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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장 예검비화 채욱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예진충은 새로 합류한 요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북평(北坪: 북경)에서 상대부 어른의 명을 받고 왔소이다. 뻣뻣하게 상체를 세우고 눈으로만 인사하는 자는 자그마한 체구에 눈빛이 대꾼하고 턱이 좁상해 보잘 것 없는 인상이다. 나이는 자신보다 예닐곱 혹은 그 이상의 연배로 보였다. 그가 은화사의 패찰과 북경의 서찰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예진충은 은가에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면 발에 차이는 시정의 잡배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얼핏 보면 그는 아무런 무기도 소지하지 않은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허리에 연검(軟劍)을 두른 것을 알 수 있다.

"채욱이라하오."
"채욱이라면 예검비화(銳劍飛火)라 일컫는……?"

예진충은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잊고 놀란 눈길로 반문을 했다.

"그렇소, 강호의 허명이 지나쳐, 부담스럽소이다."
"금릉부와 강남을 떠맡고 있는 당두(榶頭) 예진충입니다."

예진충이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예검비화가 맞다면, 예진충의 마음속에 두 가지 의문이 솟아났다. 그가 과연 은화사에 적을 두긴 둔 것일까 하는 게 첫째이고, 예검비화 정도의 인물이 나설 정도로 이번의 임무가 그리 중요한 것일까 하는 게 두 번째다. 이십 년 전 예검비화 채욱은 모용세가(慕容世家), 금천보(金天堡) 같은 내로라하는 쟁쟁한 무가(武家)들을 격파하며 이름을 떨쳤다.

강호에서는 그가 곧 구대문파에 도전장을 내밀 것이며 그럴 경우 몇몇 문파는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깨진 그릇에서 물이 새듯 퍼져나갔다. 그런 그가 슬며시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십년 전쯤이다.

구대문파와의 대결을 은근히 기대했던 강호인들은 그러면 그렇지 제 아무리 예검이 비화처럼 날린다 한들 구대문파의 전통에 어떻게 감히 덤벼들겠어 미리 내뺀거지, 하며 구대문파의 편을 드는 자와 소림·무당·화산 및 한 두 문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예검비화의 검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인데 아마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구대문파가 합심하여 암습을 하거나 독으로 제압을 한 것은 아닐까 하며 음모론으로 예검비화를 두둔하는 자로 나뉘어, 괜히 자기들끼리 술좌석에서 열을 내다가 종내에는 치고박고 대리전을 치르곤 했다.   

"사천에서 온 무정도(無情刀) 동백웅(董栢雄)입니다."

옆에 있는 자는 아예 자기의 별호까지 미리 소개했다. 바싹 마른 체격에 키가 보통 사람보다 서너 치는 크다. 긴 창을 한 손에 들고 짧은 소도를 허리에 찼는데 별호에 걸맞지 않게 푸근한 인상였다. 마음씨 좋은 객점의 숙수 같았다.

예진충은 그의 별호에서 세간의 평을 떠올리려 했지만 달리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하수라거나 무공의 깊이가 얕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예진충 자신인들 강호의 명성으로만 따졌다면 은화사에서 결코 손을 내밀지 않았을 것이다. 명성으로 치자면 예진충 자신은 구대문파에서 이제 막 강호에 초출(初出)한 제자보다도 못할 것이다. 자신은 대낮의 명성이 아닌 어둠의 실력자였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앳된 인상의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경도(京都)에서 온 노량(魯亮)이라고 합니다."

화려한 복장과 화사한 얼굴이 세도가의 자제라고 절로 말하는 것 같았다. 관습적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북평 대신 경도라고 하는데서 드러나듯이 영락제 이후 부상한 화북지역 신흥 가문의 철없는 공자이리라. 생전 검이라곤 잡아본 적이 없을 것 같은데 화려한 수실과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검경이 오른쪽 어깨 위로 솟아나 있다. 예의를 갖춘다고 갖추지만 낮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세도가의 권력을 공기처럼 마시며 자란 풋내기이지 싶었다.

"상대부 어르신의 자제분 되십니다."

채욱이 나서서 노량의 신분을 밝혀주었다. 노량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위치가 만만찮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냈다.

상대부의 자제라니? 씨가 없는 환관의 자제이니 양자임이 분명하지만 환관이라고 후대의 집착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상대부 어르신이 날 믿지 못하는 건가. 저 깊은 곳에서 불쑥 솟아나는 불신의 예감이 그의 마음을 살짝 찔렀다.

예진충은 속이 편치 않았다. 이들이 금릉에 온 이유가 지원하기 위함인지 감시하기 위함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지만, 어쩌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손안에 든 떡처럼 용의자를 은화사 은가에 체포해 놓고도 침입자 하나로 인해 모든 것이 뻥 뚫렸다는 사실이 스스로 생각해도 용납이 안 되었다. 한번도 있은 적이 없는 실수였지만 있어서도 안 될 실수였다. 그 생각만하면 뼈골이 쑤셨다.

이런 차에 상대부의 직접 명령을 받고 온 자들이 왔으니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 쓰라림이 더했다. 한 명은 자신보다 십년은 연배인데다 무위(武威)의 명성도 높고, 다른 하나는 풍기는 내력이 심상찮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상대부의 양자라고 했다. 조정의 대신들조차 눈치를 보는 태감과 더불어 숨을 실력자라 일컫는 상대부 노순광의 자제라면 당연히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위치는 어떻게 되나. 예진충은 이들과 같이 일을 해나가기 위해 해결해야할 서열을 짐작해 보았다. 은화사는 지역별 책임자만 두는 점조직 형태로 되어 있어 상대부의 명령 외에는 어느 누구도 조직의 위계를 알지 못했다. 밀리면 안 된다. 경우에 따라선 무공의 수위를 겨루는 한이 있더라도 미리 한풀 죽고 들어가선 안 된다. 예진충은 마음을 꽉 눌렀다.

"아시다시피 은화사 금릉지부는 강남은 물론 정주와 개봉 등 화북 일부 지역까지 책임지고 있습니다. 고명하신 여러분께서 저보다 무위가 높으시더라도 위임된 권한에 의거해 저의 결정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예진충이 먼저 선수를 날렸다.

"그건 염려할 바가 못 되오. 상대부 어르신께서도 저희에게 이번 일의 재량은 모두 예 당두에게 있다고 확실히 해두셨소."

채욱이 처진 눈꼬리를 더욱 처지게 하며 예진충의 염려를 일소시켜 주었다.

"상대부 어르신께서는 이번 일에 무척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무극진경을 손에 넣으면 강호인들을 움직일 수가 있고, 그로인해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어르신께서는 과거 서창의 영광을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예 당두께서도 보다 심혈을 기울여 달라고 출발하기 전 아버님이 저에게 거듭 당부셨습니다."

노량이 참기름을 한 사발 들이킨 듯 매끈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예진충은 합류한 세 명의 인사에게 모충연의 사망 소식과 제자 서생을 연행해 심문하던 중 웬 괴한의 침입으로 서생이 탈출을 하고 금릉성을 교묘히 빠져나가 소주에 갔다는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예 당두는 애초에 모충연의 사망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예진충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채욱은 마치 심문관처럼 물었다.

"제가 북평에서 금릉으로 온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무극진경의 행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두 달 전 상대부 어른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항주의 서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예전부터 암암리에 진경의 소재를 추적하고 있었는데, 그 일환으로 비천문 사대 제자의 동태를 쭉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서호에서 셋째 제자 장강편운 습평이 낚시하던 배에 불이 나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저희가 시체를 건져내 조사해보니 무공이 상당한 고수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습니다만 우리는 굳이 소문을 뒤집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제자들을 지켜보기로 하고 저는 금릉으로 와서 첫째 제자 모충연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나고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모충연이 기습을 당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 요원이 부랴부랴 달려갔지만 모충연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습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임종 시 곁에 있었다는 서생이라도 연행해 온 것입니다."

"연락은 누구한테요 온 겁니까?"
"비영문의 장문인입니다."
"그럼 장문인도 우리 은화사에 적을 두고 있는 자인가요?"
"아닙니다. 예전에 포섭해 놓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자칫하면 발설된 가능성도 있겠구료."

채욱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치해놓겠습니다."

예진충이 단호하게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무위도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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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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