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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장 춘계문답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어느덧 기울기 시작한 햇살이 창살에 새겨진 희(喜) 자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쏴아 하는 소리가 대숲에서 들려왔다.

"사부님은 왜 하필이면 나에게 무극진경의 뒷일을 부탁했을까. 나는 강호인도 아니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도 아닌데."

관조운이 이마를 찌푸리면 말했다.

"제 생각에는 사형에게 부탁한 게 달리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요. 무극진경의 실마리를 다른 제자에게 남겼더라면 비영문이 강호의 뭇 세력들의 표적이 돼 자칫하면 피비린내 나는 먹잇감으로 전락할지도 모르잖아요. 한편으론 만에 하나 비영문 내에서 내분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을 염두에 둘 수도 있고요. 이런 저런 것을 고려해 볼 때 무공과 상관없는, 유생인 사형에게 얘기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죠."

혁련지가 명료하게 정리해 주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시점에서 한가하게 시나 읊조려 달라는 건 사부님의 기질로 볼 때 지금도 이해가 안 돼. 사부님이 왕유(王維)의 시를 읊으라는 순간, 속된 말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 아닐까 하는 외람된 생각까지 했다네. 아니면 임종의 순간에 종종 나타나는 환상을 보았거나."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어요, 사형. 사부님의 입장에선 말년에 향유했던 유학(儒學), 그 격조 있고 품향 높은 세계를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노래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죠.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 나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려한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시를 사랑하는 제자가 읊어주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하고 싶다. 세인들이 볼 때 그 정도의 기개가 살아 있어야 일운상인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굳이 왕유가 지은 '춘계문답(春桂問答)'을 읊조려 달라고 할 이유는 없지. 사부님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왕유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이었으니까. 사부님은 이 시를 자신의 입장에 빗대어 즐겨 읊었다네."
"종남별업은 어떤 시죠?"

혁련지가 묻자 관조운이 당나라 시인 왕유의 '종남별업'을 읊었다.

  종남산의 별장 (終南別業)

 중년에 들어 도를 자못 좋아해      (中歲頗好道)
 늙게야 종남산에 별장을 짓고       (晩家南山陲)
 마음 내키면 매양 혼자 가나니      (興來每獨每)
 아름다운 경치는 나만이 아네.       (勝事空自知)

 개울물이 끝나는 거기까지 걸어가   (行到水窮處)
 일어나는 구름을 앉아 바라보다가   (坐看雲起時)
 우연히 나무하는 늙은이를 만나며   (偶然値林叟)
 담소하며 돌아오기 잊기도 하네.     (談笑無還期)  
                                               <김달진 역『당시전서(唐詩全書)』.민음사. 1990.>

관조운은 시를 낭송하며 새삼 스승님에 대한 회상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사뭇 상기되며 시가(詩歌)가 주는 감흥에 빠졌다. 이때 혁련지의 낭랑한 목소리가 관조운의 시흥을 걷어냈다.

"듣고 보니 저도 그 시를 사부님한테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군요. 제가 알기론 종남산이 아니라 청량산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요?"
"맞아, 사매. 원시(原詩)에서는 종남산이 맞지만, 사부님은 왕유가 은거한 종남산에 빗대어 당신이 은거한 금릉의 청량산을 대신 집어넣곤 했지."

혁련지는 아무 말이 없이 곰곰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사형, 사부님이 임종 직전에 읊어달라고 하셨던 시를 다시 한번 들려줄래요?"

관조운이 다시 목을 가다듬고 시를 낭송했다.

  춘계문답 (春桂問答)

 봄계수에게 나는 물었네.             (問春桂)
 복사꽃 오얏꽃이 한창 향기로와      (桃李正芳菲)
 가는 곳마다 봄빛이 가득한데        (年光隨處滿)
 너만은 왜 꽃이 없는가              (何事獨無花)

 계수는 대답했네.                     (春桂答)                           
 봄의 그 꽃들이 어찌 오래 갈 건가    (春花詎幾久)
 낙엽이 우수수 가을철 되면           (風霜搖落時)
 내 홀로 꽃 필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獨秀君不知)
                                                                           <김달진 역. 앞의 책>

눈을 내리깔고 듣고 있던 혁련지의 눈동자에 반짝하는 빛이 어렸다.

"사형, 넷째 사숙님에 대해 들은 얘기 있어요?"
"넷째 사숙이면, 담곤(覃坤) 사숙을 말하는가?"

"네, 그래요. 강호에선 준목규운(俊木圭雲)이라는 외호로 알려진 분이죠. 그런데 그 분의 외호가 생긴 유래를 아세요?"
"글쎄, 구름 운(雲) 자야, 태허진인의 4대 제자 모두에게 붙은 각운이니 말할 나위가 없고, '준목규운(俊木圭雲)'이라면 멋진 나무의 귀퉁이에 걸린 구름이란 뜻이군. 그런데 별호가 생긴 유래까진 모르겠어. 사부님은 나에게 강호 얘긴 거의 안 하셨으니까."

관조운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사부님은 저한테는 강호의 일을 많이 얘기 해주셨습니다. 아니 제가 얘기를 해달라고 졸랐다고 하는 것이 옳겠죠. 아시다시피 태허진인의 문하에는 수제자 일운상인(一雲上人) 모충연(模忠然), 둘째, 운몽선객(雲夢仙客) 기승모(寄承募), 셋째 장강편운(庄江片雲) 습평(習坪), 넷째 준목규운(俊木圭雲) 담곤(覃坤), 이렇게 네 분이 계셨습니다. 보통 외호나 별호는 강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세간의 평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사대제자의 외호는 스승님으로부터 기인했습니다. 그렇다고 선비들의 아호(雅號)나 자(字)처럼 작심하고 작명하여 하사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연히 제자들을 평하면서 나온 말이 별호로 굳어진 거죠. 하지만 그 별호에는 스승 태허진인의 속뜻이 담겨 있다는 게 세인들의 입방아입니다."

혁련지는 긴 속눈썹을 껌벅이며 잠시 멈췄다. 관조운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치 사슴 같다고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주2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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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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