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궁기'나 '보릿고개'란 말을 요즘 아이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닌 내가 춘궁기나 보릿고개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절박하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지났기 때문이다. 같은 세대라도 덜 가난했던 또래들은 춘궁기나 보릿고개의 참담함을 모른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해도 중학교를 갈 수 없는 형편에서 춘궁기나 보릿고개는 꼭 이맘때부터 보리이삭이 여물 때까지로 한정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 없이 자라던 유년의 기억엔 사철 배고픔을 겪어야 했고, 쉰밥 한 덩이라도 감지덕지 하던 입장에서 멀건 죽 한 그릇에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감격스러웠으니….
그런 봄을 쉰 한 번째 맞이한다.
옥수수가루 같은 사초꽃들이 바위틈에서 어김없이 피어나고, 여린 아이의 손 같은 돌단풍이 한껏 꽃망울을 올리면 온 산엔 거짓말처럼 진달래가 핀다. 한 길 이상 빠졌던 눈들이 녹은 산자락이 화사하게 물들면 배고픈 서러움은 극에 달한다. 절대로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이 지나고, 눈 속에서 도저히 꽃을 피우지 못하리라 여겼던 나목(裸木)들이 꽃을 피우는 변화의 계절에, 스스로 변화되지 않는 절망의 시기에 대한 서러움이었다.
어린 아이의 힘으로는 연명(延命) 자체도 버겁다. 나의 가난과 비슷하지만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더 절절한 가난의 세월을 지나오셨다. 소학교 문턱도 못 가 본 그분들께서 역경의 세월을 살아오실 수 있었던 근본은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순종적이기만 하셨던 그 분들께서 핍박과 모진 가난의 시대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부모와 자식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 성실함 오로지 그 하나의 힘 아닐까.
그러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힘 하나는 이젠 느낄 수 있다. 세상을 살며 순환의 의미와 자연으로부터 질서를 습득하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꽃을 피워내는 이치를 알 수 있다. 자연을 닮은 사람이기에, 우주의 순환 속에 더불어 생명의 선을 이어 팽팽한 긴장으로 가득한 사람이기에 생성과 소멸 속에 '때'가 있음을 깨닫고 인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한 사람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작게는 한 마을의 운명이 이러하고 국가의 흥망성쇠도 이에 따라 움직여진다. 근심과 걱정으로 변화되는 일이 아니라, 시기를 기다려 준비하고 자생력을 키울 때 변화는 가능하다.
국가가 어린 아이들의 학습의 기회를 보다 넓게 준비하고 장려하는 이유도 국가의 흥망성쇠가 오로지 지금의 어린 아이들 손에 달렸음을 아는 까닭이요,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려 애쓰는 이유 또한 그러한 까닭이다.
우린 이러한 과정을 '꿈'으로 이해한다. 꿈은 곧 희망이며 생명 잉태의 기반이 된다. 꿈을 꿀 수 있는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의 삶은 차이가 많다. 가난해도 꿈이 있는 이는 결코 비굴하지 않으며 간교함을 멀리하나, 꿈이 없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간교함으로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보다 부유한 이 앞에 서면 비굴해진다.
내 사는 고장에서 늦은 감 없지 않으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이 뚜렷한 꿈을 품은 것이다. 냇가에 산천어가 은빛 비늘 반짝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린 산천어를 풀어놓고, 마을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마을사업에 대한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장 결실을 거둘 수 있는 일 또한 아니다. 끝없이 결실의 때를 향해 노력해야 할 일들이다. 가난했던 시절 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도 엄청난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마을을 가로질러 포장도로가 만들어졌던 그 변화가 경이로웠던 것처럼, 고속도로 개통이 멀지 않은 지금 우리는 기계문명의 시대를 지나 문화와 자연에서 가치를 찾을 줄 아는 안목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문명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자연의 질서가 소중하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http://www.drspark.net의 한사 정덕수 칼럼에 동시 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