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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마다 마오의 동상이 있지만 이곳은 스스로 공부했던 곳이라 느낌이 남다르다
▲ 위에루슈위앤이 있는 후난대학의 마오쩌둥 동상. 대학마다 마오의 동상이 있지만 이곳은 스스로 공부했던 곳이라 느낌이 남다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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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을 이해하면 중국을 이해한 것이다"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그런데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결코 마오쩌둥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과 마오쩌둥을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칠과삼'(公七過三). 흔히 마오쩌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로가 칠이고, 허물이 삼이니 이해하는 게 맞다는 뜻. 많은 이들은 대약진 운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문화가 파괴된 것을 볼 때, 어떻게 허물이 삼 밖에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인에게 마오쩌둥은 신과 같은 존재

그러나 당대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삼도 많다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에게 신(神)과 같은 존재로 부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에 죽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서 중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럼 왜 마오쩌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을까. 우선 그의 공간은 너무 넓다. 19세기의 끝자락에 태어나 1976년에 영명한 그는 시기적으로 본다는 그는 청(淸), 민국시대(1912~1949), 중화인민공화국 시대라는 중국사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았다. 이런 시간들이 복잡한 씨줄처럼 얽혀있어 한 시대도 쉽사리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중심인물로 살았으니, 그를 예단하는 일은 당연히 쉽지 않다.

사상적으로 봤을 때도 그는 넓다. 젊은 날은 호남사범학교에서 정규수업을 하다가 베이징대학의 교직원으로 다시 서구 사상을 접했다. 공산주의가 중국에 들어오자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 나중에 저작에서 밝혀지듯 그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방식은 자신만의 관점이 있었다.

수호지의 고향 양산박은 직접 보면 천하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 협의 정신을 상징하는 산동 양상박 입구 수호지의 고향 양산박은 직접 보면 천하의 요새임을 알 수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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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주는 독서 마니아였던 마오는 고전에서 '자치통감'이나 '수호지'를 특히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치통감은 주(周)나라부터 오대(五代)까지 펼쳐진 처절한 정치적 대결을 풀어낸 책이어서 그는 여기서 정치를 배웠을 것이고, '수호지'에서 협(俠)의 정신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 사고들이 복잡하고 융합하여 마오쩌둥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오쩌둥은 1893년 12월 26일 중국 후난성 샤오산(韶山)에서 태어났다. 우선 시간적으로 본다면 그해는 광서 19년이다. 아편전쟁 이후 청(淸)은 국가를 바꾸어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후난에도 몰아쳤던 태평천국(1851~1864)이 지나고, 양무운동(1874~1875)도 진행됐지만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청 제국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오쩌둥이 태어난 이후에도 무술변법자강운동(1898년) 등이 있었지만 청은 1910년 신해혁명을 마지막으로 운명을 다했다.

후난성의 중심도시인 창사에서 공부를 했던 마오쩌둥 역시 이런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나 역시 1999년 12월말 첫 여행길에 창사를 들른 후 십여 차례 넘게 이곳을 왕래했다. 그런데 참 기분이 묘한 곳이 바로 창사다. 사회주의적인 지역 같으면서도 중국의 당대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특이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대장금>이나 <나는 가수다> 같은 한국 콘텐츠를 가장 먼저 도입했고, <슈퍼보이스걸> 같은 자체 프로그램으로 중앙방송을 능가하는 콘텐츠파워를 자랑하는 곳이 후난성이기 때문이다.

양쪽 편액에는 "오직 (이곳) 초나라 땅에서 인재가 나니, 이곳에서 번성하리라"라고 쓰여 있어 호남에 대한 자부심이 살아있다.
▲ 위에루슈위앤의 편액 양쪽 편액에는 "오직 (이곳) 초나라 땅에서 인재가 나니, 이곳에서 번성하리라"라고 쓰여 있어 호남에 대한 자부심이 살아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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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를 대표하는 여행지는 위에루슈위앤(岳麓書院)이다. 송대 4대 서원중 하나이며, 중국 남부를 대표하는 지성의 산실이다. 북송시대인 976년에 세워진 후 주희와 장식이 지성대결을 펼치면서 중국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중국에서 처음 유물론 사상을 편 왕부지가 가르쳤고,증국번이나 좌종당 등의 명사도 이곳을 거쳤다.

마오쩌둥 역시 이곳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이곳이 배출한 중국 근대 교육의 선구자인 양창제는 마오쩌둥의 첫 부인인 양카이후이의 아버지였다. 마오 역시 위에루슈위앤 아래 자리 잡은 호남사범학교에서 공부해, 이곳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후난의 정서를 가장 많이 펼친 인물이 초한지의 한 주인공 항우다. 유방에게 패해 자결한 항우와 함께했던 초나라의 중심지가 지금의 창사다. 그뿐만 아니라 회왕에 실망해 자결한 굴원도 이곳이 정치적 고향이었다. 한마디로 의기가 있는 고장이라고 할 수 있다.

후난을 대표하는 맛은 매운 맛이다. 중국에는 "쓰촨 사람은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후난 사람은 맵지 않을까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으니 매운 것 좋아하기는 후난 사람이 한 단계 높다. 이런 특성은 중국 혁명기에 빛이 났다. 마오쩌둥을 비롯해 펑더화이, 허롱 같은 장군들과 류샤오치나 런삐스, 후야오방 같은 정치인들이 이곳 태생이다. 후난이 없다면 중국도 없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중국 성립과정에서 후난사람들의 역할을 컸다.

그 가운데 마오는 후난인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확고한 자기주장을 바탕으로 정치 일생 내내 다양한 수 싸움을 벌이면서 생존했다. 마오의 존재감이 가장 먼저 들어난 것은 준이회의다. 대장정의 중간인 1935년 1월 15일에서 17일까지 열린 회의에서 마오는 외국 군사고문들에게서 홍군의 주도권을 가져와 중국식 사회주의의 첫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위기가 찾아온다. 이번에 상대는 엘리트 군인이자 정치인 장궈타오(張國燾)다. 베이징대학 시절 교수였던 장궈타오는 사서였던 마오에 대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던 차에 숫자적 우세를 가진 제4방면 군(軍)을 이끌고 있었다. 이 만남은 기 싸움 끝에 서로 다른 길을 가지면 장궈다오가 이끄는 군대가 참패하면서 홍군의 주력은 마오 쪽이 이끌게 된다.

마오는 옌안시절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톈안먼(天安門)에서 축배를 들 수 있었다. 해방 후 중국 공산당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국민당의 지배 당시 엄청나게 급등한 물가를 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할을 '재정의 마술사'라는 천윈(陳雲)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해결했다.

출판사의 견습공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후 노동자 출신 간부로 양성된 천윈(陳雲)은 공산화와 더불어 부총리가 되는 한편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을 겸직해 물가 장악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1949년 11월 13일 물가폭등 방지를 위한 긴급지시를 발동하는 한편 지폐의 발행을 억제하고, 식량과 면사 등을 나라가 관리하는 방식을 택해 쉽게 물가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韓國戰爭)이 일어난 후 중국은 미묘한 입장에 빠졌다.

전쟁 후반에 펑더화이(彭德懷)를 사령관으로 지원군이 파병된다. 전적으로 불확실한 파병이었지만 확전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의 입장으로 잘 봉합된다. 이런 외파와 달리 중국 내부에서는 토지개혁 등 완전한 사회주의의 변화를 위한 조치들이 시행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백만명에 달하는 지주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토지개혁은 환영을 받았고, 더불어서 마약 등 구악을 타파하고, 교육을 강화하는 등 사회의 토대를 만들어갔다.

한국전쟁 등 외부의 상황이 정돈되고, 토지개혁 등 내부의 중대 사안이 정리되자, 국가산업 정비를 위한 1차 5개년 계획(53~57년)이 시작됐다. 다행히 첫 5개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종이호랑이로 전락해 서양으로부터 뭇매를 맞는 문제를 해결한 이후 드디어 배고픈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1차 5개년 계획 다음을 움직일 중요한 회의는 1958년 8월 아름다운 휴양도시 베이따이허(北戴河)에서 열렸다. 이 회의 최대 사건은 대약진(大躍進)운동의 공식적인 추인이다. 57년 이후 '백화운동(白話運動)' 등 지식개조에 이어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민공사(人民公社) 운동을 포함한 대약진(大躍進)운동의 승인을 끌어냈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세력과 더불어 끊임없는 논리싸움으로 결정되는 이 중요한 회의에서 마오의 주도하에 대약진(大躍進)은 공식적으로 추인된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1차 5개년 계획이 성공적이었지만 식량 생산에 비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식량난의 우려가 있었다.

농촌에 대대적인 인민공사를 설립할 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고, 삼면홍기(三面紅旗)운동으로 대약진(大躍進)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결국, 이 정책은 현대 중국이 실시한 경제정책 중 최악의 실수였다. 중공업 발전을 위해 맹목적으로 쇠붙이를 모아 용광로에 던지는 꼴로 시작된 이 정책으로 인해 식량생산은 급감했고, 개인에게 지급되는 곡물량은 57년 205kg에서 계속해서 떨어져 59년에는 183kg, 61년에는 154kg까지 떨어졌다.

결국, 이 기간 동안 2천만 명이 기아로 목숨을 잃는 처참한 상황이 계속됐지만, 책임을 두려워한 지방정부의 잘못된 보고로 인해 이 정책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다. 다행히 1959년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毛澤東)에 이어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劉少奇)가 경제정책을 수정해가면서 62년 이후에는 약간 회복기미를 보인다.

류사오치(劉少奇)가 움직일 수 있는 데는 61년 6월말 '재정의 마술사' 천윈(陳雲)이 상하이 부근 칭푸(靑浦)현을 방문해 어려운 상황을 파악해 인민공사의 정황을 보고함으로써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류사오치(劉少奇)는 통치나 경제정책 수립 과정에서 기술 우선, 엘리트 존중 등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시작됐다. 류사오치(劉少奇)에게 권력의 일부와 대중의 인기까지 일부 내준 마오쩌둥(毛澤東)으로서는 만회할 기회를 얻어야만 했다. 솔즈베리 '새로운 황제들'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권위에 젖어든 마오는 반격을 엿보았고, 손자병법(孫子兵法)에도 능해 '성동격서' (聲東擊西 동쪽으로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한다는 뜻으로 적을 교란시키는 방법을 일컬음)를 잘 알았던 마오쩌둥(毛澤東)은 그 계기를 1959년 지앙시(江西)성의 휴양지인 루산(盧山)에서 시작했다.

지앙시성 루산에 자리한 이곳에서 마오쩌둥은 가장 자신을 따랐던 후배 펑더화이를 내쳤다.
▲ 마오가 펑더화이를 내쳤던 루산회의터 지앙시성 루산에 자리한 이곳에서 마오쩌둥은 가장 자신을 따랐던 후배 펑더화이를 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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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두보 등 중국 문인이 한두 수 이상의 시를 남겼고, 장쩨스(蔣介石)도 휴양지로 삼았던 루산(廬山)에서 시작된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8차 총회 및 중국 최고 지도자 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은 그의 오랜 동지이자 부하인 펑더화이(彭德懷)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린비아오(林彪)와 더불어 홍군(紅軍)시절부터 가장 뛰어난 부장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는 충심(衷心)이 담긴 사적인 편지를 통하여 농촌상황에 대해 마오가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국가를 위기에 넣을 수 있다는 우려를 보냈는데, 마오쩌둥(毛澤東)은 이 편지를 회의에서 회람시키고, 펑더화이(彭德懷)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 히스테리한 마오의 공격에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류사오치(劉少奇) 등이 있었지만 누구도 펑을 변호해주지 않았고, 펑더화이(彭德懷)는 갈수록 위기에 빠져들었다. 1959년 9월 국방부장에서 해임되고, 1965∼1966년에 모든 공직을 빼앗겼다. 옛 동지들은 마오의 공격이 펑더화이(彭德懷)에게만 집중된 것에 안심했다. 하지만 옛 친구의 낙마를 애써 무시하던 지도자들은 머잖아 칼날이 자신을 향해 올 거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마오를 대신해 그 칼날을 쥔 이는 펑더화이(彭德懷)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작전가로 꼽히던 린비아오(林彪)였다. 린비아오(林彪)는 대약진(大躍進) 운동의 실패로 위기에 빠진 마오를 구하는 척하며 마오를 숭배의 대상으로 올려놓는데 열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런 모든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에 너무나 힘들었다. 거기에 마오의 아내 지앙칭(江靑)이 합세하면서 중국 정치상 거대한 환란인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불씨가 붙여진다. 

연극 <하이루이(海瑞)의 파면>으로 문화대혁명 시작

베이징의 골동품시장인 판자위앤에서 판매되는 문혁 당시 선전물들. 온통 붉은 빛에 마오가 그려져 있다.
▲ 판자위앤 시장에서 판매되는 문혁 선전물 베이징의 골동품시장인 판자위앤에서 판매되는 문혁 당시 선전물들. 온통 붉은 빛에 마오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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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11월 야오윈위안(姚文元)이 상하이에서 우한(武漢)의 연극 <하이루이(海瑞)의 파면>에 대한 강력한 비판문을 쓰면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은 시작된다. 66년은 문혁(文革)의 광기가 불을 붙은 해다. 지앙칭(江靑)을 비롯해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4인방은 린비아오(林彪)의 후원 하에 문혁(文革)을 추동했고, 66년 늦봄부터는 대학가에 대자보가 붙고, 홍위병(紅衛兵)이 만들어지면서 중국은 순식간에 광기 속에 빠져든다.

펑더화이(彭德懷)의 붕괴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던 첫 번째 희생자는 류사오치(劉少奇)였다. 그는 '반(反)마오쩌둥 실권파의 수령' '중국의 흐루시초프'라는 비판을 시작으로 다음해는 당에서 제명되는 한편 모든 공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주더(朱德) 등 중국 공산당의 원로도 각다귀와 같은 홍위병(紅衛兵)들에게 수난을 받았다. 최근에 나온 덩샤오핑(鄧小平)의 딸 덩롱(鄧榕)의<불멸의 지도자 등소평(鄧小平)>에 잘 묘사되듯이 당시 중국 공산당에는 원로라는 개념이 없었다.

49년 이후 성역으로 인식되던 지도자들의 공관이 있는 중난하이(中南海)도 완전히 초토화에 가깝게 붕괴했다. 물론 가장 큰 수난을 받은 인물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류사오치(劉少奇)와 원로에 의해 약간의 보호를 받아서 당적만을 유지한 채 1969년 10월 22일 난창(南昌)으로 하방 된 덩샤오핑(鄧小平) 등 주자파(走資派 당시 자본주의와 같은 정책을 쓰려는 정치인들에 대한 통칭)로 몰린 정치인들이었다. 문혁은 국가의 모든 체계를 흔들었다.

하지만 마오쩌둥(毛澤東)은 조반유리(造反有理:모든 항거에는 무릇 정당한 이유가 있다)라는 말로 홍위병(紅衛兵)을 옹호했고, 미친 듯이 권력을 휘두르던 홍위병(紅衛兵)은 법과 질서 등 모든 것을 통치됐다. 그러나 문혁(文革)의 광기는 1971년 9월 13일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다가 발각된 린비아오(林彪)가 몽골로 가는 도중에 비행기가 추락해 죽음으로써 한 축이 무너졌다. 그리고 1976년 1월 8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사망했다.

이후에도 중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정치가로 가장 먼저 꼽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죽음으로 인해 중국은 적잖이 침체됐고, 4월 5일에는 톈안먼(天安門)에 사람들이 모여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추도식을 열었다. 시위는 더욱 커졌고, 첫 번째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기록된 이 사건으로 인해 덩샤오핑(鄧小平)은 다시 당원자격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잃었다. 대신에 부각한 인물이 화궈펑(華國鋒)이다.

그리고 1976년 7월 28일에는 현대에서 가장 큰 자연재앙으로 꼽힐 탕산(唐山) 대지진이 일어났다. 탕산(唐山) 뿐만 아니라 베이징과 허베이(華北)전역에 큰 피해를 준 이 지진으로 40만명(최하 통계는 24만 명, 최고는 65만 명 가량) 가량이 사망했다.

9월 9일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했다. 새로운 황제를 같이 데려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자였다. 마오가 죽은 후 지앙칭(江靑) 등 4인방은 정권을 장악하려 했지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원로인 예젠잉(葉劍英)이 실권을 이어받은 화궈펑(華國鋒)의 동의하에 베이징 군사령관 왕둥싱(汪東興)이 4인방을 전격 체포했다. 

1999년부터 사용되는 중국 돈에는 모두 같은 마오로 도안되어 있다. 뒷면에는 중국 풍경이 주로 도안된어 있다.
▲ 인민폐 100위안부터 1위안까지 1999년부터 사용되는 중국 돈에는 모두 같은 마오로 도안되어 있다. 뒷면에는 중국 풍경이 주로 도안된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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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들을 보면 마오의 공적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옆에서 보는 이들의 생각일 뿐 중국인들의 마오에 대한 존경심을 의심할 수 없다. 우선 중국 정부는 1999년부터 1위안 이상 지폐의 앞면에는 마오쩌둥의 얼굴로 도안했다. 그전에는 100위안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주더 등 4대 영웅으로, 다른 화폐에는 계급과 민족을 그려 넣었는데, 건국 50년에 이를 모두 마오쩌둥으로 도안한 것은 마오에 대한 충심을 의미한다.

또 다른 하나는 톈안먼의 입구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이다. 많은 이들이 과연 언제 저 초상화가 내려지는 가를 묻는다. 하지만 갈수록 신격화되어가는 마오쩌둥을 생각하면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초상화를 내리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 거대한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내려지는 순간이 사회주의 중국이 끝나는 날이 될 가능성이 많을 만큼 마오는 중국에서 신이 됐다
▲ 톈안먼을 자리한 마오쩌둥 초상 이 거대한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내려지는 순간이 사회주의 중국이 끝나는 날이 될 가능성이 많을 만큼 마오는 중국에서 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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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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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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