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평상
인천 구월동 구빌라 숲을 누비다가 눈에 들어온 단풍나무 하나. 사방이 노후한 빌라로 가로 막혀 빛이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녹음이 푸르렀다. 찌는 날씨에 지친 우리는 그곳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할머니 한 분 한 분 이곳 평상으로 모여들었다.
여름 이맘때쯤 이 시각이면 항상 이곳에 모인다고 했다. 사는 이야기, 먹을 것, 아들 딸 자랑, 손자 손녀 자랑을 하면서 논다고 했다. 멀리 있는 데다가 시끌벅적, 담배연기로 뿌연 경로당보다는 이곳이 놀기에는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우셨다.
단풍나무와 평상으로 인해 삭막하고 누추한 빌라 동네가 생기발랄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곳에 누가 이런 단풍나무와 평상을 심었던 것일까.
"이 나무는 언제부터 심어져 있던 거예요?" "이 앞 빌라에 살던 할매가 여기다가 요만한(손가락 검지를 보이시면서) 단풍나무 모종을 갖고 와서 심었어. 근데 그놈이 글쎄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니까 이만해진거야.""그럼 이 평상도 그 할머니가 만드신 거예요?"평상은 할매네 아들이 동네 할매들이랑 놀라고 이렇게 밑에다가는 큰 대야를 몇 개 집어넣고 위에다가는 판자때기 덮고, 장판 깔아 줬어. 근데 그 할매가 지난해에 가버렸지, 가버렸어…"우리는 이 소박한 이야기에 크게 감명 받았다. 생명에 대한 감탄도 있었지만, 모종을 심어 마을 사람들에게 그늘을 주었다는 이야기, 어머니를 생각해 동네 어르신들과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평상을 만들어 준 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시대에 접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애잔한 흔적
우리는 살면서 이런 애잔한 흔적을 무심하게 흘겨보고 지나치곤 한다. 지나친 경쟁과 배금주의, 성과주의로 인해서 소소한 행복을 만들어가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는 삶, 그것을 현대인의 삶이라고 착각하고 살진 않았었나 싶다.
살면서 내 안에 단풍나무 평상 하나 간직하고 사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 가장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세상.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고 목 놓아 외친다. 삶다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사는 집 앞에도 할머니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단풍나무 평상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2013년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인천 구월동에서 '틈만나면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기사는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매주 한 편씩 연재하려고 합니다. 또한 이 글에서 사용되는 '사진'과 '포스터'는 '만만한 뉴스(http://manmanhan.tistory.com/)'에 중복 게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