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겪어보기 힘든, 그래서 더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역경이 많았던 대통령, 그래서 더 꿋꿋하고 강해져야만 했던 대통령이 오늘은 눈물을 참지 않았다."채널A <시사병법> 진행자인 정용관씨가 지난 19일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꺼낸 이야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같은 날 대국민 담화 중 흘린 눈물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이어 정씨는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정부 혁신안은 대통령이 현재 느끼는 엄중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라며, 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제안한 세월호 참사 대책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 눈물에 대한 호응은 이날 프로그램 내내 계속됐다. 특히 박 대통령의 인생 역경을 담은 영상을 전하면서는 '어머니를 흉탄에 잃고도, 아버지를 황망히 떠나보낼 때도, 면도칼로 테러를 당해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울었다'라고 자막을 통해 강조했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영작(전 한양대 석좌교수)씨는 이 영상 직후 "철의 여인이란 이미지가 있었는데, 껍데기 벗겨보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라며, 방송 중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문제는 종합편성채널로 대표되는 일부 언론들이 담화 이후 대통령의 눈물을 부각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담화에 담긴 세월호 참사 대책에 대한 검증, 유가족·야권·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우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외면되고 있다.
민주언론시민연합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연대해 꾸린 공정선거보도감시단에서 22일 발표한 14차 보고서에는 이 같은 언론의 문제점이 잘 드러난다.
대통령이 울었으니, '더 이상은 문제제기 말라'
대통령의 눈물을 주된 소재로 삼은 것은 채널A만이 아니다. 19일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에서도 출연자들은 "많은 국민들이 대통령을 보고 함께 울지 않았을까", "오늘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애잔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등의 발언을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출연자인 신혜식(독립신문 대표)씨는 "다섯 번이나 사과한 대통령에게 또 뭘 더 문제제기를 하고, 뭘 해라 이런 부분은 좀 과한 것"이라며 대통령을 두둔하고 나섰다. 마치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렸으니, 더 이상은 문제제기를 하지 말라는 모양새다.
대국민 담화 이튿날인 20일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각각 논설위원 칼럼을 통해, '박근혜 구하기'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은 <만물상: 대통령의 눈물>에서 "어제 박 대통령의 눈물은 흔한 정치적 눈물은 아니었다"라며, 대통령을 추켜세웠다.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 역시 <횡설수설: 얼음공주의 눈물>에서 "박 대통령이 정치적 효과 만점의 눈물을 구사한 것이라느니, 한나라당 천막당사를 시작할 때도 그런 눈물을 보인 적이 있다느니 분석하는 사람은 정나미가 떨어진다"라며, 박 대통령 눈물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공정선거보도감시단은 보고서를 통해 이러한 보도태도를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언론도 침몰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라며, "시절이 하 수상하니 여기저기 '딸랑 딸랑' 소리들만 넘쳐난다"라고 꼬집었다.
담화문 단순 전달로 도배된 방송 뉴스
한편, 방송사들은 19일 저녁 메인뉴스에서 박 대통령의 담화를 모두 머리기사로 다뤘다. 문제는 대부분 담화문 단순 전달에 그쳤다는 데 있다. 담화문 내용의 실효성을 분석하거나,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나선 KBS의 경우에는 12꼭지로 축소된 <뉴스9> 중 4꼭지가 관련 내용이었으나, 그 절반인 2꼭지가 '담화문 옮겨 쓰기'였다. 3번째 꼭지는 유가족 반응, 4번째 꼭지는 여야 반응을 전하고 있어 사실상 단순 전달 이외에는 언론의 기능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MBC <뉴스데스크>와 SBS <8시 뉴스> 역시 각각 7꼭지씩을 할애했는데 MBC는 4꼭지, SBS는 5꼭지가 담화문을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었다. TV조선은 15꼭지나 관련 기사를 쏟아냈지만, 8꼭지는 오로지 박 대통령의 담화를 반복하고 설명을 덧붙이는 게 전부였다.
특히 MBC와 YTN은 담화가 발표되기 전날인 18일부터 머리기사로까지 담화문 발표 예정을 전한 바 있지만, 정작 담화문 발표 이후에는 제대로 된 분석 기사 하나 내놓지 못했다.
유가족 반응은 물론, 시민과 SNS의 여론조차 왜곡한 TV조선
박 대통령 담화에 대한 유가족들의 반응은 20일 진도 팽목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드러나듯 "실망스럽다"라는 것이 대체적이다. 김병권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원장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아직 남아있는 17명의 실종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라며, "실종자를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을 원한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TV조선은 19일 <'해경 해체' 수색 차질 걱정>(11번째꼭지, 이송원 기자)에서 앵커를 통해 "세월호 실종자와 희생자 가족들은 대통령 사과와 대책에 대체로 공감했다"라고 전했다. 기자 역시 "박 대통령이 사과와 대책을 밝힐 땐 고개를 끄덕이고, 희생자 이름이 언급될 때 눈문을 흘리기도 했다"라며, 유가족들이 담화 내용에 만족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보도에 가족들의 실망과 불만의 목소리를 담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사 후반부에 짤막하게 언급됐을 뿐이다.
TV조선은 시민과 SNS(사회 관계망 서비스)의 여론조차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대책 긍정"-"실천 지켜봐야">(12번째 꼭지, 이채림 기자)에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담화를 지켜본 시민들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라고 전했는데, 일부 시민의 의견만을 반영했을 뿐이다.
이어진 <"고심 끝 해경 해체"-SNS '충격'>(19번째 꼭지, 이승연 기자)에서는 "신의 한수", "역시 원칙주의자, 강단 있다" 등의 SNS 글을 소개하며 "박 대통령의 조치를 수긍했다"고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SNS의 전반적인 반응인 것처럼 전달됐지만, 실상은 기자가 선택한 몇몇 SNS 반응을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이러한 언론의 보도태도를 두고 "무비판적인 대통령 찬양은 여전했고, 유가족 반응과 여론까지 왜곡하고 있어 참담하다"라며, "언론이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하루 빨리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정선거보도감시단 14차 보고서는 이밖에도 '서울시장 선거 불공정 보도'와 '보수 신문의 무상 교육 왜곡' 등을 지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박현진 기자는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