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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닭 냄새가 많이 나는데?"

닭볶음탕과 함께 저녁을 먹던 남편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한마디 했다. 성격이 예민한 남편은 음식냄새에도 민감했는데 특히 찌개에서 나는 돼지고기나 닭고기 냄새를 못 견뎌 했다.

"마늘이 안 들어가서 그래, 오늘만 참고 먹어줘."

남편은 결국 닭볶음탕을 제외한 다른 반찬으로 저녁식사를 마쳤다.

이상했다. 시장에 가는 날이라 분명히 단골가게에서 마늘을 샀는데, 닭볶음탕을 하려고 보니 마늘이 보이지 않았다. 냉장고, 김치냉장고, 부엌, 베란다, 싱크대…. 다 열어보고 심지어 쓰레기통에 버린 비닐봉지들을 꺼내어 하나씩 확인까지 했는데 찾지 못했다. 결국 마늘대신 양파 대파를 많이 넣고 끓였는데도 특유의 닭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솥뚜껑 운전이 몇 년인데…."

남편은 기대했던 저녁메뉴에 실망한 듯 타박을 주었다. 가게에 두고 왔나 해서 저녁 설거지 후 다시 찾아 갔지만 주인아주머니는 두고 가지 않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단골이니 그런 걸로 속이진 않을 거라 여겨 다시 한 봉지의 마늘을 사고 물건을 샀던 가게들을 차례로 들려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손가방 안에 있던 마늘

 엄마는 '젊은 딸이 정신을 놓고 산다'며 한 걱정 하신 다음  삐죽 자란 마늘 싹을 자르기 시작하셨다.
엄마는 '젊은 딸이 정신을 놓고 산다'며 한 걱정 하신 다음 삐죽 자란 마늘 싹을 자르기 시작하셨다. ⓒ free images

며칠 후 아버지를 모신 절에 다니러 갔다 오시던 친정엄마에게 영등포역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봉투에 약간의 용돈을 챙겨 손가방에 넣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카페에서 커피가 나오자마자 엄마는 절에서 받아온 부적을 건네며 올해 삼제가 든 남편과 아들의 배게 속에 꼭 넣으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마침 챙겨온 용돈이 생각이 나 손가방을 뒤지는데,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났다.

"이게 뭐지?"

손에 잡힌 것을 꺼내니 단단히 묶인 검은색 비닐 봉투 안에 동글동글 한 것들이 만져졌다. 그제야 며칠 전 그렇게 찾던 마늘이 생각났다. 산 물건이 많아  마늘을 손가방 안에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풀어보니 그새 삐죽이 싹이 자라 있었다. 

엄마는 '젊은 딸이 정신을 놓고 산다'며 한 걱정 하신 다음  삐죽 자란 마늘 싹을 자르기 시작하셨다.

유난히 마늘을 좋아하시던 아버지

열다섯, 열여섯 살 무렵의 나는 힘겨움의 연속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며 서울로 돈 벌러 가신 엄마를 대신해 셋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보고 농사일도 했다. 게다가 까다로운 아버지 시중까지 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종갓집 종손이신 아버지는 할머니 나이 마흔에 본 귀한 십 2대 독자셨다. 한국 전쟁 통에도 매끼 쌀밥을 드셨다고 하니 얼마나 금이야 옥이야 하셨을지 안 봐도 알만했다. 그래서였나 아버지의 입맛은 유난히 까다로웠고, 세상의 모든 일이 본인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계신 것 같았다.

그런 반면 육체나 정신은 매우 약하셔서 힘든 일은 하지 못하셨고, 사람들의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셨다. '종갓집 재산' 하면 그래도 고향에선 알아주는 규모였다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쯤에는 모두 어디를 가고 빚까지 지게 돼 결국 엄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이모님이 사시는 서울로 돈을 벌러 떠나셨다. 어린 내게 동생들을 당부하시며 떠나시던 그 새벽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집안이 망한다'고 아버지가 벌려 놓으신 일을 수습하시느라 힘드신 엄마의 푸념. 아버지는 매번 말도 안 되는 말씀으로 엄마를 억누르셨다. 그러셔 놓고는 아버지 대신 돈 벌러 떠나시는 엄마를 잡지는 않으셨다.

엄마가 안 계셔도 일 년 여섯 번의 제사와 명절차례는 꼬박꼬박 치러야 했다. 지금 같으면 어떻게 그 세월을 견뎠는지 엄두가 나지 않으나 열다섯 열여섯 살의 어린 나는 힘들어도 모두 해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것은 까다로운 아버지의 입맛을 맞추는 일이었다. 아버진 마늘이 듬뿍 들어간 음식을 좋아하셨다. 생선도 구이보다는 조림을, 굴도 국이나 전보다는 다진 마늘 한 숟갈 넣은 물회를, 김치도 익은 것 보다는 마늘 잔뜩 넣은 겉절이를 주로 드셨다. 김치를 담더라도 가장 고소한 배추 속은 따로 떼어내 전체 김치에 넣을 마늘의 절반가량을 넣고 따로 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걸 먹으라고 해왔느냐"라면서 밥그릇이 안마당에 던져지곤 했는데 그때의 공포는 어린 내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럴수가, 마늘을 놓고 내리다니

 충남 예산 장날 풍경(자료사진)
충남 예산 장날 풍경(자료사진) ⓒ 강미애

열여섯 봄, 지난 겨울 보관을 잘못하였는지 창고에 걸어뒀던 마늘 대부분이 속이 텅텅 비어버렸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라 말씀도 못 드리고 혼자 해결하려 동네 여러 집을 찾아다니며 사정했다.

그러나 햇마늘이 나오기 바로 앞이라 집집마다 마늘이 귀했고 조금씩 도와주셨지만 아버지가 드시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갑자기 겉절이라도 드시고 싶다고 하시는 날엔 큰일이라 불안해하고 있을 때 마침 증조할아버지의 제사가 다가왔다. 종손이 할 바라며 제사음식 준비 할 때만큼은 돈 쓰는 것을 허락하셨는데, 읍내 장에 까지 가서 제사준비를 하면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마늘을 살 돈이 절약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제사상에 올릴 나물과 탕국을 미리 준비해놓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직행버스로 30분 거리의 읍내 장에 갔다. 약과며 사탕 포 과일 산적용 고기 조기 등 한보따리 장을 보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돈이 남았다. 마늘가게 앞에서 가격만 물어보고 쭈뼛거리며 서 있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부족한 돈에도 주인아주머니는 많은 양의 마늘을 주셨다. 너무 마음이 놓여서 였을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다행이 버스가 고향 정류장을 막 떠나려는 순간 허겁지겁 내릴 수 있었다.

발걸음이 가볍다 여겼다. 마늘을 많이 사서 그런가 보다 했다. 다시 한 번 마늘이 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마늘이 들려있어야 하는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에 탈 때는 보따리가 두 개였는데 내린 내손엔 보따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제사 거리는 무릎에 올리고 마늘은 머리 위 선반에 올렸는데 허겁지겁 내리느라 그걸 잊은 것이다. 흑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달려가는 버스 뒤를 쫓아 뛰었지만 버스는 나보다 훨씬 빨랐다. 한참을 버스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다 어두워져 집에까지 울면서 왔던 기억이 난다.

마늘 싹 하나에 아버지 기억 하나

부스럭거리며 엄마는 싹을 잘라낸 마늘이 담긴 비닐봉투의 입구를 여몄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이 식은 걸로 보아 엄마는 마늘 싹 하나에 아버지의 기억 하나씩을 잘라내셨나 보다. 나도 그런데 엄마는 마늘과 얽힌 아버지와의 기억이 얼마나 더 많았을지 짐작이 갔다.

"이상하지 엄마? 아버지가 꿈에 한 번도 안 나타나, 엄마도 그래?"

영원히 식구들을 힘들게 하실 것 같았던 아버지도 돌아가신지 10년이 넘었다.

"귀신은 마늘을 싫어한다잖니."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내게 커피잔을 내려 놓으며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다.

"따지고 보면 염라대왕도 귀신인데 니 아버지 마늘 어지간히 좋아했어야지. 혼에서도 냄새 날 게다. 귀신 만나러 오면서 마늘내 풍겨봐라, 좋겠나? 그러니 염라대왕이 뭐가 이쁘다고 식구들 보러 보내겠냐?"
"엄마, 말 되네."

엄마의 농에 하마터면 입안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그 뒤로 우린 한참을 테이블 위에 모아 놓은 마늘 싹을 만지작거렸다. 코끝에 싸한 마늘향이 풍겼다. 마늘을 싣고 떠난 버스가 남겨놓은 흙냄새가 풍겼다.

덧붙이는 글 | 건망증 때문에 겪은일 응모글



#아버지#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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