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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의 차를 운전했던 또 다른 가이드 아흐마드.
이보의 차를 운전했던 또 다른 가이드 아흐마드. ⓒ P. IVO

"쉿, 사실 이건 비밀인데 솔직히 경미보다 소피가 더 예뻐요."

하마다는 한 시간이 넘도록 같은 식의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흑사막까지 향하는 길은 사막답게 황량하고 건조한데 우리의 차 안에서는 깔깔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집션인데다 유난히 더 흥이 넘치는 성격까지 가진 그와 함께 있노라니 웃느라 바빠 울퉁불퉁한 사막을 달리는 피곤함은 느낄 새도 없다. 내가 탄 차의 운전대를 잡아준 것만도 고마운데 하마다는 또 저대로 신이 났다.

흑사막은 오래 전 화산의 폭발로 생겨난 사막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다른 행성에 온 느낌이 든다. 돌들은 하나같이 까맣고, 거칠고, 단단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공간 감각이 사라진다. 모든 것이 너무 거대해서 되려 모든 것이 작아 보이고, 어떤 것이 앞에 있는지 또 어떤 것이 뒤에 있는지 좀처럼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막에서 시간을 잃은 채 헤맨다.

사실 사막이 아니어도 우리는 자주 길을 잃는다.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서 차로 돌아오라는 소리도 못 들은 나를 이보가 와서 잡아끈다.

"소오오피! 빨리 차에 타지 않으면 곧 거대한 괴물이 쫓아올지도 몰라!"

 흑사막에 있는 돌 산에 올라가 내려다 본 풍경.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만 같다.
흑사막에 있는 돌 산에 올라가 내려다 본 풍경. 마치 다른 행성에 와 있는 것만 같다. ⓒ 김산슬

지구 위 수 많은 길 중 이곳에서 만난 우리

"세상 정말 좁다. 죄짓고 살면 안 돼. 한 다리 건너면 서로 이어져 있는 게 사람 사는 곳이야."

엄마가 항상 해주시던 말이었다.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언제나 해주셨던 말씀이었다. 그리고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그리고 여행을 할수록 내 몸으로 온전히 체감하게 되던 말이었다. 세상은 결코 넓지 않았다. 버스에서 만나게 된 두 친구와의 만남도 그러했다.

같은 차를 타게 된 은준과 기남과 대화를 하다 그가 터키를 거쳐 이집트로 왔다는 얘길 들었다. 내게는 불과 두 달 전 요르단에서 만난 특별한 J라는 인연이 있었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도 배낭여행자인 J가 요르단을 떠나서 터키로 갔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은준이 갑자기 헉하고 놀란다.

"이 형 나 알아. 터키에서 만났었어. 숙소도 같이 썼었는데! 그 형도 같은 티셔츠를 입은 여자애랑 찍은 사진을 보여줬었어. 그게 너였다니! 와 세상은 정말 좁은가 봐. 소름 돋는다."

놀라움에 감탄하며 내 휴대전화 앨범을 죽 넘겨보던 은준과 기남이 피라미드 사진을 보며 말했다.

"우리도 피라미드 갔었어! 이집트에 도착한 날 카우치 서핑을 했는데 우리 호스트가 사는 곳이 피라미드 앞이지 뭐야? 하하."

피라미드 앞 카우치 서핑 호스트? 왠지 익숙한 단어들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는다.

"혹시 이브라힘? 키가 큰 이집션 친구 말이야?"

대답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그들의 얼굴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라는 뜻의, 충격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며 동시에 소리친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정체가 뭐야?"

그들은 아마도 내가 카이로의 마당발쯤 되는 줄 알았을 테지만, 나 또한 나와 요르단에서 작별한 J가 은준과 터키에서 만날 줄 어떻게 알았겠으며, 이 두 남자가 바로 이브라힘이 나를 만난 날 마중 나가야 했던 '그 두 남자'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새삼 인연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지구 위 같은 나라, 같은 도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함께 할 확률 그리고 서로가 눈을 마주치고 말을 건넬 확률. 모든 것이 절대 쉽게 일어날 수 없는 일임을 실감하고 나면 그렇게 만난 인연이 더욱 감사하게 느껴진다. 옆에서 묵묵히 운전을 하는, 삼 년 만에 다시 만난 하마다에게도 새삼 고마워진다. 쉽게 오는 인연은 없는데 내가 무심히 흘려보낸 인연이 없었나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한국인 세명을 태운 하마다의 차가 앞서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신나게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이보와 에바가 탔던 차는 다들 말이 없어 심심했었다고 한다.
한국인 세명을 태운 하마다의 차가 앞서 달려가고 있다. 우리는 신나게 이야기 꽃을 피웠는데, 이보와 에바가 탔던 차는 다들 말이 없어 심심했었다고 한다. ⓒ P. IVO

그리고 며칠 후 이들과의 만남이 인연임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준 일이 생겼다. 내가 그들과 찍은 사진을 업로드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은준과 대학에서 같은 동아리를 했었다고 신기해 했는데, 우리가 더 놀란 것은 그녀와 나 또한 바로 이곳, 바하리야에서 만난 인연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녀는 당시 내가 포스팅하던 이집트 생활기를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게 된 후 이집트에 오게 되었고 여행의 첫 방문지였던 바하리야에서 우리는 거짓말처럼 마주쳤다. 동갑내기인데다 특별한 인연에 감탄했던 우리는 한 번 더 세상 좁다는 말에 동의하며 삼 년 전 추억을 되짚었다. 아마도 바하리야는 내게 소중한 인연을 가져다주는 마법 같은 장소인가 보다.

반짝이는 바위, 크리스탈 사막

우리가 크리스탈 사막에 도착했을 때 성질 급한 겨울 해가 지평선 아래로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 크리스탈 사막의 이름은 이곳의 돌들 때문에 붙여졌는데, 그냥 평범한 바위 같아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투명한 석영들이 엉겨 붙어 반짝거리고 있다. 심지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들도 모두 크리스탈이다. 모두들 사진을 찍고 바닥의 돌들을 들여다보고 간직할 만한 작은 조각을 찾아보느라 정신이 없다.

 크리스탈 사막에서는 발 아래 땅에서도 크리스탈들이 반짝인다.
크리스탈 사막에서는 발 아래 땅에서도 크리스탈들이 반짝인다. ⓒ 김산슬

중국인 일행들로 인해 늦어진 일정으로 어쩔 수 없이 일몰을 크리스탈 사막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백사막에서의 일몰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광활한 자연에서 보는 노을은 아름다웠다.

높은 빌딩도 없이 넓게 펼쳐진 수평선 위로 오늘의 마지막 빛들이 하늘을 물들이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나를 벅차게 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제발 오늘은 사막 여우를 볼 수 있기를, 예쁜 별들을 위해 오늘만큼은 달이 제 모습을 감추어주기를.

 크리스탈 사막을 둘러보는 동안 어느새 태양이 아래로 숨어들고 있었다.
크리스탈 사막을 둘러보는 동안 어느새 태양이 아래로 숨어들고 있었다. ⓒ 김산슬

별이 움직이는 소리도 들릴 것 같았던 사막의 고요한 밤

끊이지 않는 감탄 소리가 깜빡 잠이 든 나를 깨웠다. 눈을 떠보니 세상이 전부 칠흑 같기만 하다. 사막의 하이라이트. 밤이 찾아왔다. 밖을 보라는 그들의 성화도 무시하고 나는 꿋꿋이 참기로 했다. 좀 더 어두운 밤이 찾아와서 더 많은 별이 나타날 때, 차에서 짠하고 내려서 별을 만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동 전화도 먹통이고 불빛도 하나 없는 사막에서 하마다는 별과 돌을 이정표 삼아 먼저 도착한 일행을 귀신같이 찾아갔다.

"다 왔어요! 얄라 알라."

하마다가 차의 시동을 끄기 무섭게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눈을 뜨고 바라본 하늘에는 헉 소리가 날 만큼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제 욕심껏 잔뜩 붙여놓아 밤이면 검은 틈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천장의 야광별처럼 사막의 별들 또한 너무 많아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째 우리에게 와르륵 하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너무 무거워서인지 별 하나가 또르르 하고 짧은 꼬리를 그리며 떨어진다.

고요한 정적을 깨뜨려 다른 이들에게 미안했지만, 내 가슴은 자꾸만 방망이질 치며 수만 가지 감탄사를 만들어내고,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소리인지 단어인지도 모를 것들이 순서 없이 튀어나온다.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고 입을 틀어막고 또 어쩔 줄 몰라 발을 구르고. 그러다 결국 진이 빠져서는 철퍼덕 바닥에 누우니 서늘한 모래의 감촉이 등에 젖어든다.

 카메라로는 절반도 담을 수 없었던 바하리야의 밤하늘
카메라로는 절반도 담을 수 없었던 바하리야의 밤하늘 ⓒ 김산슬

다른 차를 타고 있어 이동하는 내내 거의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던 이보가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내 옆에 다가와 앉는다. 그가 고요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가 보았던 수많은 세계 곳곳의 밤하늘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면 나는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누워 밤하늘을 보는 동안 오리온 자리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를 향해 삼각대 위에 고정된 카메라의 셔터는 느릿느릿 별을 담는다. 그렇게 사막에 밤에 몽롱히 취해 있는데 이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근데 소피, 나 배가 고파서 미쳐 버릴 것 같아."

그래 정말 너다운 대답이다 싶어 대꾸도 않고 다 안다는 표정으로 우리는 배시시 웃으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런 저녁이라면 사막에서 살게 되어도 좋아!

별을 보기 위해 빛을 피해 달아났던 우리가 베이스캠프로 다시 돌아오니 하마다와 다른 가이드들이 텐트를 설치하고 저녁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추워지는 날씨에 옷을 껴입고 레깅스 위에 수면바지까지 껴입었건만 좀처럼 차가워진 몸이 덥혀지지가 않는다.

"여기 와서 앉아요."

가이드 아흐마드의 말에 돌아보니 어느새 캠프 파이어 분위기가 물씬 나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금세 멋진 모닥불을 만들어 내다니 재주도 좋지! 열명 남짓의 여행자들이 모두 동그랗게 모여 손과 발에 불을 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하마다가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던 닭고기 구이도 지글지글 익어간다.

디너! 반가운 하마다의 외침에 어미에게 달려가는 강아지마냥 식탁으로 우르르 몰려간 우리는 저녁상을 보고 너 나 할 것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우리와 함께 하는 네 명의 이집션들이 정말 이 거친 사막 위의 베드윈 사내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상차림이다. 오늘의 저녁은 양념에 저민 후 모닥불에 구워낸 닭고기와 큼직한 야채들이 잔뜩 들어간 뜨거운 야채수프, 빵과 야채샐러드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쌀밥.

 사막에서의 저녁 만찬.
사막에서의 저녁 만찬. ⓒ 김산슬

도저히 사막에서 뚝딱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는 모양새에 모두들 둘러앉아 후루룩 수프를 마시니 맛은 더욱 믿을 수 없을 만큼 맛있다. 뜨거운 국물에 경직되었던 몸이 부르르 떨며 사르르 풀려온다. 모두들 행복한 표정이다. 내 주린 배를 채워주는 음식에 대한 감사와 그로 인한 행복을 느껴본 지가 대체 얼마 만인지.

여행을 할 때면 일상에서 당연히 누리던 것들에 새로이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이에게도 감사하게 된다. 사막 여우도 나타나지 않은 이른 밤,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식사 후 둘러앉은 모닥불 주변으로 울려 퍼지는 젬베와 아랍 노래 한 자락에 누구는 춤을 추고 누구는 손뼉을 친다. 완벽한 사막의 밤이다.

사막 여우 대신 우리에게 찾아온 '그것'

ⓒ 김산슬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이 발갛게 달아오른 은은함으로 사그라지자 피곤한 이들은 먼저 텐트로 들어가고 어딘가 숨어있을 자신만의 사막 여우를 기다리는 이들만이 모닥불 주변을 지킨다. 모닥불만큼이나 고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뜨거운 기대를 가슴에 품고서 침묵 속에 기다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둠 저 너머에서 무엇인가 기척을 낸다. 사막 여우다.

얼굴보다 큰 귀를 가진 어린 왕자의 친구. 호기심이 많아 관광객들의 신발을 물어가거나 음식을 구하기 위해 가끔 인간들에게 다가오는 사막 여우는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보더니 몇몇이 몸을 움직이자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늙었나 봐. 아무래도 자러 가야겠어."

고단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보가 먼저 텐트로 기어들어간 후에도 몇몇은 쉽게 사막의 밤을 포기하지 못 했다. 그 순간, 두 번째 방문에서도 사막 여우를 만나기에 실패해 상심한 나와 은준과 기남, 에바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니 발 밑에 나타난 것은 달이었다. 붉고 밝으며 아주 큰 달.

달은 본디 하늘에 걸려있는 것인데, 그때의 달은 일출처럼 우리의 발 밑에서 피어 올랐다. 아주 붉은 끄트머리가 보였을 때, 원근감이라고는 소멸되는 사막의 어둠 속에 우리는 그것이 차에서 나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 불빛이 자꾸만 커졌다. 단순히 커진 것이 아니라 수면 아래 숨겨진 빙산의 거대한 몸뚱이가 드러나듯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불빛은 커졌다.

마침내 그 빛이 반원 비스름한 모양으로 나타날 쯤에서야 우리는 그 빛이 거대한 보름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은 멈출 줄 모르고 자꾸만 커졌다. E.T에서 하늘을 나는 자전거 뒤에 휘영청 걸려있던 달만큼이나 비현실적이게 크고 신비롭지만, 동시에 어딘가 으스스 함을 주는 붉은 달이었다.

조금만 저 어둠 속으로 달려가면 잡힐 것만 같았다. 눈앞에 있는 저 바위 뒤에 숨어있다 올라오는 듯했다. 달은 제 자리를 찾아 자꾸만 위로 올라갔고 별들은 어느샌가 달아나고 있었다. 별들이 모두 숨고 헤라클레스의 허리끈이나 카시오페이아 같은 달빛만큼이나 밝은 별들만 남았을 때 모닥불은 불씨만 품은 채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별을 잃은 우리도 그제야 굿나잇 인사를 건넨 뒤 텐트로 들어갔다. 바하리야 사막의 하이라이트, 백사막에서의 일출을 보려면 지금이라도 잠을 자 두어야 했다.

텐트로 들어가니 잔뜩 웅크린 채 자는 줄 알았던 이보가 말을 거는 바람에 에바와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얘들아, 여기 너무 추워서 잠이 안 와. 가지고 있는 옷들 다 껴입고 자는 게 좋을 거야."

그의 말대로 사막의 추위에 우리는 밤 새 뒤척이다 아침을 맞이했다.


#이집트#바하리야#사막#사막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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