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도종환 <폐허이후> 중뼈아프다. '박근혜 정권 심판'과 '존재감 굳히기'를 목표로 이번 선거에 기대를 걸었던 진보정당들의 결과는 처참했다. 역대 최다 후보로 정권의 탄압에 맞서려던 통합진보당은 정당득표율 4.3%를 얻으며 총 37명의 당선자를 배출했다. 정의당 역시 3.6%의 지지율로 총 12명의 기초의원 당선자를 냈고, 노동당은 1%의 득표율을 얻으며 광역1명, 기초 6명 당선자를 냈다. 각 정당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의 브리핑을 냈다.
이와 같은 선거 결과 속에서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온 진보정당 후보들도 있다. 진보정당이 뿌리 내리기에 어려워 보이는 지역에서 변함없는 지지를 받으며 재선·3선에 성공한 의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안소희 통합진보당 파주시의원 당선자, 엄정애 정의당 경산시의원 당선자, 장태수 노동당 대구 서구의회 당선자에게 이번 선거와 결과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주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고, 그들의 삶의 문제에 공감하고 해결하는 생활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이번 진보 정당의 초라한 성적표에 대해서도 "주민들 삶 속에서 문제를 함께했어야 하는데, 공감을 받지 못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라는 진단을 내놨다.
'내란음모 압수수색'에도 주민들의 선택받은 후보
안소희 파주시의원 당선자는 통합진보당 후보 중 유일하게 수도권에서 당선됐다. 파주시 최초 여성 시의원이었던 그는 이번에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서울·경기 지역을 합쳐 당내 유일한 당선자다 보니 느끼는 책임과 역할이 전보다 남다를 것 같다. 안 의원은 "당선이 됐어도 기쁘지가 않다"라고 운을 뗐다.
"정당해산 심판, 내란음모 혐의 등 진보정당에 들씌워져 있는 탄압들에 대해 국민들께 진심을 전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데 국민들과 공감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방선거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표심으로 반영된 것 같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지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와 생활정치를 위해 주민들 가장 가까이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안 당선자는 지난해 국정원 발 '내란음모 광풍' 속에서 자택과 시의회 사무실을 압수수색 당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 재선에 성공했다. 안 의원은 "접경 지역인 파주에서는 무엇보다도 평화가 중요하다, (나는) 그런 활동들을 해왔고, 어렵고 힘든 민원들을 해결하며 4년 동안 해외연수 한 번 가지 않았다"라면서 "그런 부분들을 인정받아 조금 더 지역에서 힘써줬으면 하는 바람이 유권자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방선거 선거운동 당시에는 파주시 긴급위기 가정지원 활동을 하며 인연을 맺은 주민들이 함께하기도 했단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는 정치인이 되라는 문자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 이후 진보정당이 받은 초라한 성적에 대해 "더 현장과 주민 속으로 들어가라는 요구인 것 같다, 우리의 진보적 가치나 정책이 아직은 주민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다가가지 못했던 점은 없는지 돌아보고 계기로 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마을 속으로 들어가 가장 가까이에서 주민들의 눈과 귀가 되겠다,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얻은 의견들을 당에 반영하겠다"라고 밝혔다.
"차별화된 비전 만들어야... 그 중심엔 주민이 있다"
엄정애 정의당 경산시의원 당선자는 4년 전 경산 지역에 최초의 야당 깃발을 꽂은 의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재선에 성공했다. 이에 대해 엄 당선자는 "주민들에게 오는 민원은 꼭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진심이 통한 것 같다"라면서 "앞으로도 주민들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지역구의 어려운 문제들을 잘 챙기는 의원이 되겠다"라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엄 당선자는 경산시 무료급식 조례개정 운동과 작은도서관 활동을 펼치며 주민들의 신뢰를 쌓았다. 또한 그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당선돼도 꼭 다시 찾아오라' '할 일만 잘해주면 된다'던 주민의 말과 취약계층 밀집지역 아파트를 찾아갔던 일이 가슴에 남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이 얻은 결과에 대해서도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일단은 주민들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민들 삶 속 문제를 지역정치로 이끌어 내야 하고 또 성과도 내야 하고요. 그러려면 소통과 정치력, 안목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리더의 역할, 운동 활동가의 역할뿐만 아니라 차별화된 비전을 만들어 일구고 성과를 내야죠. 물론 그 속엔 주민들이 있어야 하고요."엄 당선자는 "앞으로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주민들을 만나겠다"라면서 "묻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항상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사업을 일구고 그걸로 어려운 국면을 돌파해내야 한다"라고 밝혔다.
대구 할매 지지 받은 '이상한 당'의 후보
전통적으로 여당 성향이 강했던 대구에서 김부겸 새정치민주연합 대구시장 후보의 선전은 이번 선거에서 큰 화제가 됐다. 김부겸 후보는 40%의 지지율을 끌어모았지만 끝내 지역주의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 와중에 당당히 3선에 성공한 노동당 의원이 있다. 대구 서구의 장태수 당선자다.
장 당선자는 "그동안 해왔던 지역 밀착형 생활정치가 주민들께 진정으로 인정받은 것 같다"라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직접 사람을 만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 일의 내용이 주민들의 삶을 위로하고 보듬는 활동이 돼야 한다"라면서 "주장이나 주의가 옳다고 표를 찍는 게 아니고 실제 자기 삶을 위로하고 보듬어 주는 정치의 모습에서, 다른 정치의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노인분들의 지지가 많았습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굉장히 높은 지역 특색 속에서 노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당이라는 '이상한' 정당에 있는 친구지만 그분들이 가지는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구체적으로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진보정당이 우리의 이야기도 잘하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만,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실체에 대해서 더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다고 생각합니다."장 당선자는 이번 지방선거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진보정치가 활동하기 좋은 시·공간은 어느 순간 생기지 않는다, 꾸준하게 주민들 곁에서 뿌리를 내릴 때 결국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분열 양상을 보인다는 평을 듣는 진보 정치에 대해서도 "국민들 입장에서는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한 진보정당이 지금은 통합진보당, 정의당, 노동당으로 분산되고, 얼굴도 이름도 달라지고 단절되다 보니 진보정치에 대해서 신뢰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 당선자는 "앞으로 물리적 환경이 열악한 대구 서구의 환경을 개선하고,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지역적 특색을 활용해 지역사회 자체적인 자치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노력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대구에서 진보정치가 이미 현실정치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힘쓰겠다"라고 덧붙였다.
6·4지방선거 이후 진보정당의 초라한 성적표를 두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분석과 비판이 분분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첫 지방선거이다 보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지역 곳곳에 이렇게 '재 툭툭 털고' 건재한 후보들이 존재한다. 아직 진보정당, 진보정치에 대한 민심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세 후보가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말했던 것은 "주민들 속에서"였다. 주민들의 삶의 문제를 함께 보듬는 게 핵심이라는 이야기다. 진보정치가 앞으로 국민들 속에서 더욱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 많다. 이번 선거가 진보정치의 '결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전화위복'의 발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