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재임 시절 '젊은 층 우군화'를 위해 대학 내에 보수단체 모임을 만들고,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린 정황이 드러났다.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특별수사팀(팀장 이정회 춘천지방검찰청 원주지청장)은 16일 열린 34차 공판(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에서 원 전 원장이 전 부서장 회의에서 한 발언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증거로 제시했다.
원 전 원장이 이 회의에서 지시한 '원장님 지시·강조말씀'은 지난해 3월 발언 요지를 정리, 국정원 내부전산망에 올라온 형태로 공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녹취록까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검찰은 이날 피고인 신문에서 여기에 담긴 상세한 발언을 언급하며 원 전 원장을 압박했다(관련 기사 :
"민노총·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 우리가 앞장서서 대통령님 진의 적극 홍보").
검찰은 원 전 원장이 여러 차례 '대학생 모임을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2010년 7월 19일, 원 전 원장은 "젊은 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 등은 개별 업무에 상관없이 전 부서에서 공유하라"라면서 "북의 위협을 막기 위해 초·중·고생부터 교육시켜나가고, 대학생들이라든가 곳곳에 모임을 만들어서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해 9월 17일 회의에서 원 전 원장의 지시는 더욱 상세해졌다.
검사 : "2010년 9월 17일 자 녹취록 제시하겠습니다. 피고인은 '학교별로 그러니까 거기는 보수학생만 있는 게 아니고 뭐가 있어야지, 자기들 나름대로 뭘 한다는 연구모임 비슷한 거를 해서, 동아리를 만들어 가지고, 대학생들이 같이 공동으로 이런 거를 알고 싶다는 걸 만들어놓고 그걸 우리가 지원해주면서 가면 될 것'이라며 '각 지부에서 아이디어도 내고 해서, 학생 모임 같은 걸 하면 되지 않냐, 불교 학생 모임 이런 것도 우리 쪽으로, 정체성이 확립 안 됐으면 우리가 직접 들어가 조정해서 만들어주고, 그걸 엮어가지고 큰 모임을 만들어도 된다'고 말한 사실을 기억합니까?""젊은 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 전 부서가 공유해야"
녹취록에는 원 전 원장이 2010년 12월 17일과 2011년 1월 21일 열린 회의에서도 대학생 모임 지원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검찰은 다른 회의에서는 그가 지역 보수단체 등을 간접적으로 지원해주고, 학교는 물론 일반인과 예비군을 상대로 쓸 교육자료를 만들어 배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면서 이를 '젊은 층 우군화 전략' 중 하나였다고 설명했다. 원 전 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국정원 고유 업무와 연관이 없고, '정보활동 내용을 청와대에만 보고할 뿐 직접 유관기관에 전파하지 않는다'는 그의 진술과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도 지적했다.
이날 원 전 원장의 답변은 이전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던 국정원 직원들의 '모르쇠' 태도와 비슷했다. 그는 "녹취록이 그렇게 있다고는 하지만, 제가 발언한 사실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젊은 층 우군화 전략'은 보수세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보 교육 강화"라고 반박했다. 또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민주노동총연맹 등이 자라나는 학생한테 잘못된 생각을 넣어주고 있다"라고 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원 전 원장은 국정원 심리전단의 사이버 활동 역시 잘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종북세력 척결, 국가안보 중시 등 큰 생각은 당연히 원장이 갖고 있지만 (개별 부서 등이)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사안까지는 알지 못한다"라며 대선 개입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부인했다. 내부전산망에 올라왔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의 존재도 2013년 3월 18일 언론이 보도한 뒤에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자료 자체가 별 다른 의미가 없고 회의 때 받은 보고자료를 그때 그때 읽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원 전 원장과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의 피고인 신문으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공판은 9부 능선을 넘었다. 남은 것은 두 차례 공판뿐이다. 재판부는 오는 6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정원 트위터팀(안보5팀)에서 활동했던 김아무개씨 이메일 첨부파일의 증거 채택 여부 등을 판단한 뒤 6월 30일 검찰과 변호인의 최종 의견 진술을 듣는다.