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수정: 28일 오후 7시 7분]'1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지난 1월 대신증권에서 나온 SK텔레콤(대표 하성민, 아래 SKT) 기업분석 보고서 제목이다. 이동통신 시장 점유율이 200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1위를 놓친 적 없는 브랜드 파워와 네트워크 품질 덕에 50%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 벽)'이란 얘기였다.
실제 SKT는 지난 '2.11 대란'에서 1등의 힘을 확실히 보여줬다. 덕분에 45일이 넘는 최장기간 영업정지와 수백억 원대 과징금을 떠안았지만 '3위' LG유플러스의 강력한 추격을 막는 데 일단 성공했다.
SKT는 창사 30주년 행사가 열린 지난 27일에는 삼성 갤럭시S5 조기 출시로 1등의 힘을 과시했다. 애초 다음달 11일 글로벌 출시 계획을 보름이나 앞당긴 것으로, 오는 4월 5일 영업정지를 앞둔 국내 1위 사업자의 '반전 카드'였다. '글로벌 엠바고(시한부 보도 중지)'가 깨졌지만 삼성은 정작 '유감'을 밝히는 수준에 그쳤다.
SKT로선 '3.20 통신대란'에 쏠린 부정적 여론을 돌릴 필요도 있었다. 지난 20일 저녁 6시간에 걸친 서비스 장애는 SKT의 자존심을 뭉갰다. 바로 다음날 하성민 사장이 공식 사과하고 '약관보다 많은' 보상책이라며 잔뜩 생색을 냈지만, 정작 생계에 차질까지 빚은 피해자들에게 돌아가는 건 몇 천 원 '푼돈'이었다. 증권사에서 추정하는 총 보상액수도 500억 원으로, 올해 예상 영업이익 2%에 그쳤다.
KT 전시는 막고 SKT 출시는 허용... 삼성 이중잣대
KT(대표 황창규)는 이런 SKT가 마냥 부러울 수밖에 없다. KT는 지난 21일 갤럭시S5를 경쟁사보다 하루 먼저 매장에 전시하려다 철거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삼성전자는 애초 지난 22일부터 61개국에서 글로벌 체험 행사를 진행하면서 KT에 하루 먼저 '기회'를 준 것인데, 이 사실이 일부 언론에 알려지자 전시 당일 제동을 건 것이다. 삼성전자 출신 황창규 회장 취임 이후 관계 개선 신호라는 확대 해석까지 나온 상황이어서 KT 상처는 더 컸다.
애초 삼성에서 홍보를 안 하는 조건으로 하루 먼저 전시를 허락했는데 언론이 앞서 보도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KT 처지에서 정작 단말기 출시 일정을 제 멋대로 앞당긴 SKT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삼성이 야속할 수밖에 없다.
'삼성-SKT 커넥션'은 유명하다. 외국 판매 비중이 90%가 넘는 삼성전자조차 국내 점유율 50%인 1위 사업자를 무시할 순 없다. 또 예정대로 4월 11일 출시하면 이통사 영업정지 기간인 탓에 당분간 3위 사업자인 LG유플러스 외에는 사실상 판로가 없다는 현실적 계산도 깔렸다.
황창규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1등 DNA'를 일깨우는 것도 이런 위상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만 해도 유선 전화를 앞세운 KT가 통신업계 1위였다. 하지만 1999년 12월 이동전화 가입자 1천만 명 돌파를 신호로 무선시장이 급성장했다. 반면 유선시장 규모가 계속 줄면서 통신 시장 주도권도 '유선 1위'인 KT에서 '무선 1위'인 SKT로 넘어갔다.
2009년 이석채 전 회장 취임 이후 선제적인 아이폰 도입으로 돌파구를 찾는 듯했지만, 임기 말 온갖 비리 혐의가 드러나면서 위기를 자초했다. 지난달 자회사인 KT ENS 직원 3천 억 원대 사기 대출 사건과 이달 초 980만 명 개인정보 유출 사건도 그 연장선에 있다. 황 회장 스스로 "여기서 하나만 더 잘못 돼도 미래는 없다"는 벼랑 끝 선언을 했을 정도다.
대규모 구조조정-자산 매각이 해법?
통신업계와 증권가에선 유선 시장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대규모 인력 구조 조정과 자회사 매각이 불가피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김준섭 이트레이드증권 통신담당 애널리스트는 지난 5일 발표한 KT 기업분석 보고서에서 "KT 직원 3만2천 명 중 유선 부문 인력이 2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KT 유선 부문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2만 명을 2천 명 수준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KT렌탈, BC카드 같이 규모가 큰 비통신 자회사 매각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KT 관계자는 "소규모 자회사 외에 우량 자회사 매각은 전혀 검토하지 않았고 인력 구조조정 계획도 없다"고 일축했다.
KT는 지난 2009년 KTF와 합병하면서 '명예퇴직'으로 직원 5992명을 줄였지만, '문제 사원 퇴출 프로그램(CP 프로그램)' 존재가 알려지면서 큰 생채기를 겪었다. 또 전화국 등 부동산 50여 개를 파는 과정에선 '헐값 매각'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참여연대, KT새노조 등 시민노동단체에선 황 회장에게 개혁에 앞서 옛 체제와 결별하라고 주문한다. 당장 내부 고발로 해고된 노동자 복직이나 '갑을 문제' 피해자 구제는커녕 '친박 낙하산' 논란을 빚은 이남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을 28일 KT스카이라이프 사장으로 선임하는 등 '구태'가 재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2012년에 이은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도 마땅한 보상 대책은 외면한 채 피해자에게 해지 위약금까지 물리는 것도 공분을 사고 있다.
결국 1등 탈환을 꿈꾸는 황창규 회장의 첫 상대는 SKT나 삼성전자가 아니라 옛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KT 자신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