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39일째, 아직도 실종자 16명은 사랑하는 이들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팽목항에서는 여전히 이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며 매일 차가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청와대가 듣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이 외침을,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 아직 실종자가 있고, 그들이 왜 속절없이 물 속에서, 배 안에서 숨을 거두어야 했는지 풀리지 않은 게 많기 때문이다. 아직 세월호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달라진 사회를 그릴 수 있다.
어떻게 미래를 그릴 것인가는 현재에 달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분노한 시민들이 많다. '자기 자신'에 분노한 사람들이 많다. 미안하다며 행동에 나서는 개인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하고 정부에 요구하며 촛불을 켜고 행동에 나서고 있다. 2008년 촛불 투쟁이 그러했듯이, 자발적 개인들의 행동이 조직된 운동보다 한발 앞섰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행진하는 사람들, 청계광장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간 신학생들.
어떻게 미래를 그릴 것인가는 현재에 달렸기 때문인지 추모에 나선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해답도 함께 찾아가고 있다. 지난 5월 8일과 18일에 열린 세월호 참사 청와대 만민공동회에서도 그랬다.
자본의 이윤만을 좇는 정부정책 아래에서 해경은 움직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생명을 구조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가진 정부는 그 자원을 쓰지 않고 속절없이 배가 물에 잠기도록 하였고, 심지어 수많은 사람들이 생방송으로 그것을 목격하게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수 없었고,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고. 사람들은 세월호 침몰 원인이 된 규제완화와 관료와 기업의 비리 유착관계를 얘기했고,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된 국가관료주의에 대해 얘기했다.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이것이 정말 국가란 말인가. 왜 우리는 그 생명들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는가. 왜 국가는 그들을 구조하지 않았는가!'라고 자문하며 이대로는 두고 볼 수 없다,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거리로 나섰다. 진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개인의 사적인 이익 추구를 넘어서 사람들이 나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공공의 가치로서의 인간 존엄'이란 무엇인가, '함께 살기'란 무엇인가가 더 근본적으로 얘기되고 행동이 시작됐다. 랑시에르의 말을 빌자면, 민주주의란 사법-정치적 형태의 체계도 아니고 사회형태도 아닌, 민의 권력이며, 민주주의운동은 한계를 뛰어넘는 이중적인 것으로서 공공영역에서 인간평등을 모든 분야로 확대하는 운동이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민주주의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퇴진이냐, 책임 추궁이냐를 넘어 '분노를 조직하라'거리에 나선 이들의 구호는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어떤 이들은 '박근혜 정부의 책임 추궁'을 말했고, 어떤 이들은 '박근혜 퇴진'을 말했다. 어떤 이들은 추모행사를 했고, 어떤 이들은 행진을 했다. 이 사태를 바라보는 입장은 다양하고 이 국면을 어떻게 풀 것인가를 보는 입장도 달랐다. 민주주의는 원래 혼란이자 혼란한 질서를 보여주는 것이지 않는가. 정답은 없다. 다만 스스로의 믿음으로 각자 행동하되 서로 동료애를 잊지 않고 싸우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국면에서 대중의 분노를 잘 모아 더러운 '탐욕의 체제', '자본의 체제'에 파열구를 내는 일이다. 균열은 정면돌파나 측면돌파, 우회로 또는 어지럽힘으로써도 만들어낼 수 있다. 각자가 보수 언론의 공격에 순치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균열을 내야만 한다.
자본의 질서를 뒤엎지는 못했지만 직선제로 대표되는 최소한의 형식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낳았고, 헌법에 경제민주화를 집어넣을 수 있었던 87년 투쟁의 성과, 아니 그 정도는 바라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규제완화, 생명안전업무의 비정규직화나 권한 박탈, 관료와 기업의 결탁을 약화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왜 분노하는지 알고, 그 분노에 함께 하며 '세월호 참사'로 상징되는, 규제완화로 드러난 생명경시, 탐욕의 질서를 거부하도록 조직하는 일이다.
5월 8일 청와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청와대에 가지 않았다면, 유족들이 청와대에 가지 않았다면 과연 KBS 사장이 사기극에 가깝지만 공개 사과를 했겠는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교사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과연 현 정부가 속이 비었지만 대책을 내놓고 대국민사과를 하고 남재준 국정원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을 날렸겠는가.
지금은 현 정부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화살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국면이다. 정부가 압박을 느끼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는 풀리지 않는다. 따라서 회살을 권력의 중심, 박근혜 대통령에게 계속 둘 때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넓어지는 것이다. 나아가 적어도 참사의 원인인 규제완화 정책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치와 6·4 지방선거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제대로 된 해결을 위해서는 '박근혜'를 들이지 말라는 표창원씨의 충고는 이 사안의 성격을 축소시키는 일일 뿐이다. 또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사람들의 다앙한 의미를 단순화하고 정부에 대한 압박을 중단하라는 의미일 뿐이다.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침몰의 원인인 규제완화는 지속적인 정부 정책이었고, 정부의 생명경시와 무능한 관료주의는 정부의 운영기조였다.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25명이나 죽어가도 정부는 꿈쩍하지 않았으며,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는 고(故) 이치우, 고(故) 유한숙 어르신의 죽음에도 꿈쩍하지 않고 정부는 공사를 강행했다.
언제 한번 한 생명의 죽음에 슬퍼하고 반성하며 국정방향을 바꾸어 본 적이 있는가. 더 이상 이대로 둬서는 안 된다. 정치란 어느 정당이 집권하는가의 문제만이 아닌 이 사회 질서, 체제를 어떻게 이끌어가냐를 포함한 문제이다. 기업의 이윤만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체제를 이제는 바꿔야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것이 어찌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세월호가 정치적인 문제로 변질된다고 질타하면서도 이번 지방선거에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떨어진다고 걱정을 했다. 표창원씨도 "6·4지방선거가 세월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사히 치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이 말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협소한, 정당정치-의석수 확보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 탐욕의 질서를 바꾸는 (넓은 의미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지만 자신의 의회진출에 영향을 주는 (협소한 의미의) 정치에는 관심이 많다.
왜 새정치민주연합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에 가만히 있겠는가. 바로 정치에 영향을 줄까봐 우려해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세월호 참사가 보여준 우리 사회 부조리에 저항하는 싸움을 계속 만드는 일이다. 잠잠한 시간을 뒤흔드는 일이다. 이 흐름을 6·4 지방선거 이후까지 몰고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머리를, 마음을 돌려야 한다. 참사를 잊게 해서는 다시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상기시키며 사람들을 거리로, 거리로 나오게 해야 한다. 함께 나와 거리에서 '슬픔의 깊이'를 공감하고 '분노의 강도'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 거리에서 느낀 신체적 감흥은 함께 하는 이들을 더 모을 것이고, 그 감흥이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해질 것이기에 우리는 계속 시간을 흔들고 장소를 점거하며 사건을 만들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명숙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