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롯데월드 짓는 거 보면 서울의 정체성이나 역사성은 안중에도 없는 거 같아요. 두바이 따라 하기도 아니고. 세빛둥둥섬도 그래요. 우리도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같은 명소를 갖고 싶다는 그 의도가 싫은 거예요. 내 가치가 아닌 남의 것만 따라하려는 거 같잖아요?"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정석(52) 교수는 서울시정개발연구원(현 서울연구원)에서 13년간 북촌과 인사동 보전, '걷고 싶은 도시', '마을 만들기'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온 도시설계 전문가다.
2007년 3월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서울시의 도시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지난 해 출판된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를 통해 서울이 지향할 방향을 제시한 그는 이번 6·4 지방선거로 선출될 서울시장이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서울의 본모습'을 되살려 주길 기대했다.
포장만 화려했던 한강르네상스 사업"서울은 자연을 활용해서 만든 특별한 도시예요. (중국)북경의 성곽은 네모반듯하지만 서울의 성곽은 능선과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 흘러가는 모양이죠.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는 종로도 서대문 가까이에 가서는 약간 아래로 휘어졌어요. 오래 전부터 물길을 따라 만들어진 길을 그대로 살려서 대로를 만든 거예요. 자연친화적인 역사를 가진 도시죠."
그는 개발연대를 지나 민선시장 시대가 시작되면서 서울의 이런 자연친화성을 되살릴 기회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민선 1기의 조순 시장(1995~1997)은 성수대교(1994)와 삼풍백화점(1995) 붕괴를 경험했다. 내실을 다지지 못한 채 압축 성장을 추구해 온 개발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날 필요를 절감한 계기였다.
2기의 고건 시장(1998~2002)도 1997년 외환위기로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마구잡이 개발보다 체계적인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편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서울은 개발 일변도에서 벗어나 선진국형 도시관리로 어느 정도 전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선 3기(2002~2006), 4기(2006~2011)를 거치면서 다시 개발 위주의 과거로 회귀했다고 정 교수는 안타까워했다.
"이명박, 오세훈 시장의 시정은 개발 중심으로 되돌아갔어요. 3기의 청계천과 뉴타운 정책, 4기의 디자인서울과 한강르네상스 공약은 화려하게 포장됐지만 (비현실적인) 낙수효과를 기대한 대형 프로젝트 사업일 뿐이고 일반 시민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죠."특히 오세훈 전 시장의 한강르네상스 사업은 대표적인 대형개발 프로젝트였다. 강을 막아선 아파트단지들을 재개발하고 공원과 문화시설, 공연장 등을 조성해 한강변을 재정비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오 전 시장의 계획은 특혜 개발의 대가로 사유토지의 일정비율을 국가에 넘기는 내용의 기부채납을 서울시가 요구하고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결국 좌초했다.
정 교수는 한강르네상스나 뉴타운 사업의 실패는 지금과 같은 저성장 시대에 대형개발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고성장 시기에는 자연스럽게 투자가 몰리고 투자자들도 높은 수익을 얻기 쉽지만 경제가 어려우면 민간은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투자를 기피한다. 뉴타운 사업 등은 민간의 활력을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투자 유인을 위해서는 용적률(대지면적 대비 건축물면적) 등 규제를 무리하게 풀 수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기도 했다.
"도시도, 개발도, 개인의 삶도 지속가능해야 해요. 도시가 10년 뒤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시기에 할 수 있는 것만 해야지, 모든 걸 임기 중에 하려 하면 되지도 않죠."공공성 무너뜨린 제2롯데월드 허가과도한 개발은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공공성을 위협한다고 정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대표적인 사례로 제2롯데월드 건설허가와 경복궁 인근의 대한항공 호텔 신축계획을 꼽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정부와 서울시는 초고층건물인 제2롯데월드 건설을 위해 군사시설인 경기도 성남공항의 활주로 방향까지 바꾸면서 예외를 인정했다.
이처럼 기존의 법과 질서를 흔드는 결정은 다른 사람들의 과도한 개발을 막을 명분을 없앤다. 대한항공이 경복궁 옆에 호텔 건설을 추진하는 것도 롯데의 사례를 보고 밀어붙였다는 것이 정 교수의 주장이다. 학교보건법과 도시계획법 등에 따르면 송현동 미국대사관 부지에 호텔을 건설하는 게 어렵지만 최근 규제완화 바람을 타고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과학기술부가 관광진흥법 개정 등 특혜를 제공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의 경우도 용산 재개발 등의 대형 개발 공약이 과거 이명박, 오세훈 시장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우려했다.
"과거의 대형 사업이 왜 안 됐는지, 다시 가능할지, 그리고 이것이 다른 일들보다 우선적인 일인지 따져봐야 합니다."이런 맥락에서 민선 5기(2011~현재)를 맡고 있는 박원순 시장이 개발프로젝트 대신 생활담론 위주의 정책들을 펼친 것을 정 교수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심야전용 올빼미버스와 초중등학교 무상급식, 간호사가 환자를 24시간 전담하는 환자안심병원, 아파트 관리비 내리기 프로젝트 등의 마을공동체 사업, 여성안심귀가스카우트를 비롯한 여성안심특별시 정책 등이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기업과 정부가 주도하는 대형 개발에는 시민이 참여할 일이 거의 없다며 앞으로의 시정은 시민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낼 만한 일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통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어요. 시민들이 모래알이 아니고 주인이 돼야 해요. 시민이 시장이 되고, 국민이 대통령이 되고. 공무원들 믿고 가만히 있다가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난 거니까요."정 교수는 도시에서 이웃끼리 알고 지내며 긴밀한 관계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범죄와 부조리에 대처하는 사회적 감시망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웃집 아저씨의 관심이 폐쇄회로망(CCTV)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범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연대, 관계망 개선이 이뤄지면 '마을 공동체'가 살아나고 음습한 민관유착 등으로 인한 '제2의 세월호 참사'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학부 시절 이후 30년 넘게 도시설계를 연구해 온 정 교수는 '새로 짓는' 것이 아닌 '고치고 되살리는' 방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그의 이런 철학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건축학과 전 명예교수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저서 <영원의 건축(The Timeless Way of Building)>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도시를 인격체로 보고 돌봐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대중과 나누기 위해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활발한 소통을 추구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