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마지막으로 카톡하고 없어지지 않는 '1'이 너무 마음 아파."굳게 닫힌 가게 셔터가 색색이 종이로 물들었다. 맨 바닥부터 3m 높이 꼭대기까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쪽지가 붙었다. 자리가 모자라 간판 바로 아래 지붕에도 쪽지가 붙었다. 이들은 모두 한 사람을 간절하게 부르고 있다. 지난 15일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그는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강아무개군이다.
한 친구는 자신이 강군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를 확인해서 그 옆에 붙은 숫자 '1'이 얼른 사라지기만 기다린다. 중학생과 초등학생 동생들도, 동네 아주머니도 같은 마음으로 쪽지를 남겼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청해진해운 소속 세월호가 침몰한 지 닷새째인 20일 오후. 다수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단원고가 있는 경기도 안산은 도시 전체가 슬픔에 잠긴 듯했다. 거리 곳곳에는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현수막이 붙었고, 번화가 상점들도 음악을 끄거나 크게 틀지 않았다. 부활절을 맞은 교회에서도 생존자를 기다리는 기도를 올렸다.
안산시민들은 슬픔에 빠져 침묵만 지키진 않았다. 강군에게 응원의 목소리를 모은 것처럼 서로 위로하고 스스로 희망 찾기에 나선 것이다.
마트 뒤덮은 희망 메시지... 안산 시민들 '성지'로강군 부모님이 운영하는 'A마트'는 고잔동에 있는 단원고에서 차로 10여 분 걸리는 월피동에 있다. 이곳에 '단원고 우리 ○○ 이를 지켜주세요'라고 한 자 한 자 적은 A4용지 14장이 붙은 것은 지난 17일. 강군 부모님이 가게 문을 닫고 사고 현장으로 급히 내려간 다음날이었다.
그날부터 A마트 셔터에는 접착식 메모지가 붙기 시작했고, 사흘 만에 시민들의 응원 메시지로 가득 찼다. 가게 문 앞에는 누군가 펜과 메모지를 매달아 놓았고, 휴일 오후 학교에 가지 않은 동네 아이들이 자원봉사자가 돼 글을 남기려는 사람들을 도왔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니. 살아 돌아와서 웃는 얼굴 보여줘. 동네 아줌마가.""○○아 나 이 슈퍼 자주 다니는 고2야. 너랑 친구네? 보지는 못했지만 같은 나이니 친구지. 너는 꼭 돌아올 거야. 난 믿어. 꼭 살아서 우리 한번 웃으며 인사하자." "아주머니가 돌아오실 때는 꼭 ○○이 오빠랑 같이 손잡고 오시면 좋겠습니다.""너랑 냉면 먹고 온 지 며칠 됐다고 갑자기 이러니까 실감이 안나. 실감이 안 나는데 너는 왜 옆에 없냐. 빨리 돌아와서 나한테 냉면 사주라."
강군을 비롯해 실종된 단원고 학생들을 향한 시민들의 응원과 위로 메시지는 A마트뿐 아니라 시내 곳곳에 모이고 있었다. 안산 단원구에서 가장 번화가인 지하철 4호선 중앙역 인근에도 시민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희망의 메시지를 남겼다. 중앙역 건너편 작은 광장에는 '생때같은 아이들아 어서 우리 품에 돌아오라'라는 현수막이 걸렸고, 그 옆으로 시민들이 손으로 쓴 편지가 줄로 엮여 걸렸다. 시민들은 글을 남기고 또 사진을 찍어 SNS을 통해 주변의 동참을 유도하기도 했다.
연인과 함께 응원 메시지를 남김 김아무개(29·남)씨는 "며칠 동안 마음이 공허하고 힘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희망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니 조금 편해졌다"라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생존자가 없을 거 같다는 걱정도 하지만 희생자 가족들에게 힘이 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한산한 번화가·텅 빈 운동장... "장사 쉬고 싶었다"중앙역 번화가에서는 세월호 침몰로 인해 참담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주말에다 날씨도 좋았지만 거리는 한산했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중앙역 인근 대로변 대형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김아무개(21·여)씨는 "평소 주말 오후보다 손님이 적고, 거리도 한산한 편"이라며 "주문을 하는 동안에도 뉴스를 보거나 자리에 앉아서도 단원고 학생들을 걱정하는 손님이 많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또 "그동안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는 않았지만 요 며칠은 더 볼륨을 줄였다"라며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많이 심란해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24시간 문 여는 식당을 운영하는 박아무개(44·남)씨는 "금요일 저녁부터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라며 "나도 마음이 아파서 장사가 잘 안 된다고 누굴 탓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점상인 윤아무개(53·여)씨도 "장사를 하루 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라며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왔지, 가까운 사람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다는데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거리에서 만난 대학생 변아무개(25)씨는 "안산이 크지 않은 동네다 보니까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며 "남일 같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조 과정에서 정부의 대응과 언론의 오보가 논란을 일으키는 것과 관련해 "사람들이 정부와 언론에 대한 불신이 쌓여가는 것도 심각한 문제"라며 "술자리에서도 사람들이 다 그 이야기뿐이다"라고 말했다.
주말 안산시민들이 자주 찾는 호수공원에는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온 모습이 적잖이 보였지만, 인근 체육공원은 평소와 달리 텅 비어 있었다. 평소 주말 오후면 사람들로 북적였을 축구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원 관리자는 "주말에는 축구장 3개가 쉼 없이 돌아가기도 하지만 이번 주는 잡혀 있던 조기축구회나 체육대회 일정이 거의 다 취소됐다"라며 "학생들이 죽고 또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슬픈 부활절... "안산은 위로할 수 없는 지경" 단원고에 다니는 교인 자녀 8명이 실종 상태인 고잔동 안산제일교회 부활절 예배는 어느 해보다 차분했다. 이 교회 담임인 고훈 목사는 이날 설교에서 "기독교인에게 부활절은 가장 기쁜 날인데 250여 명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 온 세상이 울음바다가 되고 있다"면서 "사랑하는 자식이 바다 속에 있는데 어떻게 위로가 되겠나, 안산은 지금 위로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세월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흐느끼는 교인들로 예배당 분위기는 푹 가라앉았다. 시인이기도 한 고 목사는 세월호 탑승객을 기리며 지은 "생존자는 살아 돌아오게 하고 잠자는 자는 부활로 돌아오게 해달라"라는 내용의 시를 직접 낭송하기도 했다.
이 교회 교인 가족 가운데 세월호에 탑승한 단원고 학생은 모두 10명이다. 세월호 승무원 고 박지영씨에게 구명조끼를 건네받은 고아무개군만 구조됐을 뿐 1명은 사망했고, 나머지 8명은 실종 상태다. 교회 앞에는 실종 학생들의 생환을 비는 쪽지를 붙이는 게시판이 마련됐다. 특히 평소 조아무개양, 홍아무개군 등과 함께 교회 고등부를 다닌 학생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아 언니야... 춥지 얼른 와 보고 싶다... 언니가 오면 맛난 거 많이 사줄게.", "○○ 배안에 추운데 괜찮니? 나 너 완전 보고 싶어... 빨랑 나와. 나 너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평소 학생들이 주일 예배를 보던 지하 교당에선 요즘 저녁 9시면 단원고 학생들과 실종자들을 위한 기도 모임이 열리고 있다. 사고 첫날인 16일 저녁에는 100여 명이 모였지만 며칠 사이 참석자가 500여 명으로 불었다고 한다. 교회에서도 실종 학생 부모들이 진도에 내려간 사이 혼자 남은 자녀들을 돌보는 한편, 이번 사고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교인과 학생들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도 고민하고 있다.
이 교회 교육부를 맡아 평소 실종된 학생들을 잘 알고 지낸 박병주 목사는 "어른은 고통을 소화할 수 있지만 청소년 시기 학생들은 민감하다"면서 "특히 실종 학생들과 함께 찬양대 활동을 했던 학생들의 충격이 크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실종된 김아무개군을 10년 동안 혼자 돌봐온 할머니는 식사도 거르고 있어 직접 먹여드렸다"면서 "나 역시 자식 같은 애들이어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비통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