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은 손해배상 소송에 가로막혀 있다. 노조의 파업에 대응하기 위해 사측이 청구하는 손배 규모가 1천억 원을 넘어섰다. 파업 손배소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일상이 돼버렸다.법원에서도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에게 수십억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쏟아지고 있다. 또한 파업이 발생하면 노동조합만을 상대로 법적인 책임을 묻던 예전과 달리, 최근엔 조합원 개인에게까지 손배 '폭탄'이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헌법상 권리인 노동 3권도 손배소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사측이 노조와 조합원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법원의 판결 결과는 어떻게 나오고 있을까. 전국의 대표적인 사업장에서 벌어진 파업 사건을 중심으로 파헤쳐본다. 또한 파업과 관련된 법률과 판례 분석을 통해 대부분의 파업이 불법이 될 수밖에 없는 배경과 수십 억대 손배소가 가능한 원인을 찾아본다.'손배소에 가로막힌 노동3권'이라는 기획을 통해 노동조합과 사측, 법률사무소 등을 통해 입수한 통계자료, 판결, 소송서류, 관련논문 등을 분석하여 파업 손배소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 기자 말
티코가 달리는 길에 벤츠가 돌연 뛰어들었다. 티코는 피하지 못하고 벤츠를 들이받았고, 티코도 박살이 났다. 수리비는 벤츠가 1억 원, 티코가 100만 원이 나왔다. 벤츠의 과실이 훨씬 컸지만 티코가 벤츠에게 몇 천만 원을 물어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공평하다고 사람들은 느낄까?여기서 벤츠는 대기업을, 티코는 노동조합을 빗댄 표현이다. 어느 현직 판사가 자동차 사고에 비유하여 대기업 노사의 손해배상의 형평성을 제기해 눈길을 끈다. 이 판사는 파업 손해배상액이 너무 과다하다며 법원이 노조의 민사책임을 큰 폭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도진기 판사 "벤츠는 지갑 열면 그만이지만, 티코는 파산" 인천지법 도진기 부장판사는 지난 10일 법원내부전산망 '코트넷'에 <노동조합과 손해배상>이라는 글을 통해 현행 법리 체계 안에서 파업손배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눈길을 끈다.
도 판사는 벤츠와 티코의 자동차사고를 예로 들며 "비슷한 상황이 거대 기업과 노조 간에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업의 불법 행위 vs. 노조의 불법 파업'의 경우, 생산라인의 정지로 손해가 발생하였다고 하여 그대로 배상액으로 떠안긴다면 형평성의 문제가 발생한다"며 "기업은 불법이 드러나도 유유히 지갑을 열면 그만이겠지만, 노조는 파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불법행위에 손해배상을 명하는 건 당연하고 쟁의행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문제는 불법성의 존부보다는 배상액의 크기(액수)"라고 지적했다. 도 판사는 "큰 기업일수록 생산할 수 있었던 물량 손실 뿐 아니라 고정비만 해도 엄청나 수십, 수백억에 이르기도 한다"며 "노조와 노조원들에게 액면금대로 배상을 명한다면 사실상 '끝장'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현행 대법원 판례는 자동차회사 등 제조업체 노조의 파업이 불법으로 규정되면 ▲생산손실(조업 중단으로 제품을 생산하지 못함으로써 판매로 얻을 수 있는 매출이익을 얻지 못한 손해)과 ▲고정비(조업중단의 여부와 관계없이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차임, 제세공과금, 감가상각비, 보험료 등)를 손해배상의 범위로 본다. 따라서 대규모 공장 설비가 있는 대기업에서 노조가 파업을 벌이게 되면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철도노조, 현대차, 쌍용차, 한진중공업 등에선 사측이 제기한 파업손배소에서 노조가 수십억 원~1백억 원대의 배상판결을 받은 바 있다. 노동조합이나 노조원 입장에선 그야말로 살인적인 판결이 될 수밖에 없다.
도 판사는 "과연 그들이 '그만큼' 잘못했을까? 불법파업, 잘못이다, 그래서 형사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죽기까지 해야 하는지?"라고 반문하면서 "종류는 다르지만 기업도 잘못을 한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도 기업은 손해배상 때문에 문을 닫지는 않는다"고 노사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했다.
대기업 노조가 '죽음에 이르는 배상'하는 이유? 그는 "대기업 노조가 '죽음에 이르는 배상'을 지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잘못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이 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액면대로의 배상은 노조의 영구적 활동정지를 초래한다"며 "노조원들과 가족은 생계를 잃는 반면, 그 돈 받는다고 기업의 수익이 대폭 개선되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도 판사는 생산손실과 고정비 손해배상 책임에 대해 일반인이 수긍하기 어려운 점을 거론했다. "'네가 일을 안 했으니 월급 못 주겠다' 혹은 '파업하면서 물건 부쉈으니 물어내라' 여기까진 쉽게 이해가 되는데, '네가 일했더라면 내가 벌었을 돈을 못 벌었으니 그 돈 내놔라'(라는 것은) 통상의 손해와는 좀 다르다"면서 "과장이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생산손실과 고정비손해)는 '꿈에 본 손해'의 배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노조원들은 형사책임보다 민사배상에 더 몸서리치는 것 같다, 형사처벌을 감수하고 나섰던 사람도 생계의 위기 앞에서는 발이 얼어붙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티코와 벤츠의 예를 다시 들며 "벤츠 사이드미러 하나만 박아도 차를 팔아야 한다면, 티코는 어디 무서워서 달릴 수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판사, 법해석기관으로 한계 있지만 형평에 맞는 해결 도모 가능"
도 판사는 "판사는 사또 재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프로그램과 같은 존재"라며 "'불법행위-손해의 발생-손해액 산정-배상명령'의 도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현실적으로 손해를 입은 기업의 요구를 뿌리치기도 어려워 보인다"고 한계를 인정했다. 그러나 도 판사는 "법해석기관으로서 한계가 있지만, 만약 노조의 민사책임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법리 안에서 형평에 맞는 해결을 도모할 길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고 했다.
그는 "신의칙(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민법의 원칙 : 기자 말)상 이루어지는 책임제한 법리를 좀 더 유연하게 활용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현행 판례로 보더라도 "판사에게는 사정을 고려해서 책임의 적절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재량이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더라도 법원은 불법행위 손해배상사건에서 불법행위의 발생 경위나 진행경과, 그 밖의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불법행위자의 책임비율을 제한할 수 있다.
도 판사는 ▲기업과 노조의 자력 차이 ▲액면대로 배상을 명하는 것이 기업의 수익에서는 큰 비중이 못되지만 노조(원)에게는 존립과 생계를 위협할 수 있는 거액이라는 사정 ▲외부의 타력에 의한 통상의 손해와는 다른 사건의 성격 등을 감안해서 노조 측의 책임을 현실적인 액수까지 떨어지도록 낮게 책정하자고 제안했다.
"청구액에 따라서 노조 책임 1%도 가능"그렇게 되면 "손배 청구액에 따라서는 (책임비율이) 10%, 아니 5%, 1%도 가능할 것"이라면서 "1억 원을 구한다면 10%가 적을 수 있겠지만, 100억 원을 구한다면 10%는 과도한 금액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광폭책임제한'을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불법파업으로 회사가 입은 전체 손해가 100억 원이라고 하더라도 노사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서 노조에게 1%의 책임을 묻고 1억 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법원의 판결을 보면 2010년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파업은 50%, 2006년 철도노조과 2009년 쌍용차 파업은 60%, 2010년 한진중공업 파업은 80%의 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배상금액도 파업 1회당 수십 억 원에 달한다(표 참조). 이런 점을 감안하면 도 판사의 제안은 상당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도 판사는 자신의 제안에 대한 반론을 의식한 듯 "피해자 측의 손해에 앞서 가해자 측의 자력을 고려한다는, 일반 불법행위 법리에서는 곤란한 발상이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거대 기업과 노동조합의 분쟁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듯하다"고 밝혔다.
도 판사는 또한 "노동조합이라고 해서 민사 책임도 완화되어야 하는가에는 찬반양론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실질적 형평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다만, 이러한 광폭책임제한은 생산시설의 파괴나 상해행위가 아닌 생산손실이나 고정비 손해에 국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행 판례가 파업의 정당성을 비교적 좁게 인정하고 있고, 불법파업의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있는 점 때문에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도 판사의 제안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법원이 법률의 개정 없이 재량으로 파업손배 금액을 제한하는 방안은 적극 검토해 볼 만한 사안이다.
현직 판사들, 대법원 판례 비판 논문 발표하기도한편, 그 이전에도 현직 판사들이 노조 측에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현행 대법원 판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유지원 판사는 2011년 논문(쟁의행위에서 손해배상 책임의 대상이 되는 행위와 그 주체)에서 구조조정과 같은 경영권과 관련된 사항에 반대하는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대법원의 판례를 비판했다.
유 판사는 "쟁의행위는 '주장의 관철을 목적'으로 '업무를 저해'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 판사는 "주장의 관철은 헌법상 노동3권에 해당할 수 있지만, 표현의 자유와도 관계된다"면서 허용된다고 보면서, "문제는 '업무를 저해'하는 행동을 (노동자가) 할 수 있는가"라고 보았다. 그는 "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헌법상 단체행동권이고 우리나라는 다른 입법례와 달리 이를 헌법상 권리로까지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용자의 권한 범위 내에 있고 근로자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구조조정과 같은 사안에 반대하기 위해 쟁의행위에 나아갔다는 점만으로 그러한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단체행동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과 같다"고 대법원 판례를 비판했다.
최누림 판사는 2009년 '불법쟁의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의 주체'라는 논문에서 평조합원들의 손해배상책임을 원칙적으로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최 판사는 파업이 일반적으로 예측불가능성, 유동성, 탄력성, 역동성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쟁의행위의 특성상 일반 조합원들이 그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정확히 내려서 자신이 쟁의행위에 참여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면서 "헌법상 기본권인 근로3권의 실질적 보장의 관점에서 불법쟁의행위에 따른 일반 조합원들의 사용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은 부정함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