 맞이하고 있다. 나와 띠 동갑인 큰 형도 쉰 줄을 훌쩍 넘어섰다. 이젠 가끔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는 사이가 됐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게 누님과 형들은 어른도 너무 어른이었다. 이런 환경 덕분에 나는 철없는 어른이 됐다. 지금 이 나이쯤이면 으레 짊어져야 할 부모의 부양에 대한 면책 말이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누님과 형들에게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내가 철딱서니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건 누님과 형들의 묵직한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내게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큰 형은 아버지고 누님은 어머니야 부모 맞잡이로 모셔야 한다.' 사실 유년 시절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명확히 이해한다.

날 세뇌시키듯 읊으셨던 어머니의 말씀은 '내가 너를 늦게까지 돌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누님과 형을 부모처럼 섬겨라'라는 속내였을 것이다. 가끔 이 생각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또 이렇게 나이 차가 많은 형제들이 있어 내 삶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지금 조카들은 잘 자랐다. 맏아들은 S대를 나와 지방 국립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둘째 딸은 개인 사업을 하고있다. 우리 형제들은 모이면 농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님은 우리 때문에 복 많이 받았어요"
"우리에게 고맙다 해야 돼요"

그러면 누님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 말이 맞다"

지금도 누님은 가끔씩 우리들을 불러서 별미를 만들어 주곤한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집에서 재배한 채소와 밑반찬 등 한 보따리씩 싸 주신다. 올해도 어김없이 손수 김장을 만들어 우리들의 김치 냉장고를 가득 채워 주셨다. 내 입장에서 누님은 담장이다. 어릴 때는 내 대신 싸워도 주고, 자식 된 도리에 엉킨 부담을 덜어주기도 한다. 누님은 예나 지금이나 앞에서 버티고 있다. 그 뒤에서 난 자유롭다.

현재 누님 내외는 작은 사업장을 경영하고 있다. 이제는 쉬면서 누릴만도 한데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습관을 버리지 못하나보다. 요즘에도 새벽에 일어나서 밤늦도록 일하신다. 얼마 전 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하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심심하고 외로워서 전화했어"라며 말씀하셨다. 자녀들 다 출가시키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많이 외로우신가 보다. 다른 여자들 같이 친정와서 완전무장 해제하고 편안하게 쉬어야 하는데 그런 경험을 한 번도 누리지 못한 누님, 결혼한 후에도 친정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짐의 무게가 힘겨웠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돌아오는 주말에는 꽃 한다발과 과일을 사들고 병문안 가야겠다. 누님에게 받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도 함께 갖고서...

덧붙이는 글 |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누님의 전화를 받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태그:#누님, #가족, #형제, #어머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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