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에서 14일(한국시각)까지 펼쳐진 영국 프리미어리그 경기는 다소 늦은 시간부터 중계되었다. 경기는 정각, 30분, 45분에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기간에는 평소보다 7분 미뤄진 시간에 시작된 탓이었다.
이는 1989년 4월 15일에 벌어진 힐스보로 참사 25주기를 기리는 행사를 진행하기 때문이었다. 힐스보로 참사는 25년 전 영국의 도시 리버풀 지역에서 열린,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FA컵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진입하던 도중 경기장이 무너져 96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준결승전을 경기장에서 직접 보려는 사람들이 대거 몰리면서, 당시 힐스보로 경기장 수용인원을 초과할 정도로 너무 많은 시민이 입장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는 축구계에서 가장 큰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잊지 못할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영국은 경기장 내 입석제도를 폐지하는 등 관중 입장 관련 정책을 바꾸기도 했다.
사고 당시에는 영국 정치인들이 축구 팬들의 안일한 질서의식을 맹렬하게 비난했으나 최근 새로운 증거를 통해 '영국 경찰의 통제 소홀'이 직접적인 사고원인이었다고 지적되었다. 이에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 총리가 보수당 대표로 국민들에게 사과한 바 있다.
영국 축구계는 올해뿐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여러 차례 '힐스보로 참사'를 추모하는 의식을 해왔다. 선수와 관중들이 경기 직전 묵념을 하고, 팔에 애도의 뜻을 담아 검은 띠를 두르기도 한다. 경기 시작이 다소 지연되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분위기가 너무 우울하지도 않으며, 다만 "96명의 죽음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매년 이어가는 것이다.
쉽게 잊은 참사, 반복해서 사고 낳았다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 최근에는 대학생 OT 도중 리조트 붕괴와 세월호 침몰 사건까지.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배경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겠지만, 안전불감증을 낳는 '망각'이 가장 치명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다들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돌아보면 매번 벌어진 사고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가 이루어졌다. 사건은 대대적으로 언론에서 보도되었지만, 구체적인 원인은 대략 짧게 설명한다. 그보다 '몇 일 만에 구조된 피해자' 같은 자극적인 장면이나 '사망자 수'가 더욱 부각하곤 했다.
국민적인 분노를 잠재울 누군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사태가 마무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시설을 재정비한 사례도 있지만, 안전교육이나 재난관리 시스템 구축은 귀찮은 일로 여겨지거나 예산편성에서 소외되는 일이 잦았다. 그 결과로 대형사고의 악순환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는 'G20 정상회의'나 올림픽 유치 같은 긍정적인 소식만 크게 홍보하며 사고는 아예 '잊어야 할 불편한 기억'으로 치부했다. 이러한 태도는 천안함 사태 당시 구조에 참여했다가 침몰한 어선에 대한 초라한 대우를 보더라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 나라의 국격이란 업적으로 여겨질 행사 뿐만 아니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이를 수습하는 과정과 잊지 않으려는 노력에서도 드러나는 것인데도 말이다.
25년 지난 힐스보로 참사 기억하는 영국, 한국도 배워야영국은 끔찍한 기억을 잊지 않고 매년 되새긴다. 입 안에 생긴 상처만 해도 혀로 무심코 건드리면 그 통증에 소스라치게 되는데, 96명이 사망한 큰 사고는 오죽할까. 그럼에도 리버풀 축구팀을 비롯한 많은 영국인은 힐스보로 참사와 그 사망자들을 결코 무심하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는 분명 피해자를 애도하면서 동시에 안전불감증으로 인해 같은 유형의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유쾌하지 못한 사건을 계속 끄집어내는 일은 분명 용기와 책임감이 뒤따를 것이기에 힐스보로 참사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는 조용한 박수를 받을 만 하다.
25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대형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영국의 태도를 한국도 배울 필요가 있다. '설마 큰일이 생기겠어' 하는 개인의 생각이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되어 참사를 낳은 역사를 이제 끊어내야 한다. 이는 국민들에게 직접 사과한 영국 총리와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보여준 '책임감'이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지만, 단순히 '개인의 의식개선' 같은 차원의 문제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지방의 각 단체들은 그동안 소홀했던 안전교육과 재난관리 시스템 마련에 더욱 예산을 쏟아야 한다. 형식적인 점검도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속으로 감시하고 검토하려는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하자. 영국의 리버풀이 96명의 희생자를 모두 기억하며 지난 25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두 번 다시 무고한 이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는, 그 변화가 바로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정치인부터 경찰과 시민들까지, 말이 아닌 모두의 행동이 필요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