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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다, 아시아인들은 생각할 줄 모른다"

이 도발적 워딩은 1999년 5월 31일, 타임지에 실린 칼럼니스트 신밍쇼(Sin-Ming Shaw)의 칼럼 제목이다. 그는 칼럼 서두에서 "아시아인들이 생각할 줄 아는가"라는 의문이 인종차별적 의도에서 던져진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도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이 '사실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뒤 이어 그는 아시아의 역사적 사실, 문화적 경향, 그리고 그 결과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려고 한다.

아시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제목만 봐도 불쾌할 수 있는데, 이것이 일종의 학문적 '사실'임을 입증하려고까지 했다니(!) 어찌 보면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논리 없는 모욕'보다도, 그것이 사실임을 선언하는 학문적 비정함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필자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되 그의 주장을 냉정히 되씹어보고자 한다. 또 이를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철학정신'이 어떠한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지 이끌어 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독자들 역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기회와 어떠한 유의미함을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이 소박한 기대와 함께, 기획 기고 <대한민국이 되찾아야할 네 가지> 그 첫번째 '철학정신'을 시작한다.

아시아 권위주의 폐해와 창조성 결핍을 유교문화에서 찾다

타임지 1999년 5월 31일, 타임지에는 "정말이다 아시아인들은 생각할 줄 모른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 타임지 1999년 5월 31일, 타임지에는 "정말이다 아시아인들은 생각할 줄 모른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 TIME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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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밍쇼는 중국의 송, 청나라가 한때 발전된 나라였고, 지난 100년간 경제와 기술에 있어서 아시아가 이룬 기록적인 성과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기술은 궁극적으로 서양의 과학적 성과에, 정치체제와 경제 역시 서양의 이론에 기대고 있는 아시아의 현실을 지적한다.

재능 있는 아시아인들이 <딱딱한 지적 분위기와 고착화된 서열>이 뛰어난 지성보다 우대 받는 상황 때문에 아시아를 떠나야만 하고, 아시아를 떠나서야 그 재능이 빛을 발하는 현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고보다 암기에 집중하는 학교가 아시아 사회의 기본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답이 항상 존재하고, 책과 권위자에게서 이를 찾아야 하는 고착된 아시아인들의 정신문화가 반영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시아에서 학교는 '진리'를 말하고, 부모들은 항상 옳고, 언제나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보다 더 잘 안다고 비꼰다. 심지어 그는 아시아의 정부 고위층들이 제국시기 궁정 환관들을 닮았다고 일갈한다. 권위적이지만, 책임은 질 필요 없으면서, 무능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중 앞에서 권위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유교문화에 반 한다며, 아시아에서 공자를 해체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로 크게 성장한 것도 1868년 메이지 유신에서 자신들의 기존 가치를 기꺼이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습적인 지혜는 길을 잘못 들었고, 배움은 예나지금이나 관료로서 좋은 보수를 얻기 위한 입신양명의 수단이 지나지 않는다고도 주장한다.

그는 '꼬여버린 유가철학'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세대를 거슬러 내려오며 아시아인들의 창조적 사고를 훼손해온 유가적 압박을 제거해야, 아시아인들의 사고에 생명력이 살아나고, 기존의 패러다임들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는 칼럼을 마무리 했다.

사실 공자는 '진보'를 부정하지 않았다, 문제는 '정치'였다

공자 중국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초상
▲ 공자 중국 당나라 화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초상
ⓒ 저작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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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밍쇼의 아시아의 권위주의 폐해와 창조성 결핍에 대한 현상 분석은 부분적으로 설득력 있는 요소들이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들을 그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번째 기고문의 주제가 될 '공감'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주장에 있는 공자와 유가(儒家)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논리적 비약을 지적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첫째로, 공자는 진보를 부정하지 않았고, 사회질서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논어(論語)』 위정 편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등장한다.

자장이 열 왕조의 일을 미리 알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답하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법으로부터이니, 줄인 것과 보탠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법으로부터이니, 줄인 것과 보탠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주나라의 예법을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비록 백 왕조의 일이라도 알 수 있다."

여기서 공자는 그가 강조하는 주(周)의 예법 역시도 앞서 존재했던, 하(夏)·은(殷)의 제도에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해서 나온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앞으로 올 왕조도 이를 고려한다면, 예견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공자가 기본정신(仁: 인간사랑)만 잘 보존한다면, 유연하게 질서도 변화·진보될 수 있다고 보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의 후학인 맹자와 순자도 권위보다 본질을 우선시 했다. 특히 맹자는 공자 보다 더 나아가, 왕 조차도 백성의 뜻에 어긋나면 바꿀 수 있다는 역성혁명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순자(荀子)』 자도(子道, 자식의 도리) 편에서는, 효(孝)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의(義)를 좇는 것이지, 부모 그 자체를 좇는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만약 부모의 명령이 정의와 충돌한다면 절대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점과 그러한 상황에 대한 판단을 개인에게 남겨둔 것이다.

그렇다면, 공맹순 사상에 유연성들이 존재했음에도 아시아적 권위주의 폐해와 창조성 결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쨌든 아시아가 누리는 문화양식들이 대부분 서양에서 온 것은 사실이 아닌가?

신밍쇼는 오리진(Origin, 기원)을 따지며, 아시아가 누리는 문화양식들이 서양에서 온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지구상에 거의 모든 국가와 지역엔 '순수 오리진'이라고 할 것이 별로 없다. 유럽 대부분 국가들과 미국 지식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 돌려져야 하며, 고대 그리스 조차도 이집트와 동방에서 흘러온 것들이 녹아있다.

즉, 문화의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한 것은 오리진이 아닌 재생산 능력이다. 한 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맥락과 유입되는 맥락의 '줄다리기'와 '뒤섞임'의 과정 속에서, 어떻게 문화를 재생산 해나가느냐가 우리 물음의 시작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생산의 중처적 역할을 하는 것은 '정치'다. 그렇다면, 신밍쇼가 책임을 돌렸어야할 것은 '유가적 관념 그 자체'가 아니다. 이미 존재해온 맥락을,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 시켜온 과거와 현재의 정치였어야 했다.

이제 사유의 해방을 위한 정치가 필요하다

사실 피압적 비참함을 논할 것 같으면, 서양의 과거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중세에는 플라톤 사상 조차도 종교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를 위해서 봉사했고, 종교의 권위와 왕의 권위 사이에서 많은 민중들이 스러져갔다.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앞에서는 많은 민중들이 숙청되었다. 이처럼 서양 역시도 자신들의 맥락을 이어오면서도 물음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신밍쇼의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는 분석들이 남아 있다. 정작 우리는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왜'라는 물음을 해방 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더 이상의 지체는 그의 주장을 우리 스스로 입증해주는 꼴밖에 안 될 것이다.

세월호를 상기해보자.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착하게 따랐을 뿐, 아무런 죄가 없었다. 어른들은 스스로의 말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왔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권위의 뒷면에는 어른들의 비겁함, 그리고 무기력하고 뒤틀린 정부 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필자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의 합리성을 의심할 수 있는 세상이, 대통령의 말과 KBS 사장의 주장이 진리로 강요될 수 있는 세상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유의 해방을 위한 정치일 것이다. 우리는 유럽의 일부 국가들처럼, 대학 이전 교육과정부터 철학 교육('윤리 교육'이 아닌 '철학 교육'이다)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사유공간을 축소시키는 대학에서의 인문학과 구조조정 정책에 대하여 반기를 들어야 할 것이다. 대중이 예리한 비판정신과 창조적 사고로 무장했을 때, 개인의 '강한 리더십'보다 더 막강한 '강한 민주주의'가 구축될 것이다. 그러한 든든한 토대 위에서는, 어떤 정치인들의 '개인적 일탈'도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것은 어떤 정치인들에게는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5월 1일, JTBC 손석희 앵커의 오프닝 멘트를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우리 모두는 이 '왜'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지만, 그 답을 끝까지 모른다면 이런 비극이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신밍쇼#사유 해방#공자#철학#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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