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통곡의 바다'로 만든 세월호 사고.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진도 앞바다 구조작업에 집중된 가운데, 실종자 가족들은 더딘 수색에 애간장을 태우면서 거친 취재경쟁에 이중의 상처를 입고 있다. <단비뉴스> 기자들은 희생자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도우면서 현장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취재가 아닌 자원봉사를 택했다. 지난 23일부터 2박3일간 5명의 기자가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족들의 처절한 기다림과 수색현장의 고충 등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기자 말
24일 새벽 1시 전남 진도군 진도읍의 진도실내체육관. 유인물을 붙이기 위해 테이프를 뜯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체육관 1번 출입구 부근 대형 게시판 앞으로 가족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게시판에 붙은 A4 인쇄용지에는 '000번째 희생자, 여, 학생추정, 키 160㎝, 머리길이 정수리에서 23㎝, 특이사항 위쪽 덧니...' 등의 인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우리 애가 덧니는 아닌데… 금으로 때웠잖아.""근데 르꼬끄 바지는 또 맞아. 키도 딱 맞는데.""아냐, 우리 애 덧니 아니잖아."50대로 보이는 부부가 인상착의를 이리저리 따져보다 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황망히 돌아섰다. 올해 마흔 살 된 딸이 실종돼 사위와 함께 왔다는 흰머리의 할머니는 종이에 적힌 내용이 잘 안 보인다며 자원봉사자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 애가 생머리야... 근데 파마도 하긴 했는데... 우리 딸은 그냥 우리 딸이지, 귀걸이 하고 이런 건 난 몰라. 키도 작고 엄청 말랐어."불안정한 목소리의 노모는 딸의 생전 모습을 꼼꼼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여학생으로 추정되는 시신'이라는 설명에도 아랑곳없이 "우리 딸이 맞는 것 같다"며 사위를 찾아야 한다고 체육관 밖으로 뛰어나갔다.
흐느낌과 탄식이 이어지는 실내체육관
새벽 2시 무렵, 자원봉사자들이 체육관 입구 분리수거통 앞에서 쓰레기를 분류해 담는 동안 가족들이 있는 1층의 한 귀퉁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가족들의 흐느낌과 탄식은 수시로 체육관 이곳저곳에서 짧게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다.
진도체육관 밖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관계자와 언론, 봉사자 등이 뒤섞인 체육관의 번잡함을 벗어나 이곳에서 잠깐씩 시간을 보낸다. 23일 오후 4시쯤, 50대로 보이는 여성이 무릎을 가슴에 바싹 끌어안은 자세로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호품으로 나눠준 회색 운동복 상하의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많이 울어서인지 몹시 부어있었다.
자원봉사자가 음료수를 권하자 사양하더니 "이제 안산 간다"고 짧게 말했다. 아이를 찾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낮에도 그녀는 체육관에 있었다. "안산 가시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신상정보가 비슷해 헷갈린 것 같다"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다른 애는 다 나왔거든. 근데 우리 애만 아직 안 나왔어. 다른 애들은 다 왔는데…."친구들은 대부분 발견이 됐다는 얘기 같았다. 시신이라도 찾아 떠나는 가족이 계속 늘고 있는 체육관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처절할지, 떨리는 목소리가 듣는 이의 마음을 후벼 팠다.
24일 오전 6시. 체육관 입구 대형게시판에 A4 용지가 몇 개 더 붙었고, 사망자는 159명, 실종자는 143명으로 기록됐다. 구조자수는 변함없이 174명에 멈춰 있었다. 게시판 주변에는 몇몇 가족들이 휴대전화를 쥐고 말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날 좋은데 투입 잠수부 둘 뿐, "내 새끼 저기 있는데..."자녀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절망과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바뀌면서 체육관의 분위기는 시시각각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같은 날 낮 12시. 실종자 가족대표인 듯한 50대 남성이 단상에 올라섰다.
"오늘 잠수부가 두 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말합니다."얘길 듣던 가족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몇몇이 먼저 담요와 외투 등을 들고 일어섰다. 물살이 약하고 날씨도 좋은데 잠수부가 두 명밖에 들어가지 않은 경위를 진도군청에 가서 따지고, 민간 잠수부를 대거 투입해달라고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남은 사람은 다 가야지. 이제 우리뿐이야.""자, 갑시다!"체육관에 있던 가족 중 절반 정도가 빠져나가고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주로 남았다. 베트남 사람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남녀 2명은 어떤 상황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두리번거리다 다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 와중에 한 실종학생의 어머니는 유전자(DNA) 검사로 아들의 시신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짐을 챙겨 달려 나갔다. 50대로 보이는 그녀는 위아래 회색운동복을 입었고 파마한 머리가 몹시 헝클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원래 우리 애가 손에 팔찌를 안 했었거든. 내가 그 팔찌가 너무 이상한 거야. 팔찌만 알아봤어도…. 000번이면 한참 전인데 내가 내 자식도 몰라보고..."푸석한 얼굴이 눈물로 얼룩진 그녀는 연신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으려는 듯 손으로 입을 감싸면서 시신안치소로 가는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자식의 죽음을 확인하고 절망하며 떠나는 이의 뒤편. 여전히 게시판 앞을 서성이면서 "날씨가 좋은데 왜 구조자가 없냐"고 누군가와 울먹이며 통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녁 9시. 실종자 가족 대표가 가족들끼리 회의를 해야하니 다 나가달라고 언론과 의료진 등에게 요청했다. 문 앞에서 일하던 자원봉사자들은 졸지에 출입통제 요원이 됐다. 가족들은 체육관 문을 닫고, 두 개의 대형 스크린 중 오른쪽에서 나오는 팽목항 수색작업 생중계 상황을 함께 지켜봤다.
낮에 진도군청에 항의하러 갔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족들의 일부가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와 함께 팽목항으로 가 해양경찰청장 등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생중계를 지켜보던 가족 중 20여 명이 외투와 담요를 챙겨서 또 일어났다. 방송을 보는 동안 이해할 수 없는 해양경찰청장의 해명에 분노한 학부모들이었다.
"팽목항으로 갑시다!""이건 아니지!""아니 왜 2명밖에 안 들어가!""가서 해결 안 되면 오늘 내가 빠져 죽어야지."우르르 몰려 나가던 사람들 중 한 50대 여성은 "내 새끼 저기 있는데…"하며 체육관 입구 계단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공무원과 주부, 취업준비생까지 발벗고 나서 봉사
체육관에는 이제 실종자 가족보다 기자와 자원봉사자들이 더 많았다. 절망에 빠지고 지치고 예민해진 가족들을 위해 봉사자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원불교봉공회 지원봉사단'이라고 쓰인 분홍 조끼를 입은 이들은 직접 만든 죽과 칡차를 조용히 가족들에게 권했다. 이들은 '빨래 해드립니다'라고 쓰인 손팻말을 말없이 들고 다니며 세탁물을 수거하기도 했다.
전국 곳곳에서 희생자 가족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자원봉사자들은 식사, 청소, 세탁, 의료서비스, 구호물품 정리와 배급 등 다양한 지원활동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쓰레기수거 작업 등을 함께 한 봉사자들 가운데는 지리산등반을 계획하고 휴가를 냈다가 세월호 참사를 접하고 행선지를 바꿨다는 공무원과 주부, 대학생, 취업준비생, 재일교포 등이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 '위로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달려온 사람들이 많아 현장에서는 일손이 남아도는 분위기다.
각계에서 보내 온 구호물품도 컵라면·도시락 등 식품류와 두통약·소화제 등 구급약, 운동복과 점퍼, 이불, 담요 등으로 다양하고 넉넉한 편이다. 물품관리는 다소 허술했지만, 계속 도착하는 구호품을 통해 많은 이들의 걱정과 위로가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됐다.
배려 없는 취재 경쟁에 가족들 신경질적 반응
<단비뉴스> 자원봉사팀이 체육관에 처음 도착했던 23일 새벽 3시 무렵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1층에 160여 명, 2층에 30여 명 정도 있었다. 가족들은 한밤 중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한 채 뒤척이는 경우가 많았고, 서로 바짝 껴안고 누워있거나 깬 사람이 자는 사람의 이불을 덮어주기도 했다.
체육관 단상 위로 설치된 두 개의 대형스크린 중 왼쪽은 24시간 보도채널인 와이티엔(YTN)을 방송했고 오른쪽은 팽목항의 구조장면을 실시간으로 송출했다. 뉴스가 나가지 않을 땐 '000번째 희생자'라는 제목과 함께 성별, 키, 신체 특이사항 등이 적힌 사망자 신상정보가 스크린에 공지됐다. 새벽에도 잠들지 못하고 일어나 소리를 제거한 스크린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가족들이 많았다.
칸막이도 없는 체육관 바닥에서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된 채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족들은 취재경쟁을 벌이는 기자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체육관 2층 등에서 대기하다 약간이라도 소란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모여들어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는 기자들, 비탄에 빠진 가족들에게 배려 없이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원성이 터져 나왔다. 24일 낮에는 실종학생의 아버지인 듯한 50대 남성이 연단에 올라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000기자님 계십니까? 000기자님 계시면 여기 앞으로 나오세요. 아니 학부모가 허락도 안했는데 이름을 마음대로 갖다 써도 됩니까?"체육관이 금세 술렁였고, "안 돼요! 안 되지!"하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다.
<단비뉴스>팀이 체육관을 떠나온 25일 오후에는 이틀 전에 비해 체육관내 가족의 수가 3분의 1정도 줄어 있었다. 시신을 확인한 가족들이 경황없이 떠나느라 이불과 담요 등을 정리하지 못한 자리 옆에서, 아직 기다려야만 하는 가족들은 스크린과 게시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은 곧 사고해역의 조류가 빨라져 수색작업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