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5주년을 기념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 대회의실에서 단국대학교, 광복회, 독립기념관의 공동주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카이로선언'이라는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단국대, 독립기념관과 함께 이번 학술회의를 주최한 광복회의 박유철 회장은 축사를 통해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선언한 국제회의로서 그 의미가 우리 민족에게는 매우 컸다. 그러나 이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의하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고 밝혔다. 박 회장은 "그 결과, 지난해 모 언론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검증되지도 않은 사실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온갖 추측에 의한 가설이 난무하여, 자칫 카이로선언의 역사적인 가치마저 훼손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고 있다"며 이번 학술회의를 열게 된 구체적인 계기를 설명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의 '카이로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를 시작으로, 이재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공동관리안 반대운동', 이상철 일본 류코쿠대 사회학부 교수의 '장제스 일기로 본 카이로 회의', 조덕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연구원의 '카이로회담의 교섭 및 진행에 관한 연구',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의 '카이로선언과 연합국의 대한정책'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
김구의 공인가, 이승만의 공인가카이로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3년 11월 27일에 미국의 루스벨트와 영국의 처칠 그리고 중국의 장제스가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채택한 선언으로, 종전 후 일본 문제에 대한 연합국 측의 처리방안을 합의한 것이었다. 특히 이 선언에서는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하여 한국의 독립이 최초로 보장됐다.
지금까지 카이로선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중국 국민당 총재 장제스를 만나 설득한 결과, 장제스의 건의로 한국독립 보장 결의가 삽입된 것이 정설처럼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일부 학자들이 카이로선언의 한국 독립 결의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스벨트가 처음 제안하고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루스벨트가 한국독립 문제를 거론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꾸준히 전개했던 외교적 활동의 성과라며 '김구-장제스 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여기에 발 맞추어 보수 언론들이 '이승만-루스벨트 설'을 기정사실인 양 보도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한시준 교수, 중국 측 사료 발굴로 '김구-장제스 공(功)' 재확인하지만 이날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한시준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는 장제스의 비서장으로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중국의 왕충후이가 직접 장제스-루스벨트 만찬 회동 내용을 작성한 '카이로회의 일지'를 비롯하여 새로 발굴한 중국 측 사료들을 바탕으로 보수언론과 학계의 '이승만-루스벨트 설'을 재반박했다.
한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은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이미 군사위원회와 국방최고위원회 두 기관을 통해 중국이 제의해야 할 문제들을 정리해 두었고, 여기에 '한국의 독립문제'가 들어가 있었다. 국방최고위원회가 작성한 준비사항 중 '한국의 독립'에 관한 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중-미-영-소는 즉시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거나 조선의 전후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발표한다. 기타 연합국가는 동일한 보조를 취하도록 요청한다."즉, 중국 측은 이미 회담 전부터 한국의 독립 문제를 카이로선언의 중요의제로 선정해 놓고, 상정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그리고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문제는 공식회의가 아닌 회의 종료 후 저녁에 열렸던 장제스와 루스벨트의 만찬에서 처음 논의됐다. 이 자리에는 장제스와 통역을 맡은 그의 부인 쑹메이링, 그리고 미국의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 등 4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으로 하여금 자유독립을 획득하도록 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이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는 장제스-루스벨트 만찬 회동 직후 왕충후이가 작성한 카이로회담 일지에 들어있다. 만찬 당시 이루어진 회담에 대해 중국 측은 기록을 남겼으나, 미국은 특별히 기록해놓은 것이 없다. 이에 미국 측은 1956년 카이로회담의 기록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기록이 없음을 알고, 중화민국(타이완) 정부에 자료문의를 했고, 중화민국 정부는 당시 대담기록을 영문으로 번역해 미국 측에 제공했다.
한 교수의 발표에 대해 지정 토론자로 나선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카이로회담의 현장 모습을 생생히 담아낸 1차 사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정확한 시선으로 분석했다"고 평가했다.
또 "발표대로라면 이승만의 노력과 미국의 지원 덕분에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조항이 포함되었다는 주장은 허황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을 펼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맞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회담 준비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 문제 상정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회담을 앞두고 이승만이 루스벨트에게 한국 문제를 부탁한 일이 있는지가 확인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승만과 루스벨트의 주도나 기여에 대한 주장을 뿌리째 뽑아내야 할 이야기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날 '장제스 일기로 본 카이로 회의'라는 주제로 발제한 이상철 일본 류코쿠대 사회학부 교수는, 직접 발굴한 장제스의 일기에서 장제스가 한국 독립에 관한 문제를 먼저 제시하였다는 기록을 찾아내 공개했다.
그에 따르면 장제스는 1943년 11월 24일자 일기에 전날 밤, 루스벨트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조선독립 문제에 대해 나는 특별히 루스벨트의 중시를 끄는 데 힘을 넣었다. 나는 루씨한테 (조선문제에 관한) 나의 주장에 찬동하고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이처럼 장제스 본인 역시 자신의 일기에서 한국(조선)의 독립 문제를 자신이 주도적으로 건의했고, 루스벨트가 자신의 건의에 동의하도록 설득했음을 밝히고 있다.
장제스 움직인 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그렇다면 장제스가 이토록 한국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고 루스벨트를 열심히 설득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장제스를 움직인 건) 바로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공로였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임시정부 요인들은 당시 미국과 영국 등이 주장하고 있는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관리' 문제에 대해 중국이 반대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에 대해 건의하고자 중국 국민당의 실세였던 장제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43년 7월 26일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원봉 등 임시정부 요인 5명이 장제스를 접견했다. 그리고 중국 측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장제스의 면담기록을 '총재접견한국영수담화기요'라는 제목으로 기록해놓았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인들이 한 마음으로 단결하고 노력해 복국운동(독립운동)을 완성하기 바란다"는 장제스의 말에, 김구와 조소앙은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장래 지위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자고 주장한다. 바라건대 중국은 이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하여 주기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결국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한국독립을 보장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발제를 맡은 한시준 교수는 "이러한 논란이 일어나게 된 까닭은 카이로회의가 갖는 중요성에 비추어 지금까지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자료만을 근거로 하여 연구를 진행함에 따라 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라며 보다 다양한 사료를 발굴해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 주장했다.
종합토론의 좌장이었던 장석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역시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밝혀진 역사적 진실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