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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인도 가정의 단란한 오후   (조드뿌르)
어느 인도 가정의 단란한 오후 (조드뿌르) ⓒ 박경

타인의 부엌을 엿보는 일은 흥미롭다.

밥솥은 전기솥인지 무쇠솥인지,
라면은 무거운 스테인리스 냄비에 끓여 먹는지 노란 양은 냄비에 끓이는지,
꽃무늬가 화사한 접시를 쓰는지 새하얗고 깔끔한 접시를 쓰는지,
이가 빠지면 바로 내버리는지 시간의 흔적쯤으로 여기고 간직하는지,
무슨 용도인지 알 수도 없는 조리도구들이 번쩍번쩍 빛나는지,
날짜가 한참이나 지난 식재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지,
오래 머무르지 않는 콘도의 싱크대처럼 너무 깔끔해서 허전한지,
여행을 가면 귀한 향신료를 구해 와 이국에서 맛본 음식을 손수 만들어 보는지,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식사할 만큼 식탁의 크기가 적당한지 어떤지,
부엌 창가에는 잎사귀가 작은 식물이 하나쯤 투명하게 자라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온 가족이 둘러앉는 식탁인지, 가족 구성원들이 제각각 한 끼 밥만 간신히 때우고 황급히 사라지고 마는 식탁인지.

말하자면 나는, 곳간에서 인심 나고 부엌에서 행복 난다, 고 믿는 사람이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식당의 주방을 기웃거리곤 했다.

슬그머니 들여다 본 카주라호의 한국식당 주방은 꽤나 인도스러웠다. 후드장치는 고사하고 주방벽도 냄비 바닥도 온통 까맣게 그을렸고, 요리를 하는 인도인 부부까지도 불꽃에 그을린 듯 유난히 까만 얼굴이었다. 널찍한 공간이 민망할 정도로, 번듯한 조리대나 이렇다할 조리도구 하나 없었다. 그래도 닭볶음탕이나 김치 볶음밥 같은 한국 요리가 제법 그럴듯했다.

바라나시 골목에서는 쥐새끼 풀방구리 드나들 듯 한국인이 하는 식당을 드나들었다. 비빔밥이나 라면 같은 모국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나오다 우연히 보게 된 주방의 한 장면. 김밥을 말고 있는 인도 남자의 시커멓고 투박한 손! 한국인이 하는 식당이라고 꼭 한국인이 조리하라는 법은 없지만서도, 뭔지 모르게 좀 뜨악했었다. 엄마 손맛이라 생각하고 먹었는데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옆집 할머니가 해준 걸 먹은 뒷맛이랄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드뿌르에서 만난 부엌일 것이다.

우리 가족이 머문 호텔에는 외부로 노출된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노라면, 이웃한 가정집의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이곤 했는데, 거기에는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늘 활짝 열려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바닥에 둘러앉은 여인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치대어 놓은 밀가루 반죽을 홍두깨로 살살 밀어서 반대기를 도톰하게 만든 후, 기름 두른 팬에 하나씩 구워 내고 있었다. 노르께한 인도식 팬케이크쯤 될까. 그게 늦은 오후의 간식인지, 이른 저녁의 한 끼 식사인지는 모르겠으나 소꿉놀이처럼 조촐하고 소박해 보였다. 동원된 조리도구라고 해봐야 1구짜리 버너와 팬, 반죽 그릇, 홍두깨가 전부. 그렇다 해도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여인네들의 대화 속에 끼지 않고 돌아앉은 사내는, 팬케이크 한조각과 짜이 한잔의 여유를 누리고 있고, 마당에서는 까만 단발머리 어린 소녀가 제 덩치만한 아이를 끼고 빙빙 돌았다. 내려다보고 있던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소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사진을 찍어도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여인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작고 단단한 행복을 감히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에 그리 많은 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 준 평화로운 오후였다.

 인도 남자의 김밥말기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바라나시)
인도 남자의 김밥말기는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바라나시) ⓒ 박경

덧붙이는 글 | 2013년 1월 한달 동안 인도를 여행했습니다.
델리→조드뿌르→아그라→카주라호→바라나시→아우랑가바드(아잔타 석굴)→뭄바이
우리 가족의 여정은 이러했지만, 제 여행기는 여행의 순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엽서 한 장 띄우는 마음으로 씁니다.



#인도#인도 여행#인도의 주방#인도의 단란한 가족#행복한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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