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21일, 좀처럼 한국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 라트비아 관련 뉴스가 언론 지면을 장식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 위치한 한 대형할인매장 지붕이 무너지면서 쇼핑하던 사람들을 덮쳤고 많은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한 시각은 오후 6시로, 직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이 저녁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할인매장으로 몰리던 때였다. 이 사고로 54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중에는 아르메니아와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도 포함돼 있었다. 붕괴 직후 출동한 소방관들이 구조 활동을 벌이던 도중 남아있던 지붕마저 붕괴돼 3명의 소방관이 순직하기도 했다.
1991년 라트비아 독립 후 이 정도 규모의 대형 인명사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이번 일은 유럽 전체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사고였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지난 16일, 사고가 난 지역을 찾았다. 지난해 붕괴된 막시마(Maxima) 매장은 리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졸리투데라는 지역에 위치해 있다. 리가는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다우가바 강을 중심으로 크게 강동과 강서로 나뉘는데, 졸리투데가 속해 있는 강서 지역은 강동에 비해 경제적 수준이 다소 떨어지고 인구도 적은 곳이다.
그러나 이 할인매장이 있는 졸리투데는 강서 지역에서는 인구도 꽤 많고 도심이 형성돼 있어 최신식 주거복합건물과 신식 매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라트비아를 놀라게 한 할인매장 붕괴 사고
고층 아파트와 상권 한가운데 위치한 막시마 매장은 리투아니아 자본으로 건설된 대형 할인매장으로, 서유럽이나 미국 자본 대형매장의 진출이 적은 발트3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업체다. 1993년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소규모 매장들을 통합해 작은 규모로 활동을 시작했으나 10년 만에 급속도로 몸집을 불려 폴란드와 불가리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라트비아에서 막시마는 스웨덴 자본기업 대형매장인 리미(Rimi)에 이어 시장규모 2위(매출 기준)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매장만 운영하는 스웨덴 자본과 달리 다양한 규모의 매장을 건설하기 때문에 발트3국 사람들에겐 더 친숙한 이름이다.
막시마 매장이 있던 건물은 붕괴 후에도 철거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붕괴로 인한 건물 잔해는 대부분 치워졌으나, 현장감식이나 수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 건물 구조를 보여주는 기둥과 상품진열장 등은 그대로 남아 있어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울타리 밖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꽃과 촛불 등이 놓여 있었다.
사망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가져다 놓은 희생자 사진이나 직접 쓴 손편지들은 아직 비극이 끝나지 않았음을 전해줬다. 특히 인명구조작업 도중 순직한 소방관을 기리기 위해 가져다 놓은 소방헬멧과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감사 편지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건물 붕괴 한 시간 전쯤 매장 내에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대피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5시 41분께 계산대 위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화재방지 덧문까지 내려와 많은 이들이 그 안에 갇혔다. 곧바로 출동한 소방관들은 2차 붕괴의 위험에도 인명구조에 나섰으나 약 1시간 후 2차 붕괴가 이어져 소방관 3명이 목숨을 잃고 10명이 심하게 다쳤다.
외부 전문가로 수사팀 구성해 부정수사 가능성 차단
4개월여가 흘렀지만, 아직 사고의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사고 초기 일각에선 '매장이 관련 법규를 어기고 무리하게 건물을 확장하거나 부실한 자재를 사용해 공사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 건물은 라트비아 내 유서 깊은 건물의 복원사업이나 신축건물 공사를 하는 라트비아의 Re & Re 업체가 건축한 것으로, 2011년 완공 직후 라트비아 정부가 지정하는 '올해 최고의 건축상'에서 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고가 발생하던 당시 매장 지붕에선 시민들의 휴식공간과 놀이시설이 갖춰진 정원을 만드는 사업을 진행 중이었고 매장 뒤편에선 주거복합건물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현재 조사 결과에 의하면 증축공사 과정에서 편법이나 불법을 자행해 건축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에선 지붕 위 정원을 만드는 과정에 필요한 건축자재들이 한 곳에 오래 방치돼 있다 보니, 건물 기둥이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 것은 아닐까라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그 무게가 겨울에 지붕 위에 쌓이는 눈의 무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 이 또한 정확한 사고원인으로 지목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현재 수사팀은 공사 초기에 질 나쁜 건설자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나 사고 건물과 맞닿아 있는 신축 주거복합건물로 인해 사고가 났을 가능성, 2011년 옥상에서 발생한 화재가 건물에 손상을 입혔을 가능성 등 다각도로 수사를 진행 중이다. 현재 수사팀은 건축회사와는 관계가 없는 외부전문가들이나 외국인들로만 구성해 부정수사 가능성을 차단했다.
사고 직후 라트비아 정부는 희생자들을 위한 보상금액 합의나 치료 지원을 최우선에 놓는 등 재빨리 사태 해결에 나섰다. 현재 보상금 합의는 끝났고 지급도 거의 모두 완료된 상태다.
라트비아 대통령은 이 사건을 대규모 살인사건으로 규정했고, 검경합동조사단으로 꾸려진 전담반이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또 관련업체에서 건설한 건물들에 대해 대대적인 특별감사에 들어갔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돔브롭스키는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사고 매장에서 불매 운동 벌이는 라트비아 국민들
한편 이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많아 안타까움을 더했다. 16명의 아이들이 부모 중 한 명을 잃었고 양친을 한꺼번에 잃은 아이도 3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들은 부모를 여읜 아이들 소식이 들릴 때마다 보호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의 막시마 본부 관계자들이나 정치인들도 사태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막시마 매장 임원진은 사고 직후 라트비아 현장에 급파돼 현장 확인과 희생자 보상 문제를 합의했다.
막시마 라트비아는 졸리투데 붕괴사고와 관련된 누리집을 별도로 운영하며 사건 조사 상황과 보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사고 이후 막시마 그룹 누리집은 모든 디자인을 흑백으로 바꿔 애도 분위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이외에도 막시마 직원들의 월급 인상과 작업환경 향상 등을 약속하며 어두운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1월 15일, 라트비아 북부 도시 발미에라 막시마 매장에서도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다행히 손님이 몰리지 않는 오후 4시, 이동이 많지 않은 지점에서 발생해 희생자는 없었다. 그러나 앞서 대형참사를 겪은 라트비아 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두 번째 사고 이후 건축비를 절감하기 위해 저가의 볼트를 사용했다는 가능성도 제기되면서 막시마는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후 라트비아 일부 정치인들은 SNS를 통해 막시마 매장 불매운동을 벌였고 일부 시민들은 막시마 관련 기업이 만든 매장을 찾아 '기준에 맞지 않는 볼트를 사용해 건축을 밀어붙인 살인자 기업의 물건을 사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양국 모두에서 이 사고가 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수사가 완료된 후에도 당분간 이 지역을 소방관들을 추모하고 대형 참사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현재 정부차원에선 순직한 소방관들에게 독립전쟁, 사회적 안전도모, 국경수비 등을 위해 목숨을 잃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에스투르스 훈장(라트비아 역사상 가장 추앙 받은 군주의 이름을 딴 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트비아 당국의 신속한 사고 처리 관련 소식을 정리하며 지난 2월 17일 경주의 마우나리조트 체육관에서 발생한 붕괴사고가 떠올랐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참사 등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대형 참사를 경험한 대한민국이지만, 처리과정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 달 전 발생한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 또한 수사가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도 라트비아가 경험한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