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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健忘症). <표준국어새사전>에서는 '경험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느 시기 동안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드문드문 기억하기도 하는 기억 장애'로 풀이한다. 사소하고 가벼운 기억 상실 현상 정도로만 알았는데, 그 의미가 사뭇 거창하고 심각하다.

실제로 건망증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손에 차 열쇠를 쥔 채로 주차장에 나왔다가 열쇠를 놔 두고 왔다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자동차 지붕 위에 휴대전화를 놔 둔 채로 운전하는 일은 나름대로 심각하다. 달걀 프라이를 한 프라이팬을 켜진 가스 불 위에 그대로 놔두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시커멓게 탄 냄비 앞에서 운 어머니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유전의 결과인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는 양은 냄비며 주전자께나 태우셨다. 시커멓게 타버린 냄비나 주전자를 앞에 놓고 '내가 왜 이러나' 하며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랬던 내가 언젠인지부터 모르게 건망증의 화신이 돼 버렸다. 비 오는 날 우산은 나에겐 거의 일회용이나 다름 없다. 식당이라도 가면 차 열쇠를 놓고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를 어지간히 아는 지인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때마다 '열쇠는 챙겼냐'며 대놓고 놀려댄다. 아침에 '남대문'을 폐쇄하지 않고 출근했다가 종종 경악하기도 한다!

집안에서라고 다를까. 조금 전에 화장실에 들고 간 신문을 찾으려고 온 집안을 뒤진다. 놀랍게도, 조금 전에 막 나온 곳이니 확실하다며 화장실은 쏙 빼고서 말이다. 바삐 출근하면서 이미 바지 뒷주머니에 챙겨 둔 유에스비(USB) 메모리를 가져가야 한다며 가방과 옷들을 이잡듯이 뒤진다. 가장 잘 아는 내 몸에는 분명히 없다는 말도 안 되는 확신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아내는 내게 집안 어디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걸 쉽게 찾지도 못할 뿐더러 찾고 나서도 엉뚱한 데다 가져다 놓기 일쑤여서다. 그러고서도 나는 이내 그 엉뚱한 데를 까먹어 버리는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이런 식이다. 거실 책상에서 책을 읽는다. 아내가 안방에서 손톱깎기 좀 챙겨다 달라고 한다. 알았다고 대답한다. 조금 시간이 흐른다. 아내가 손톱깎기 안 가져오냐며 다시 말한다. 알았다고 건성으로 다시 대꾸한다.

갑자기 물이 마시고 싶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문득 손톱깎기를 떠올린다. 챙겨서 주방 쪽으로 간다. 손톱깎기를 식탁 위에 올려 놓은 채 물 한 잔을 마신다. 그러고는 그냥 책상으로 돌아온다. 아내가 또 소리친다. 어투가 심상찮다. 그새 손톱깎기의 소재를 잊은 나는 손톱깎기를 찾느라 분주해진다. 식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에서 설레발을 친다.

이 정도면 치매 수준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가끔 내게 치매 증세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수년 전 어떤 방송에서 20~30대 같은 젊은 사람들도 치매에 걸린다는 보고를 들은 적이 있다. 30대 초반에 겪은 그 일을 떠올리면 마냥 다른 사람 일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차창 열어젖히고 '깜빡'... 흠뻑 젖은 자가용

그해 나는, 지금은 없어진 야간반 담당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노총각 시절이었다. 오후 두 시에 출근해 열 시에 퇴근했다. 낮과 밤이 각각 절반만큼씩 바뀌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마음과 정신도 '정상'과 '비정상'이 절만만큼씩 각자의 자리를 맞바꾼 듯했다.

그날 나는 늦은 밤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장마가 한창인 유월 말쯤이었다. 비가 며칠째 구질구질하게 내렸다. 대기가 온통 후텁지근했다. 손등이나 팔뚝을 훑어 내리면 끈적한 물기가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그날 밤은 비가 그쳤다. 며칠째 세상을 덮고 있던 짙은 구름도 말끔히 가셨다. 밤 하늘에서는 간만에 조그만 별들이 얼굴을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차창 네 개를 모두 열어젖혔다. 맑고 시원한 밤 공기가 얼굴과 몸을 간질였다. 기분이 상쾌했다.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다음 날은 토요일. 여유가 절로 생겨났다. 그즈음 한 여자와의 밀당 연애도 나를 떨리게 했다. 내가 다가서면 그녀가 멀어졌다. 그녀가 다가오면 내가 멀어졌다. 마음이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서로 애틋함이 생겨났다. 기분 좋은 떨림까지. 아마 그 모든 것들로 인한 흥분 때문이었으리라. 집으로 향하는 길에 슈퍼에 들러 캔맥주를 몇 개 샀다.

다음 날 느지막이 일어났다. 기분 좋게 마셔서 맥주 숙취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 일어나 앉아 쪽마루 너머 하늘을 보았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에 내리는 빗발은 참 좋다. 굵으면 굵을수록 더욱 그렇다. 차분하면서도 굳센 기운이 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기지개를 켠다. 밥을 챙겨 먹은 뒤 문을 나선다. 1층 현관 밖으로 나간다. 가만, 손에 우산이 없다. 다시 집으로 가 우산을 챙겨 나온다.

우산을 받쳐 들고 주차장으로 갔다. 멀쩡히 있어야 할 내 차가 없었다. 아니, 내 차는 있었다. 차창 네 개가 활짝 열어 젖혀진 전날 밤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지만 알지 못할 들뜸과 흥분이 기분 좋게 떠다니던 차 안은 흥건히 배이고 넘실대도록 고인 빗물 세상이 돼 있었다.

건망증이었을까, 아니면 치매였을까. 그 무엇이 되었든 기억해야 할 것을 잊었다는 점은 똑같다. 잊음의 대가는 컸다. 한동안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곰팡이와 그것들이 내뿜는 악취에 시달려야 했다. 굵은 장대비가 밤새 이후 그때까지 쉬지 않고 내렸다면 차 엔진까지 침수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무의식적인 망각은 죄가 아니다. 건망증이 심한 내가 창을 내린 건 맞지만 창을 올리지 않은 것은 내 탓이 아니다. 굳이 탓하자면 나를 들뜨게 한 그밤의 청신한 기운과 그녀를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치매 환자가 가까운 가족에 대한 기억을 잃는 것도 안타까워해야지 책망할 일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망각하는 건 죄다. 그 망각의 대상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며칠 전 선생님 몇 분과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다. 전주에서 열린 세월호 침몰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였다.

선생님 한 분이 내내 '기억 전쟁'을 말씀하셨다. 세월호 사건(정말이지 이번 참사는 그냥 운이 없어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이 나라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시스템과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만들어낸 '사건'이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였다. 모두 백 번 공감하며, 기억 전쟁의 다짐을 가슴에 함께 새겼다.

손에 든 차 키를 찾는다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비가 올 수도 있는 날, 차창을 열어두고 차문을 나서는 것도 나름대로는 낭만(?)이 없지 않다. 켜진 가스 불 위에 프라이팬을 계속 올려두는 일은 위험하다. 여전히 불이 있으니 눈여겨 지켜보고 잊지 말아야 한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열엿새째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여당, 친정부적인 주류 언론은 서서히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발을 빼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애꿎은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희생을 당하고 있는데도 시종일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득실만 따졌던 그간의 행태를 고려하면 특별한 일도 아니다.

끊임 없는 기억 전쟁이 무엇보다 필요한 이유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세월호 사건 실종자들의  두 눈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중증 건망증 환자의 천국 대한민국, 이젠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건망증 때문에 겪은 일 응모글



#건망증#치매#기억 전쟁#세월호 사건#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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