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삶이 묻어나는 옛터를 찾아가는 날에는 절로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더욱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지 않아 본연의 아름다움이 천연히 빛나는 장소일수록 마음이 더 설레는 건 고요한 정적이 주는 편안함 때문이다. 그리고 옛사람들의 거친 숨결, 섬세한 손길, 간절한 소망이 이상스레 더 애틋하면서도 진하게 내 가슴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지난달 22일 오전 9시 10분에 창원을 출발하여 청도 대전리에 이른 시간은 오전 10시 50분께. 우리 일행은 곧바로 1300년 전설을 품은 은행나무(경북 청도군 이서면 대전리, 천연기념물 제301호)를 보러 갔다.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지난 가을의 샛노란 추억에 마냥 젖어 있는 듯한 그 나무에게 건네고 싶은 첫마디는 '잘생겼다'였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은행나무는 높이 29m, 둘레 8.5m로 우람한 덩치의 수나무이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1300년 전 마침 여기를 지나가던 한 도사가 원래 이 자리에 있던 우물물을 마시려다가 그만 빠져 죽었는데, 그 후 우물에서 이 나무가 자라났다는 거다.
여인이 등장하는 또 다른 전설은 조금 구체적이다. 이 마을을 지나던 어떤 여인이 역시 우물물을 마시려다 빠져 죽었는데, 여인 주머니에 있던 은행의 싹이 터서 자랐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마을 사람들과 함께해 왔다는 것만으로도 감탄스러운 대전리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우리는 자계서원(청도군 이서면 자계서원길)을 향했다.
아쉬운 마음 고디탕으로 달래고조선 초기의 문신이고 학자였던 탁영 김일손을 제향하기 위해 중종 13년(1518)에 지은 자계서원의 본디 이름은 운계서원으로 현종 2년(1661)에 붉은 시냇물을 뜻하는 '자계(紫溪)'라는 사액을 받았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로 사림파의 중심에 서 있던 김일손이 화를 입자 서원 앞을 흐르던 냇물이 사흘 동안이나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계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신분이 높든 낮든 누구든지 하마비 앞을 지날 때에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야 했는데, 이것은 김일손을 향한 경의와 공경의 표시로 여겨진다. 자계서원은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복원되었는데, 사원 내 영귀루와 동재, 서재가 경북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서원 문이 잠겨 있어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그저 바라보다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분도 꿀꿀하고, 갑자기 허기가 져서 청도역 주변 추어탕거리로 가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짜장면과 짬뽕을 두고 늘 마음이 오락가락하듯 이날은 추어탕과 고디탕을 두고 무얼 먹을지 자꾸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청정 일급수에서만 자란다는 다슬기를 이 지역에서는 고디라 부른다. 고디탕은 어디에서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서 부추, 배추, 애호박, 들깨가루로 맛을 낸 고디탕으로 결국 내 마음이 쏠렸다. 우리 일행 셋 가운데 연세가 여든여섯 되시는 한정국 어르신만 추어탕을 드셨는데, 역사를 전공한 김건선 선생님과 고디탕 이야기를 둘이서 맛깔스럽게 하고 있으면 고디탕을 맛보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더군다나 피리조림 반찬도 푸짐해서 즐거운 점심이 되었다.
고색창연한 대비사 대웅전에 마음을 빼앗기고
우리가 대비사(청도군 금천면 박곡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 30분께. 이번 여행에서 긴 여운이 남는 곳이 고즈넉한 이 절집으로 시끌벅적하거나 야단스럽지 않아서 참 좋았다. 대비사라는 이름은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뜻하며 지었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신라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게 된 게 인연이 되어 본디 이름인 소작갑사에서 대비갑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대비사 대웅전(보물 제834호)은 벗겨진 단청이 도리어 단아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로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꾸며졌다. 변두리기둥을 수직으로 세우지 않고 안쪽으로 기울게 세우는 안쏠림으로 건물의 안정감을 주었고, 손질을 가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 주춧돌로 삼아 둥근 기둥을 세워 놓은 게 정감이 갔다.
고색창연한 대웅전을 보고서 고승이 잠든 승탑들이 있는 부도밭으로 건너갔다. 고요 속에 잠긴 11기의 승탑들을 보니 왠지 마음이 겸허해지는 것 같았다. 불교를 억압하던 조선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대비사가 당시 상당히 큰 사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부도밭에서 나와서는 다리 아래로 흘러내리는 계곡물 쪽으로 걸어갔다. 어찌나 물이 깨끗하고 맑던지 다리를 건너지 않고 일부러 듬성듬성 있는 돌을 디뎌서 갔다.
불령사 전탑을 '천불탑'이라 부르는 이유는?
오후 3시께 청도 하루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불령사(청도군 매전면 용산리)에 이르렀다. 불령사는 호랑산 비룡골 기암절벽 아래에 위치한 절집으로 여러 문양을 돋을새김한 벽돌로 쌓은 전탑을 볼 수 있다. 반갑게도 절집 입구에서 개 두 마리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개를 좋아하기 때문에 개를 보살펴주는 절집이 항상 고맙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불령사 전탑(경북유형문화재 제472호)은 오랫동안 무너진 채 방치되었다가 1968년에 오층탑 형태로 다시 세워졌었고, 현재 있는 전탑은 2009년에 삼층탑 형태로 복원된 것이다.
불상, 불탑, 연화문, 그리고 덩굴무늬인 당초문 등이 돋을새김되어 있는데 몹시 아름다웠다. 연꽃 받침 위에 앉아 있는 불상과 불탑들 문양으로 인해 이 전탑을 '천불탑(千佛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석탑에 비해 전탑은 그 수가 많지 않다. 게다가 무늬가 있는 벽돌을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물다고 하니 불령사 전탑이 지닌 가치는 아주 크다고 볼 수 있겠다. 절집 옆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마치 부처님 말소리가 주르르 흘러내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