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차라면 이미 여론이 기운 선거로 봐야 한다. 여기에 시민적 공감이 더 생기면 9%p까지 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10%p차로 벌어졌다면 이건 완전히 다른 평가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박원순은 13%p까지 벌렸다. 상상도 못할 득표…. 그럼 야당은 당장 다양한 각도로 당의 진로나 정책, 운영, 소통 방법들을 새로 검토해야 한다. 말 그대로 '박원순 현상'을 정밀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삼화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가 지난 3월 27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다. 386 학생운동의 상징, 임종석 전 의원이다. 그는 2012년 민주통합당의 사무총장으로 그해 총선을 지휘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곤 여의도 정치에서 멀어졌다. 그로부터 3년, 그는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장 후보 선거캠프의 사령탑이 되어 나타났다.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이 내려진 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박원순 시장은 임 전 의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했다. 그리고는 "저를 돕는 것으로 정치복귀를 시작하면 안 되겠느냐"며 선거 지휘를 부탁했고, 임 전 의원은 이를 즉석에서 수락했다고 한다.
'원순씨 캠프'의 해단식이 있던 5일 오후 서울 광장시장의 철거 건물 캠프 사무실은 집기마저 전부 빠져 나가 더욱 흉흉했다. 그러나 분위기만큼은 상당히 '업'돼 있었다. 전날 당선의 흥이 채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임종석 전 의원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배낭과 운동화, 걷고 듣고 대화하며 그 자체로 '박원순 현상'- 박원순 서울시장의 재선을 이끌었다. 이번 선거의 승리 요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세월호 참사라는 엄청난 사건에 맞닥뜨린 박원순 후보의 공감능력과 신뢰도가 이미 초반 판세를 갈랐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정몽준 후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안전 이슈로 선거를 치렀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못된 캠페인이었다고 본다.
우리 캠페인의 핵심 키워드는 시민이었다. 전략적 기조는 '누가 시민의 편인가'였다. 좁히면 안전 의제로 치른 선거다. 전 국민이 슬픔에 빠진 아주 가슴 아픈 상황에서 박원순이라는 리더가 보여준 태도와 공감능력이 매우 월등했다. 그걸 바탕으로 안전 이슈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고 그걸 극대화할 수 있는 캠페인이 성공했다고 본다. 사람들이 정치에서 염증내는 것을 전부 버리고, 운동화 신고, 배낭 메고, 걷고, 듣고, 현장에서 대화하면서 그 자체로 '박원순 현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 박원순 현상은 어떻게 가능했다고 보나. "우선 과거와 같은 동원유세가 먹히지 않는다. 정치인이 대중연설을 한다고 해서 예전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도 않는다. 또 시민들은 대형 유세차를 동원한 시끄러운 유세와 동원된 집회에 염증을 냈다. 박 후보 역시 그런 캠페인을 바꿔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확고한 신념이었다.
조용한 캠페인을 하겠다는 박 후보의 의지, 또 그런 국민의 마음을 읽어내는 박 후보의 능력, 세월호 정국 분위기가 합해지면서 조용한 선거캠페인이 지속될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박원순 현상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 박 후보는 선거운동 시작 직후 조용히 팽목항에 다녀오셨는데 정몽준 후보의 일정이 공개되면서 진행된 것인가."전혀 아니다. 후보는 출마선언 직후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팽목항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원래 계획된 일정이었다. 그렇게 이미 계획돼 있었는데 정몽준 후보가 방문한다고 알려져서 우리가 당황했다."
- 선거가 시작된 마당에 비공개 일정으로 한 까닭은 무엇인가."그것은 이번 선거 전반에 흐른 후보의 태도였다. 세월호 정국을 선거에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선거 막판 일부 언급은 있었지만 그것은 심판론과 완전히 다른 톤이었다. 이 정국에서 시민들의 마음과 공감하기 위한 것이지 직접이든 간접이든 선거에 세월호를 활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 이번 선거의 악재는 무엇이었나. "정몽준 후보가 스스로 안전 이슈의 한 가운데로 들어왔다. 우리는 선거 내내 정 후보가 안전 이슈에서 안 빠져나가길 바랐다. 결국 그렇게 됐다. 정 후보는 선거 초반 서울지하철 공기 질이 안 좋다, 조사하자. 이렇게 공격했다. 이건 정 후보가 박 후보를 공격하는 모양새지만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지하철 안전이야 정몽준보다 박원순이 더 잘하겠지 하는 신뢰가 있었다.
급식 논란도 마찬가지다. 정 후보가 '농약 급식'으로 불안감을 조성했지만 학교급식과 배식에 참여한 엄마들은 이미 학교급식이 어떻다는 걸 훤히 알고 있다. 대중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이슈를 갖고 정치공세를 벌인 격이다. 둘 다 극심한 네거티브였다. 우린 상대가 네거티브 할 때마다 포지티브로 나갔다. 결국 시민은 포지티브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몽준의 네거티브는 표가 되지 않았다
- 원순씨 캠프엔 중앙당의 역할이 눈에 띄지 않았다. 왜 그랬나."그건 아니다. 오영식 서울시당 위원장이 선거과정 전반의 조직을 담당해주었다. 서울시당과 박 후보캠프 간엔 그 어떤 잡음도 없었다. 다만 중앙당에선 세월호 심판론의 경향을 띠고 자꾸 후보들과 당 지도부를 엮어서 캠페인을 해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서울은 대형 유세차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결합은 그저 인사를 함께 하는 정도로 갈음했다. 인천과 경기에선 그런 캠페인이 많았다. 박근혜 구하기 대 정권심판으로 붙었던 인천선거나 지도부 역량을 막 밀어 넣었던 경기지사 선거가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싶다."
- 김한길·안철수 두 공동대표의 지지율이 낮기 때문에 선거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을 하고 지도부와 후보가 함께 하는 일정을 안 잡은 것은 아닌가."아니다. 북한산에서 인사할 때는 내가 직접 전화해서 시간 괜찮으시면 함께 하자고 했었다. 대표들과 후보가 함께 선거운동을 한다고 해서 박원순 후보의 표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당 지지자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 문제는 캠페인의 내용과 방법이다. 세월호 심판론으로 이번 선거캠페인의 프레임을 잡은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본다.
새누리당은 당 지지도가 높기 때문에 최대한 당 대 당 대결로 몰아가려고 했고 당력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서울은 이런 새누리당의 전략에 아예 상대를 안 해버린 것이다. 새누리당이 원하는 구도에 절대로 말려들지 않았다. 새누리당이 원하고 국민은 싫어하는 프레임. 심판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절대로 안 됐던 선거였다고 생각한다."
- 삼화저축은행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됐다가 지난 3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첫 정치복귀를 원순씨 캠프로 한 셈인데 50일간의 캠페인 동안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무엇인가. "참 억울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계속 억울해 한들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8년의 정치활동 그리고 낙선한 뒤 4년간의 원외생활. 12년의 정치활동을 성찰하는 시간이 됐다.
사건은 억울한 것이었지만 그 사건으로 인한 시간들은 큰 약이 됐다. 거의 여의도를 가본 일이 없다. 그러다보니 내게 다른 눈이 생겼다. 수요자의 시각으로 정치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늘 정치인의 관점에서 판단했는데 그 판단의 기준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 어떤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정치는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적인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게 책임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정당정치인이라면 진보-보수가 번갈아 집권해도 되는 정치구도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과도하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러다보니 아직도 국정원이나 공무원들이 터무니없는 반칙을 한다. 현실에 뿌리박은 정당 정치인들이 해줘야 할 진정한 책임은 정권교체라고 생각한다."
- 기성 정치인의 눈으로 볼 때 원순씨 캠프가 상당히 낯설지 않았나. "50일간 일하며 나 스스로 참 많이 배웠다. 나도 나름 편견이 없고 열린 자세로 사는 썩 괜찮은 사람(웃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순씨 캠프가 만들어지고 소통하는 방식을 보면서 아, 내가 진짜 제도정치권에 오래 있었구나, 깨달았다. 4년간 원외생활을 하고 또 3년간 재판을 하면서 나 스스로 많이 변했고 기성정치인의 티를 많이 벗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박원순'에게 많이 배웠다. 또 이 캠프를 움직여가는 사람들로부터 많이 배웠다. 박원순의 선거과정은 전부 열려 있었다. 무엇보다 박원순은 본인 스스로 갇혀 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었다. 정당과의 관계, 자신의 포지션, 말투, 태도, 행동 하나 하나 모두 책임감을 갖고 움직였다. 박원순의 저런 행동은 어디까지가 원래 자신의 것이고 또 어디까지가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일까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풀을 지켜준다고 표가 되니? 풀 지키는 마음이 표가 돼요"- 무엇이 그렇게 배울 점이 많았나."원순씨 캠프는 서울 광장시장 철거 직전 건물에 있었다. 여기서 일할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났다. 그런데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1층에 '시민홀'을 만들겠다고 했다. 그 바쁜 선거 때, 시간은 자꾸 가는데, 자원봉사자들이 매일 뚝딱뚝딱 뭔가 하긴 하는데 결과가 얼른 안 나왔다.
보통 선거캠프에선 총괄이 내일모레까지 해놓으세요 그럼 딱 돼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 열흘 걸린 것 같다. 원순씨가 정당 후보지만 캠프는 정당만의 선거로 치르는 게 아니었고 시민사회가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불만과 인내를 갖고 지켜보았다. 그런데 점점 내 마음이 바뀌었다. 규격 없고 틀이 없는 공간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날마다 봤다. 그렇게 답답했던 공간이었는데 막상 본선거에 돌입하니 가장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공간이 됐다. 누구나 찾아와 대화하고 토론하는 그야말로 열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만 더 얘기하고 싶다. 캠프 2층과 3층 계단 틈에 아주 작은 풀이 났다. 한 대학생 자원봉사자가 하얀 페인트로 그 풀 가장자리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노란색 화살표를 그렸다. 여기 생명이 자라고 있으니 밟지 말라는 표식이었다.
기성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이 캠프에 올 때마다 나는 그곳을 소개했다. 어떤 이는 "저게 표가 돼?" 했다. 그런 정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런 마음이 표가 되는 거라고. 기성 정치를 떠나 정치를 쉬면서 나도 꽤 괜찮은 시민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니 나보다 훨씬 우량한 시민들이 꽤 많았다. 정당 캠프엔 양복 입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데 이 캠프는 흡사 거리풍경과 같았다. 무슨 카페 같았다. 선거 끝나도 전혀 피곤하지 않은 배움과 힐링이 남는 선거였다."
- 새정치민주연합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나."관성적인 정당 운영, 심각한 내부 분열, 취약한 리더십 등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박원순 후보는 서울에서 상상도 못할 표를 얻었다. 56.0%. 정몽준 후보는 43.1%. 무려 13%p나 차이가 났다. 그럼 여기에 답이 있지 않겠나.
정치는 자기논리와 관성에 빠지면 안 된다. 선거에서 이기고 궁극적으로 집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감해야 할 중간층이 있다. 중간층과 얼마나 소통하고 믿음을 주느냐가 그걸 결정한다. 왜 우리는 대중들로부터 선택받지 못하는가 하는 점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당 운영, 정책, 태도, 소통하는 방법 등 변화가 필요한 것 아닐까 싶다."
- 원순씨 캠프로 정치에 복귀한 셈인데 앞으로는 어떤 정치행보를 이어갈 생각인가."이 캠페인 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이 더 깊어졌다. 정치에 복귀하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모든 노력은 2017년 정권교체에 기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선택으로 나오겠지만 그 고민을 보다 즐겁게 해볼 생각이다. 하도 나한테 감 떨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다녀야 할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