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 나오면 뭐 하고 싶었어요?""꽃구경이요. 그리고 결혼도 하고 싶어요."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장애와 가난으로 27년간 시설에 갇혀 살았던 쉰세 살 송국현씨의 소박한 핑크빛 꿈은 7개월 만에 그가 선택하지 않은 죽음으로 끝났다. 살아서 꽃 구경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그는 화려한 꽃으로 둘러싸인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송국현씨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던 활동가는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내내 목이 메였다.
지난 13일 오전 10시 50분경, 송국현씨가 생활하던 서울 성동구 소재 자립 체험 홈 거실에 불이 났다. 언어장애와 지체장애가 있던 국현씨는 타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도움을 청할 수도, 불길을 피할 수도 없었다(중복3급 장애인인 국현씨는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데도 활동보조 지원을 받지 못했다-편집자 주). 집주인이 연기를 보고 119에 연락을 했고, 국현씨는 얼굴과 팔 등에 3도의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중태였다(관련 기사 :
집에서 불이 났는데... 왜 119 신고를 못 했을까).
16일 병원에서는 급성 폐렴, 폐부종 등 호흡기에 복합적인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다. 16일 오후 9시쯤, 의사가 산소 호흡기를 떼는 연습을 해야 한다며 호흡기를 30분쯤 빼고 산소 마스크를 씌웠으나 상태가 악화돼 산소 호흡기를 다시 끼웠다.
17일 새벽, 신장까지 문제가 생겨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새벽 다섯 시쯤 '상태가 악화되어 소생가능성이 없다. 심장박동이 멈췄을 때 심폐소생술 실시여부를 결정을 하라'고 했다. 심폐소생술 시 회생 가능성은 희박하고 갈비뼈가 부러져 다른 장기를 손상시켜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사실도 전했다.
오전 5시 30분 간호사가 나와서 국현씨의 심장이 멈추었다며 심폐소생술을 할지 결정하라고 했다. 심폐소생술로 살아날 가능성을 물으니 거의 없다고 했다. 고통이나 덜하게 보내주기로 하고 심폐소생술은 시도하지 않았다. 17일 오전 5시 40분. 국현씨는 그렇게 고단한 이생의 삶을 접었다.
7개월 전, 시설을 나와 자립 생활을 시작한 국현씨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런 국현씨한테 야학에서 잘 보이고 싶은 선생님이 생겼다. 여간해서 돈을 잘 쓰지 않는 국현씨가 야학 선생님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십만 원을 들여 새 옷, 새 운동화를 사고 이발까지 하고 야학에 갈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국현씨는 끝내 새 옷을 입은 모습을 야학 선생님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국현씨의 자립을 도와주던 활동가가 찍은 사진 속에서 새 옷을 입은 국현씨는 행복하고 천진한 모습으로 웃고 있다.
쉰세 살, 결혼하고, 꽃구경 가고 좋아하는 나들이를 맘껏 해보고 싶었던 국현씨는 장애 3등급이라는 이유로 꿈을 펴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죽음을 맞아야 했다.
"국현씨의 마지막 길만큼은 사람답게" 노들야학에서 그림을 함께 그리는 미술교사 민은 송국현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국현씨를 처음 본 느낌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사람들이 많은 데서 함께하는 것을 무척 힘들어 했어요. 그래서 수업에 잠깐 있다 가곤 했는데 또 볼 거니까 하며 가도록 내버려 뒀어요. 그런데 그 웃음도 눈인사도 더 이상 나눌 수 없게 됐네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요구합니다. 3등급 배지 돌려줄 테니 국현씨 우리에게 돌려주세요. 그럴 수 있나요? 난 국현씨의 죽음은 그 견디기 힘들었을 뜨거운 불길 때문이 아니라, 꽁꽁 언 차가운 마음을 지닌 당신들, 얼음장 같은 머리를 지닌 당신들의 그 냉담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례식장에는 구청장, 보건복지부 과장, 국민연금 관계자, 국회의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다녀갔다. 국현씨 곁에서 함께 했던 이들은 그들의 뒤늦은 조문과 호들갑이 반갑지 않다. 절박한 심정으로 문을 두드렸을 때 도움은커녕 경찰 방패와 회피로 일관했던 그들이 죽음 앞에서야 손을 내미는 척 하는 것이 마뜩찮기 때문이다.
빈소를 지키며 밤을 새우는 장애인 활동가와 동지들은 다짐한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제2의, 제 3의 김주영, 송국현이 나오지 않도록 사과와 대책 마련에 대한 다짐을 받겠다고 말이다.
이른바 '송파 세 모녀'의 죽음 때 박근혜 대통령은 말했다. "제도가 있는데 제도를 잘 몰라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생긴 비극'이라고. 하지만 장애인들은 항변한다.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려고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렸지만, 제도권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들은 다짐한다. '3등급'이라서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살다 억울하게 죽어 간 국현씨의 마지막 길만큼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대접해 보내겠다고. 그것은 그에게서 장애인 3등급의 꼬리표를 떼어주는 것이다. 반드시 장애인 등급제란 주홍글씨를 떼어내고 사람답게 살겠다고.
장애인이라고 해서 그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육 당해도 좋은 존재가 아니다. 시설만이 아니라 시설 밖 사회에서도 그들이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뒷받침이 있어야 장애인도 차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양의무제와 장애인등급제를 폐지해야만 하는 이유다.
4월의 눈꽃속에 정처없이 떠나셨나요
이승에서 5월의 꽃은 필 것이고
신록은 우거질텐데
이 세상을 다 보지 못하고서
남은 이들의 이 억울함을 어찌 다 풀라고
서둘러 가셨습니까.
국현 동지
우리는 아직 보내 드릴 준비가 덜 되었어요
야만스런 세상에서
당신의 언덕이 되었어야 할
가족이 밀어내고
이 눔의 국가에 거부당했는데
당신은 외치고픈 말을 다하지 못한 채
하고픈 걸 다하지 못한 채
뜨거운 불길 속에서
당신이 붙잡을 끈이 아무 것도 없이
가는 길마저 두려움과 고통이었을
그 삶의 무게에
비통하고 비통합니다.
꽉 막힌 담벼락 안, 시설에서
먹먹하게 살았을 27년의 세월을
이제야 위로받고
자유롭게 살아보자 했는데...
소중한 생명에 대한
당신의 존재에 대한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할까요
타지 않은 깊은 슬픔 어찌할까요
당신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아주 큰 의미가 되어
삶을 나누려 이토록 애쓰고 애썻는데
어찌 가시렵니까.
이대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별의 슬픔이 낳은 눈물은
갈수록 더 빛이 될 것을 알기에
당신을 보낸 자리에서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촛불을 듭니다.
잔인한 4월의 비람 속에 길 떠나야 할
국현 동지,
우리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람입니다.
누구도 감히 당신을 한줌 먼지로
쉬이, 흔적 없이 지워버릴 자격은 없습니다.
당신의 자기결정을, 사람답게 대우해줄 것을,
좁다 좁은 차디찬 안치실에서도
우리를 향한 뜨거운 눈길이 있음을
우리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마지막 가는 길은
당신이 사람으로서의 예를
다 받을 수 있도록
애통한 마음들이 촛불을 밝힙니다.
언제라도
4월의 바람으로 다시 오십시오.
우리에게.
언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