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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장 음모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無爲刀 ⓒ 황인규

박주(亳州)는 의성(醫聖) 화타(華陀)의 고향이다. 의성의 고향답게 약령시장이 크게 열리고 있다. 중원의 온갖 약재는 박주에 모여 그 약효를 검증 받고 용법을 널리 알린다. 그래서 약재상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박주의 약령시장에 들린다. 약재상들이 약령시장에서 약재를 보고 나면 다음으로 들리는 곳이 사당이다. 박주에는 특이하게도 화타의 사당이 있다. 다른 지역이라면 관왕묘가 있을 법한 자리에 의성묘 혹은 화타묘가 있는 것이다. 고장마다 관왕묘가 여럿 있듯이 박주 역시 화타사당이 여러 개 있다. 매번 지역의 세도가가 그들의 유세를 드러내기 위해 사당을 새로 지으면, 이전의 사당은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져 마침내 누구도 찾지 않게 된다. 그러면 그곳은 거지들의 소굴이 되거나 혹은 폐가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만다. 

약령시장에서 북쪽 주흘산 쪽으로 십여 마장가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화타묘가 몹시 아픈  듯 기우뚱하게 서있다. 의성 화타가 살아난다 해도 사당을 바로 세울 순 없을 것 같다. 보름을 며칠 앞둔 달은 임산부처럼 배불뚝이 모양이다. 임산부의 배를 걷어찰 것 마냥 사나운 구름 하나가 매섭게 다가오더니 마침내 달을 삼키고 만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숲속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화타묘의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사당 안에는 겉보기와 달리 제단 쪽으론 바닥이 고르고 벽도 옹골차게 버티고 있다. 검은 인영이 걸어가는데도 구멍이 숭숭 뚫린 오래된 마루는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발끝이 무슨 애무의 손길인 양 흐윽 흐윽 교성을 흘리고 있다. 그만큼 검은 인영의 발걸음은 예사롭지 않았다.

검은 인영이 제단을 향해 말했다.
"바쁜 몸이오. 전서는 꼭 필요한 때에만 전해주길 바라오."
메마르고 딱딱한 말투다.

"중간보고는 당신의 의무요. 소주에서 다음 소식이 없길래 전서구를 날린 것이오. 소주에서는 어떤 결과를 얻었소?"
예의 높낮이가 없는 변성한 목소리가 제단 뒤에서 흘러나왔다.

"정주로 가고 있다가 당신의 전서 때문에 이곳에 들린 것이오. 모충연의 제자인 서생과 낭자가 그들의 사숙인 담곤에게 가는 것으로 파악됐소. 귀하가 원하는 것이 무극진경의 행방이라면 오히려 잘 된 일이오. 모충연의 제자와 태허진인의 제자가 만난다면 틀림없이 더 중요한 정보가 오갈 것이오. 차라리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행방을 추궁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오. 그리고 귀하에게 보고하는 것은 정주에 도착해서 전서를 날리려고 했소."

무영객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만약 그들이 담곤의 비룡문에 박혀서 나오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소."
"염려 마시오. 비룡문에 다시 잠입하면 되오."

"일운상인이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잠입은 어려울 수도 있소. 만약 그들이 아무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추적할 것이오."
"우리는 추측에 의해 일을 진행하진 않소. 상황에 따라 움직일 뿐이오. 표적이 가만히 있으면 동향을 살피고 움직이면 추적하오. 그러다가 기회가 왔을 때 목적을 달성하기만 하면 되오."

무영객은 의뢰인의 추궁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가 여태까지 맡은 일 중 가장 까탈스럽게 구는 자이다. 엄청난 대가만 아니었어도 이런 자에게 굽실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말은 애초의 계획이 어긋난 지금 목표물들은 자신들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계를 하면서 움직일 것이란 것이오. 이럴 경우 당신은 혼자 몸으로 그들을 놓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느냐는 것이오."

의뢰인은 이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두 달 전 서호의 일을 끝냈을 때만 하더라도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는데, 이번 모충연 건은 한번 삐끗하자 의심부터 한다. 의심의 근거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표적이 움직일 경우 넓은 중원 천지에서 그들을 어떻게 감시의 망 안에 가둘 것인가 하는 대책을 물어보는 것이다.

"염려 마시오. 나라고 아무 대책이 없는 건 아니오. 나름대로의 촉수가 있소."
"어떤 촉수요?"
"그건 말 못하오. 당신은 결과만 기다리시오."

무영객은 이 자와 더 이상 자신의 능력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싫었다. 신뢰하지 못한다면 거래를 접으면 그만이다. 청부살수에겐 오로지 거래만 있을 뿐 명령과 복종은 없다. 거래에 따른 의무를 관계에 의한 의리로 착각하게 해선 안 된다. 이 자는 의뢰인이라고 상전 행세를 하려고 한다. 무영객은 이런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결코 굽실거려서는 안 된다.

"좋아. 당신에게 촉수가 있든 세작이 있든 상관 안하겠어. 그러나 우리 사이의 계약에는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오. 부디 정주에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있기를 바라겠소. 우리 사이의 계약이 무기한이 아니라는 건만 염두에 두기 바라오."

목소리의 성조(聲調)가 달라졌다. 이 자의 목소리에 억양이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언제나 냉랭하고 일정한 성조로 말하던 자였다. 이 자는 나에게 실망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무영객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염려 마시오. 정주에서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오."
"정주에서만큼은 실망시키지 말기 바라네."
"……"
"……"

침묵이 흘렀다. 목소리도 무영객도 인사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할 말이 끝나거나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땐 말없이 헤어진다. 특별히 정하진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그렇게 되어 왔다. 무영객이 휘장을 젖히자 비단주머니가 바닥에 놓여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말없이 품에 넣었다. 금액이 얼마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묵직했다. 그러나 이 이번만큼은 이 묵직함을 다른 곳으로 넘겨야 할 것 같다. 무영객이 화타묘를 빠져나오며 한 생각이다.

정주(鄭州)는 관도가 사통팔달로 뻗어 교통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동으로는 개봉, 북으로는 북평, 남으로는 소주, 항주, 서로는 낙양, 장안 등으로 연결되어 있고, 황하의 물길 또한 멀지 않으니 그야말로 중원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했다. 예로부터 외지 사람이 많이 드나들다 보니 타지의 문화나 습성에 대해서도 관대한 편이었다. 정주의 시내는 번잡함이 금릉이나 소주 못지않았고, 전각과 집들의 크기는 화북의 어느 고을보다 크고 화려했다.

자고로 사람이 모이는 곳에 부(富)가 있고, 권(權)이 있고, 세(勢)가 있는 법. 이들은 때론 경쟁하고 때론 협력하며 각자의 영역을 불리거나 혹은 도태한다. 이렇게 부와 권과 세가 있는 곳에 강호의 온갖 소식이 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온갖 소문들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강호에 이름 석자를 남기고 싶다면 정주에서 비무(比武)를 해라. 이것은 어느 무림인도 부인하지 못하는 금언이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끝없이 이어지는 정주의 시내를 지나면 서민들의 아담한 토담집들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라 또 한참을 가다보면 얼기설기 띠집이 버섯의 갓처럼 외곽을 둘러싸고 있다. 띠집들을 지나 삼십여리 북쪽으로 가면 누런 물결이 굼실거리는 황하(黃河)가 나타난다.

황하는 누천년 동안 수천리를 지나오면서 동에서 서로, 서에서 북으로, 북에서 동으로, 동에서 다시 남으로, 남에서 또 서로 방향을 바꾸며 스스로 살아 있음을 과시하고 있다. 인간사 제 아무리 변화무쌍한들 억년 세월 한시도 쉬지 않고 꿈틀대는 황하에 비하면 그저 한 물결이 다른 물결에 뒤집히는 것에 다름이 아니고, 천년만년 유구할 것 같은 조종기업(祖宗基業)이라한들 그 흥망은 황하가 한번 내지르는 발길에 무너지는 기슭에 불과할 뿐이다.

황하의 장대한 물결을 바라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무언가 치솟아 장부의 기개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검집에 든 검이라도 넣다 빼기를 반복하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속삭이듯 유유하게 흐르는 장강(長江)과 대비된다. 장강에서 고향을 그린다면 황하에서는 천하를 생각하게 한다.

조복은 넘실대는 황하의 물결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 금의위 정주 청사로 향했다. 청사는 황하에서 걸음으로 삼각(三刻), 말을 타면 반각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다. 황하가 황궁에 진상하는 주요 물길이 되다보니 황하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그다지 위용을 부리진 않았지만 전각과 당의 규모가 일반 부청보다 크고 단단하게 지었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정주 지부의 위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짐작케 하는 것이다.   

정주부 금의위 교위(校尉) 풍천의(豊天宜)는 직급 상으로는 영반인 조복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장반(掌班)이지만, 정탐과 체포를 담당하는 제기(緹騎)라는 보직으로 그를 은근슬쩍 그를 조종할 수 있는 입장이다.

"금의위 금릉부 공문을 통해 방문(榜文) 수배를 전달받았소. 어떤 서생과 낭자를 추격하고 있다던데 조영반이 정주 지부를 방문한 것은 그들 때문이오?"

교위 풍천의(豊天宜)는 무인답게 강골이었다. 눈꼬리가 짧게 끊어진 고리눈에 커다란 입꼬리가 여덟 팔자로 내려와 있어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다섯 치 수염이 팔자 입을 덮어 그다지 사나워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목소리만큼은 부드러웠다.

"그렇습니다. 교위 어른."
조복은 호칭과 태도만은 깎듯이 했다.

"어제 정주부 포교위한테서도 보고를 받았소. 그들 남녀가 무슨 대역죄라도 지은 것이오?"
"저, 자세한 것은 아직 밝히기가……."
조복이 말끝을 흐렸다. 

"자네가 제기(緹騎)로서 은밀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곳은 나의 관할이네. 관할 구역의 수장한테까지 비밀로 해야 한단 말인가."
풍천의의 얼굴에 노기가 서리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실은 동창 내 은화사가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일을 비밀리에 탐지,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은화사는 우리 금의위에는 인력 지원 정도의 협조만 구하고는, 무슨 목적으로 그 남녀를 추적하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희들한테도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은화사라……."
은화사라는 명칭이 나오자, 풍천의의 표정이 누그러지더니 손을 들어 가지런히 뻗은 염소수염을 꼬기 시작했다. 

"수색이나 탐문 인원이 필요하다면 각 지역 관아의 포도들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텐데. 금의위는 본시 황궁 어림군(御臨軍)이니 중원에서 활동하는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걸 그들 또한 모르지 않을 것 아닌가."

"금의위는 공식적인 조직이지만 은화사는 비밀조직이라서 표면적으로 나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조복의 대답에 풍천의는 다시 수염을 꼬며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그러더니 문득 조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화사가 협조라는 미명 하에 금의위를 동원하라는 명령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풍천의가 꼬던 수염을 멈추고 물었다.

"은화사 쪽에서 상대부 노순광이 직접 챙긴다는 소문입니다만 표면적으로는 그의 오른팔이라고 알려진 예진충이란 자올시다."

조복이 답했다.

"예진충이라, 못 듣던 이름인데. 강호의 밥을 먹은 자가 은화사에 들어갔다면 적어도 무공이 만만찮을 텐데. 어찌 무명(武名)이 드러나지 않았을꼬."

"천하는 넓어 심지를 헤아리기 어려운 은자(隱者)가 태산의 초목처럼 울울(鬱鬱)하고, 재주를 가늠하기 어려운 기인(奇人)이 장강의 파도처럼 창창(蒼蒼)하다고 합니다. 그 옛날의 공명(孔明)도 유공(劉公)이 찾기 전까진 한낱 시골 선비에 불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강호의 알려진 이름만으로 평하기 어려울 듯 합니다."

"결국 그자의 무공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단 말인가?"
풍천의가 정곡을 찔렀다.

"그렇습니다. 은화사라는 조직이 오로지 무력을 위해 구성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무공의 수위만큼은 일정 경지 이상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상대부의 신임을 받고 있다면 상당한 고수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럴 것이네. 현 황상께서 전대 동창의 폐해를 익히 실감하고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우리 금의위에 힘을 실어주는 형편이지만 아직은 동창의 정보력에 미치지는 못하고 있네. 그들이 무력기관인 은화사를 은밀히 키우고 있다면 우리는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이네."

풍천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고 물었다.

"동창 내에서 예진충이란 자의 정식 직함은 무엇인가?"

"워낙 드러나지 않는 조직이라 정확한 직책은 모르겠지만 아마 당두 정도 될 것입니다. 은화사는 개별 임무 위주로 구성되었다가 흩어지는 조직인지라 직함이나 직책이 그다지 중요하진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예진충은 이번 사건을 책임진 지휘관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그런지 총관이라는 애매한 직함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흠흠, 풍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복의 보고를 곱씹었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무위도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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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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