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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비지배를 꿈꾸는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책표지비지배를 꿈꾸는 현실주의자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 민음사
마키아벨리를 바라보는 항간의 시선은 '냉혹한 정치가'나 '엘리트주의자', '처세주의자'가 주를 이룬다.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써내려간 그의 저작 때문이다.

그가 그려낸 지도자에게선 어떤 미덕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강력한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도 한다. 어질고 도덕적인, 어쩌면 조금은 유약해서 인간적인 군주가 이상적이라 여기던 기존의 관념을 깨버렸다. 와장창.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를 쓴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은 이런 인식이 오해라고 항변한다. 오히려 시민들의 자유가 실현되길 바라던 현실주의자라고도 표현했다.

거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군주론>도 이런 오해에 한몫했으며, 올바른 제목은 <군주>라고도 바로잡았다.

마키아벨리의 의도가 우리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것도 운명의 장난이다. 1532년 안토니오 블라도가 교황 클레멘스7세의 허가를 받기 위해 제목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수정을 가한 후, 최초의 라틴어 제목이 지금의 '군주'로 바뀌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식 번역을 따라 '론'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귀치아르디니의 <회상록>이 <신군주론>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는 기이한 현상에서 보듯, 우리는 <군주>로부터 '권력' 또는 '처세' 외에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입견을 같게 된 것이다. - 137쪽

'힘'과 '시민적 자유'는 상충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정치를 '힘'과 '공포'로만 정의하려했다면,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란 전제를 내세울 수 있었을까. 그는 오히려 '시민'이나 '신민'과 함께 시대적 상황을 구성해 가는 지도자의 능력을 요구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어떤 지도자의 품성이 이상적인지도 말하지 않았으며, 어떤 상황에 어떤 지도자가 적합한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시민을 살피라고 말했다. 시민들이 완전히 부패했다면, 절대적인 권력을 사용하라는 것. 바로 이런 견지에서 그가 말했던 힘과 처세가 탄생했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에게 자유가 보장된 사회 혹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시민들에게 복종보다는 힘과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능력을 먼저 보장하라고 주장한다.

그는 '힘'과 '시민의 자유'가 결코 상충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누구보다 확고하게 가졌던 최초의 정치철학자였다. 또한 '시민적 자유'를 '공동체 존속'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하는 '공화주의'의 이상을 공유했다.

마키아벨리는 침묵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고 했을까? 바로 민주적 리더십이다. 여기에서 민주적 리더십이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인민과 귀족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지도자의 능력을 말한다.

또한 계층 사이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기보다, 인민의 정치 참여가 중요한 시대에 자각을 수반하는 지도자의 통찰력을 말한다. - 120쪽

그의 충고는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요즘 오히려 더 절실하다. '모든 것을 안다'는 닫힌 마음보다 '모든 것을 한 번 의심해 본다'는 열린 마음을 가질 것. 하나의 잣대가 아니라 여러 잣대가 동일한 사안과 현상에 적용될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공존의 가능성을 파괴하기보다 그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의 시대와 지금의 일상은 너무나 닮아있다. 저자의 지적대로라면, 메디치 가문이 사라지고 불어 닥친 위기에 갈팡질팡하던 피렌체와 민주주의가 보편화됐지만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는 오늘날은 유사하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스스로 관리하기에 급급한 생활 속에서 점차 개인화되어 가는 시민, 무한경쟁과 극도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절망만 안겨 주는 시장, 사건마다 즉흥적으로 형성되는 여론이 시민적 열정을 제도의 개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소진시켜 버리는 광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도덕률만을 고집하며 회랑과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대중 정치인, 이 모든 것이 피렌체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 156~157쪽

결국, 저자가 책을 통해 주창하는 마키아벨리의 주된 논점은 '비(非)지배'다. 책에 따르면 자유가 '타인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 즉 '비지배'를 포괄하기 시작한 시대는 로마공화정 때다. 로마인들은 자유를 '시민들이 향유해야 할 최소한의 정치사회적 조건'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비지배'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저자가 새삼 생소한 개념을 주창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다만 저자의 지적대로, '비지배'를 시민적 자유의 내용으로 설명하는 방식, '비지배'를 자유로운 공화정체의 원칙으로 설득하는 이유, 그리고 '비지배'를 시민의 힘으로 구체화하려는 의도를 꼭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저자가 '비지배를 꿈꾸는 현실주의자'로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자고 주장하는 의도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고수하기 위한 원칙, '가능성의 평등'

아울러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한 가지 주제를 덧붙인다. 먼저 지그문트 바우만의 발언을 소개했다.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관적이며, 자신감에 차고, 활기찬"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심해 더 이상 민주적 절차로 풀어 갈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는 지적. 결국 불평등의 심화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민주주의' 그 자체다.

따라서 개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공선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는 자유주의의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서라도, '성공할 기회'뿐만 아니라 '비지배'의 조건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균등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결론을 돌출한다.

마키아벨리는 평생 귀족적 특혜로부터 배제된 정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살았다. 부유층에 대한 분노의 응어리, 절망을 담은 개탄의 목소리가 주변을 휘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질시나 선동을 발견할 수 없다. 그 대신 로마공화정이 내세우던 '탁월성'에 자기가 꿈꾸는 공화정의 '가능성'을 결합 시키려는 부단한 몸짓만이 발견될 뿐이다.

이런 마키아벨리를 다시 조망하는 것이 지금 우리를 둘러싼 자조 섞인 비관적 현실주의를 정치적 설계로 극복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앞으로 정치인들은 마키아벨리를 배울 때, 오해에서 비롯된 '힘'이나 '처세'를 자기 편할 데로 해석하기보단 진정한 '군주'를 읽어야 할게다.

덧붙이는 글 |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곽준혁 지음 / 민음사 / 2014.03 / 1만7500원)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 비지배를 꿈꾸는 현실주의자

곽준혁 지음, 민음사(2014)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곽준혁#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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