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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탐은 정보기관 고유 업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잠재적 적국으로 대상이 한정돼야 한다. 그럼에도 정보기관은 업무영역을 야금야금 확장해 이제는 자국 국민의 생활을 감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정보기관은 마음만 먹으면 한 개인의 사생활 정도는 손바닥 보듯 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 거리는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토니 스콧 감독의 1998년 작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에서 변호사 로버트 딘은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의 행적은 물론 전화통화, 신용카드 사용기록 등등 모든 것이 국가 정보기관원의 통제 하에 놓인다.

맷 데이먼 주연의 2007년 작 <본 얼티메이텀>은 정보기관의 음모가 더욱 가공할 형태로 진화했음을 그린다. 작전 중 기억을 상실한 전직 CIA 요원 제이슨 본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던 와중에 <가디언>지의 안보담당 전문 기자 사이먼 로스에게 접근한다. 마침 CIA도 조직의 누군가가 사이먼 로스에게 기밀을 누설했음을 알아챈다. 그래서 기밀 누설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이먼 로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감시한다.

영화 속에 그려진 정보기관의 음모는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국가안보'라는 신성한 교의 하에 국가 최고 권력으로부터 강력히 보호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역은 CIA에 재직했던 한 IT전문가에 의해 베일이 벗겨졌다. 이 전문가의 이름은 에드워드 스노든. 그는 지난 2013년 6월 9일 영국 <가디언>지와 인터뷰를 통해 미 국가안보국(NSA)이 '프리즘(PRISM)'이란 도·감청 프로그램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6만 1000건이 넘는 해킹을 감행했다고 폭로했다.

 루크 하딩 저,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루크 하딩 저,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 지유석

루크 하딩의 책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원제 : The Snowden Files)>는 스노든이 미 국가안보국(NSA)의 극비 문건을 입수하고 폭로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스노든의 폭로에 근거해 미·영 정보기관이 자행했던 도청 행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저자에 따르면 스노든이 폭로를 결심한 계기는 프리즘의 실체였다고 한다.

스노든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NSA가 프리즘으로 당신의 전자메일이나 부인의 전화기록 등 그 어떤 것이든 가로챌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그렇다면 그를 극한의 선택으로 내몬 프리즘은 무엇이었을까?

"한 비밀 프로그램에는 1970년대 핑크 플로이드의 명반 <달의 어두운 저편>에서 따온 로고가 붙어 있다. 이 그림은 하얀색 삼각형이 빛을 형형색색의 스펙트럼으로 분리하는 모습이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프리즘이었다. 스노든은 프리즘의 기능을 설명하는 41장짜리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유출했다. 

그중 한 장에는 실리콘 밸리 기술기업들이 NSA의 기업 협력자로 참여하게 된 날짜가 분명한 글씨로 새겨져 있다.(중략) 일급비밀 프리즘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정보기관은 이메일, 페이스북 포스트 및 인스턴트 메시지 등 엄청난 규모의 디지털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 본문 206쪽

프리즘은 영화에서나 봤던 대규모 도·감청 행각의 실체를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내줬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야후, 구글, AOL, 페이스북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IT기업들이 NSA에 협조했다는 대목은 아연실색케 한다. 이 책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는 이 같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사실을 근거로 상세히 알려준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문체다. 저자인 루크 하딩은 <가디언>지 델리, 베를린, 모스크바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했으며 가장 최근엔 모스크바 지국장을 지낸 베테랑 언론인이다. 그의 문체는 언론인다운 무미건조함이 돋보인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NSA와 영국 정보통신본부(GCHQ)가 불특정 다수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인터넷, 전화 등 모든 연락수단에 접근해 염탐을 시도했고, 이를 언론이 보도하자 미국과 영국 양국 정부가 탄압을 가했다는 것이다.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 정보기관의 음모와 이를 감싸는 미·영 양국 정부의 야비함에 치가 떨려온다. 독자가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저자는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저자는 그 어떤 감정의 개입 없이 스노든 사건의 궤적을 무뚝뚝한 문체로 기록한다.

이 책의 두 번째 강점은 사실 자체의 힘이다. 스노든은 폭로를 결심하고 믿을 만한 기자들을 선별한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사람들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로라 포이트러스와 변호사 출신으로 브라질에서 활동하는 글렌 그린월드였다. 또한 스노든의 기사가 실릴 매체는 <가디언>으로 정해졌다.

저자는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스노든의 선택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의 폭로가 <가디언>을 필두로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지 등 미영 유력 신문에 보도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알려준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흡사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같은 스파이 소설을 읽는 것 같은 흥미진진함이 느껴진다. 스파이 소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 책은 오로지 '사실'이라는 점이다. '사실' 자체가 소설의 재미를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에 따르면 스노든이 NSA의 극비문서를 입수한 과정은 비교적 수월했다고 한다. 그런데 스노든이 입수한 극비문서는 다니엘 엘스버그의 <펜타곤 페이퍼>나 줄리언 어샌지가 <위키리크스>에 공개한 비밀 전문 등 이전까지 세상에 알려진 극비문서들을 보잘것없어 보이게 만들 정도로 파급력이 강했다.

"2010년 런던에서 <가디언>이 보도한 위키리크스 폭로 문건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빼낸 미국 외교 전보문건과 전시 군수기록으로 미육군 일병 첼시 매닝이 유출한 것이었다. 이중 단 6퍼센트만이 비교적 중간등급인 '극비'로 취급되는 문서였다. 스노든 파일은 수준이 달랐다. '일급비밀' 또는 그 이상이었다. 예전에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스파이 버지스, 매클린, 필비가 변절해 소련 모스크바로 망명한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 아찔한 수준의 대량문서 누출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 본문 150쪽

보도까지 첩첩산중 

문제는 이 문서들이 세상에 공개되기까지였다. 저자는 '스노든 파일'의 기사화가 기밀문서 입수보다 더 힘들었다고 적었다. 무엇보다 스노든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정보기관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또 보도내용이 사전에 유출되지 않도록 보안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가디언>이 취한 보안 조치는 첩보 영화를 방불케 했다.

"<가디언>은 작은 '전략상황실'을 만들고 철저한 보안을 했다. 경비를 24시간 복도에 배치했다. 신분증으로 확인된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 출입이 가능했고, 모든 전화는 들여올 수 없다. 그리고 전략상황실 창문은 종이로 가려졌다. 모든 컴퓨터는 새로 마련했다. 해킹이나 피싱 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인터넷을 비롯해 어떤 네트워크에도 연결한 적이 없는 컴퓨터들이었다. 새 컴퓨터들은 내내 인터넷 미연결 상태를 유지했다."
- 본문 181쪽

보도를 가로막는 장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앨런 러스브리저 <가디언> 편집장은 스노든의 폭로가 미·영 양국의 국가안보를 해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해야 했다. 한편 보도 이후 정보기관의 표적이 될 위험성도 감수해야 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영국 <가디언> 본사는 정부의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한 번은 스노든 파일이 저장된 컴퓨터를 GCHQ 직원이 입회한 가운데 스스로 파손하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무뚝뚝함을 잃지 않았던 저자는 이 대목에서 안타까움과 불안함을 드러낸다.

"영국 정부가 주요 신문사에게 자사 컴퓨터를 박살내라고 강제했다. 이 보기 드문 순간은 반쯤은 무언극 같고 반쯤은 슈타지(구 동독 비밀경찰)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영국 정부가 행한 가혹한 처우의 정점이 아니었다. 아직도 올 것이 남아 있었다."
- 본문 199쪽

이 책은 이밖에도 미국과 영국의 언론환경의 차이점, 소셜 네트워크 등 뉴미디어의 부상에 따른 언론인의 역할 변화, 정보기관의 무차별 감청행위를 제어할 법제도 등에 대한 고민을 상세히 다룬다.

스노든, 그리고 스노든과 접촉했던 언론인들은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스노든은 러시아에 망명한 상태다. 그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저자는 그가 러시아의 포로나 다름없으며 러시아를 떠날 경우 망명자격이 취소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편 <가디언>은 영국 정부는 물론 자국 언론으로부터 '영국의 적을 돕는 신문'이라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가디언> 소속 프리랜서이며 스노든 파일을 보도한 글렌 그린월드의 애인인 미란다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 약 9시간 가까이 억류됐으며 이 와중에 스노든 파일을 저장한 컴퓨터와 USB파일을 영국 정부당국에게 압수 당했다.

NSA의 도청행각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독일이다. NSA는 구동독 시대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 슈타지를 능가하는 도청행각을 벌였다. 심지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전화를 10년 넘게 도청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독일은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를 고려해 NSA의 도청행각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스노든의 망명 신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57년간 <가디언>의 편집장을 지내며 평범한 지역신문에서 전국신문으로 격상시켰던 찰스 스콧은 "논평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Comment is free, but facts are sacred)"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사실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스콧의 격언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일들은 명백한 신성모독이다. 스노든은 정보기관의 신성모독 행위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그럼에도 '국가안보'를 이유로 신성모독은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 끝은 자유의 종말일 것이다.

"미국과 외국 시민들의 사생활에 대한 전면적인 침범행위는 미국의 국가안보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바로 그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다."
- 대니얼 엘스버그, <가디언> 기고문

덧붙이는 글 |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 루크 하딩 (지은이) | 이은경 (옮긴이) | 프롬북스 | 2014-03-10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도 송고한 글입니다.



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은 국가와 언론을 고발한다

루크 하딩 지음, 이은경 옮김, 프롬북스(2014)


#에드워드 스노든#대니얼 엘스버그#위키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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